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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퍼톤스 슬로건의 색상에 맞춰 깃발을 만들었다.
페퍼톤스 슬로건의 색상에 맞춰 깃발을 만들었다. ⓒ 조용미

밴드 음악이 나오면 신나게 깃발을 흔드는 이가 있다. 동지들은 "밴드휀걸 신났네"하며 웃는다. 밴드휀걸(만24세, 여, 대학생, 화성시)은 그들을 웃게 하기 위해서라도 몸을 더 흔든다.

"이때 아니면 우리가 언제 서울 한복판에서 노래를 하고 깃발을 흔들겠어요. 마치 록페스티벌처럼 즐기는 거죠."

같은 목적을 가진 이들이 모여서 다 같이 노래 부르고 소리 지르는 것이 광장과 록페의 공통점 아니던가. 대체로 혼자 간다는 것도 공통점 중 하나다. 그곳에 가면 우리는 동지가 된다. 서로 물을 건네고 간식을 건네고 사진도 찍어준다. 코노(코인노래방) 비용으로 후원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불의로 가득한 세상에 고함이라도 질러야 답답함이 해소된다는 거지 진짜 신난다는 건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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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공대생 밴드'페퍼톤스'를 따라 밴드휀걸은 화학공학과를 선택했다. 페퍼톤스가 공대에 대한 심리적 장벽은 낮춰주었지만 학점의 장벽은 해결해 줄 수 없어 그는 계속 졸업을 유예 중이다. 그는 꼭 대학원에 가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계엄이 터져버렸다. 개인이 애써 일구는 일상을 국가의 이름으로 툭, 엎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에 그는 허망함이 앞섰다. 그날 그는 기말고사 공부를 하다가 거의 마지막 버스를 타려고 도서관에서 나왔다. 엑스(트위터)에서 계엄이라는 소식을 보고 놀라 버스를 놓쳤다. 다행히 막차를 타고 집에 올 수는 있었지만 버스 정류장에서 느낀 공포와 분노가 생생하다.

당시 그는 택배분류알바를 하고 있어서 오전 7시까지 출근하려면 6시에는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도 잠을 자지 못하고 당장 국회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무단결근을 하면 바로 잘릴 테고 먹고살 일이 막막하다. 그런데도 신변의 위협이 느껴질 만큼 불안해서 트위터를 보고 또 보았다. 누구라도 이야기 나눌 사람이 있었다면 조금 나았을까.

"국회 라이브를 계속 보는데 행여 총소리가 울리면, 누군가가 죽으면, 그 장면을 보고 내가 제정신일 수 있을까 두려웠어요. 근데 안보는 게 더 무서워서 계속 봐야만 했죠. 제발, 제발 하면서."

그는 수많은 알바를 전전하며 부당한 대우를 받은 탓에 정치에 관심이 없지 않다. 글쓰기 과제로 '주 120시간 망언과 포괄임금제'에 대해 썼을 정도다.

"큰 거 바라지도 않아요. 주휴수당이나 제대로 챙겨주면 좋겠어요. 500원 더 줘놓고 최저보다 더 챙겨줬는데 주휴수당도 줘야 하냐는 말을 할 정도로 너무 야박해요."

그는 '밴드휀걸' 이전에 오랜 2D덕후로서 <룬의 아이들> 등 정치투쟁에 관한 판타지소설을 읽어온 덕분에 혁명과 정치체제의 대립 같은 말들이 낯설지 않다. 얼마 전 전민희 작가가 인스타에 '마감 치고 집회 나왔다'는 글을 쓴 걸 보고 "짱이다, 저렇게 살아야지" 다짐했었다.

 경복궁 앞에서 깃발을 휘날리는 밴드휀걸
경복궁 앞에서 깃발을 휘날리는 밴드휀걸 ⓒ 최해나

그래도 집회는 처음이다. 그의 부모는 80년대 운동권 출신인데 딸이 정치를 너무 외면한다고 타박했었다.

"세월호와 이태원을 겪은 세대인데 어떻게 정치를 외면하겠어요. 세월호 때는 중학생이었는데도 구조자 명단을 계속 실어 나르는 계정을 하루 종일 클릭했었어요. 한 명이라도 더 늘어나는 걸 보고 싶어서. 이태원 사건은 또래들이고 더구나 같은 학교 학생도 있었으니까 아주 가까이에서 느꼈죠. 세월호가 재현되는 거 같아서 너무 괴로웠어요."

오히려 너무 정치적인 시대를 살아서 정치적 압박이 큰 게 아닌가 싶다. 커뮤니티 등에서 정치 이야기는 절대 못하게 하는 식으로.

그는 12월 14일부터 광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첫 주에는 오래전부터 잡혀있던 덕후 행사가 있어서 나올 수가 없었다. 코스프레를 하기로 되어있어서 그 추운 날 슬리퍼를 신고 나왔다. 행사가 끝나고 '국민의힘' 의원들이 투표에 불참했다는 말을 듣고 그때라도 달려가려 했더니 친구들이 말렸다. 슬리퍼 차림으로는 얼어 죽는다고.

알바 때문에 그는 2주에 한 번씩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남태령 1차 때 안 나가는 주여서 안 갔다가 후회가 컸다. 한강진 때는 참기 어려웠다. 마침 민주노총이 함께 한다는 소식을 듣고 뛰쳐나갔다. 종일 집회장을 지키고 집으로 오는 길에 육교 위에서 깃발과 응원봉의 물결을 보았다. 광화문에서 넘어오는 사람들이었다.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진짜 교대하는 느낌이었어요.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의 자리를 채워주는 걸 보고서 매일 못 가도 죄책감 가질 필요 없구나 생각했어요."(라고 했지만 그는 말하는 내내 하루 밖에 못 갔고요, 늦게 갔고요 하는 식으로 부족한 부분을 말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올출(모두 참석)은 아니니까요"라고 해서 나는 처음으로 올출 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올출이 아니라는 그는 연대집회 이야기만 한 시간 넘게 했다. 탄핵광장이 벌써 4개월을 훌쩍 넘겼으니 그간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겠는가.

어릴 때부터 항해소설을 좋아했던 그는 배를 만들고 싶어 거통고조선하청지회에서 하는 '무지개 조선소'에 참여했다. 이번에도 알바 때문에 늦어서 배는 못 만들고 배 안에 넣는 공을 만들었다. 공에는 우리 사회에서 철폐해야 할 것들을 적어 넣었는데, 그 리스트를 정리하면서 그는 "5인 미만 사업장에도 근로기준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내용을 적었다. 그가 일한 사업장들은 대체로 근로기준법을 무시했다.

"동지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웠어요. 단순한 작업이라 쉬는 시간도 없이 일했더니, 서로 근로감독관이 되어서 강제휴식을 시키라고 해서 다 같이 웃었죠. 우리는 자율적으로 왜 쉬지 않고 일하는가, 묻고 곁에 있는 사람들이 좋아서,라고 답하던 순간들이 기억에 남아요."

진수식을 할 때는 배를 이끌고 행진하면서 모든 투쟁현장에 연대했다. 안국역에서 광화문으로 가는 길에 크고 작은 집회와 선전전에 동참하여 그들의 구호를 함께 외치고 서로를 환대해 주었다. 연대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깨닫게 된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어느 순간 차량이 빠지자 한 동지가 '민주노총만 길을 여는 게 아니라 여러분도 길을 열 수 있습니다'라고 외치더니 갑자기 막 뛰어갔어요. 우리도 막 뛰었죠. 그 순간이 너무 행복했어요. 누군가 사진을 찍어주었는데, 다들 아주 행복한 표정이었어요. 진짜 행복했으니까요."

지혜복 선생님과 이학수 조합원의 영장신청이 된 날, 그는 행진 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시민들을 향해 성북서 앞으로 와달라고 목이 터져라 호소했다. 행진이 끝난 후 성북서에 갔을 때, 이미 사람들이 많이 와있었다. 잠시 후 돌아보니 뒤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와주었다. 그날의 감격은 그를 이전과 다른 인간, 연대시민이 되게 해 주었다.

"학폭피해 당사자였던 사람으로서, 학폭 피해자라면 누구나 원하던 교사가 바로 지혜복 선생님인데 그런 분이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면 이 나라 교육은 미래가 없는 거예요. 이미 많이 썩었지만. 가면 항상 안아주시는데 자주 못 가서 미안할 따름이죠."

또 한 번 연대시민으로서 자리 잡은 날은 거통고지회장 김형수 동지가 고공농성에 들어간 날이다. 소식을 듣자마자 택시를 타고 달려간 그곳에는 아직 시민들이 거의 없었고, 경찰들은 조합원들을 업무집행방해로 체포하려 들었다. 김형수 동지를 지키기 위해 그는 최대한 일반시민처럼 행동하며 그 자리를 '지켰다.'

일반시민처럼 보여야 한다는 게 참으로 웃기는 일이지만, 말벌동지와 일반시민 사이에 틈이 생기고 있는 건 사실이다. 요즘 말벌동지들은 '어떻게 하면 일반시민과 말벌시민이 분리되지 않을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더 나아가 '어떻게 연대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도 연대하게 할까. 앞으로 어떻게 계속 연대할 것인가' 등에 대해 고민한다.

얼마 전 울산 이수기업에 가서는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문화제에 참석했는데, 갑자기 구사대가 몰려와서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머리를 잡아당기고 밀치고 깔아뭉개서 손가락이 부러지고 다리에 피가 난 사람도 있었다. 그도 팔을 낚아채이는 바람에 빨갛게 부었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경미한 편이었다.

"뒤쪽에 흰색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경찰이 기수들에게 대오 안쪽으로 가라고 해서 몇몇은 안쪽으로 들어갔는데, 공간이 생기자마자 그들이 밀고 들어온 거예요. 2025년에 구사대라뇨."

나는 무섭지 않았냐고 집요하게 물었다. 무서운데도 가는 건 같은 노동자로서 동질감 때문인지 동지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도 물었다. 그는 놀랍고 무섭지만, 시민이 한 명이라도 더 있어야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걸 안 이상 연대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모든 현장, 모든 시간에 갈 수는 없지만, 시간과 체력이 되는 한 달려가고 싶다며. 하긴 연대의 모든 순간이 행복했으니 안 갈 이유가 없다.

"숨 쉬고 밥 먹는 것처럼 그냥 해야 하는 일이 되었어요. 동지들이 있는 곳에 있을 때 내가 나라고 느껴져요. 연대하는 말벌시민이라는 자아가 생긴 거죠. 이미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연대하는 게 자연스러운 행동양식이 된 거예요."

연대하는 자아가 생긴 만큼 학교에서 느끼는 괴리감이 크다. 학교 속 커뮤니티는 여전히 정치 이야기 하는 걸 불편해 한다. 그가 열심히 광장에 나가는 걸 다들 알고 응원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공적으로는 발화할 수가 없다. 때로 그런 무관심을 조장하는 분위기가 견디기 힘들다. 그래도 그는 기어이 자신의 자리를 마련해 냈다.

"재미있는 건요, 친구들이 집회에 가고 싶을 때 제게 물어봐요. 중간매개라도 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못 가서 미안하다는 친구에게는 '괜찮아, 후원해. 카카오뱅크 심규협'이라고 말하면 흔쾌히 후원해 줘요. 그러니까 연대는 느슨하고 유연해야 해요."

그들은 무관심한 게 아니라 여력이 없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그도 곧 풀타임 알바를 시작할 계획인데, 주 1회라도 시간을 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정 안되면 후원을 할 거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요."

그에게 광장은 해방의 공간이다. 해야 하는 이야기지만 학교나 다른 곳에서 못하는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즐거운 곳이다. 좀 더 열린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많은 것을 나누며, 그럼에도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서로 다른 이야기가 충돌하기도 하는 독특한 공간, 동시에 어디서든 열릴 수 있어 매력적인 공간이다. 광장이 광장이라는 고유의 역할을 다할 수 있게 계속 열렸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남태령도 한강진도 혜화역도 광장으로 만들어냈다. 학교에서 광장이 열리는 날도 곧 오겠지.

그는 최근에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기술적으로 노동자가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아리셀 화재를 보니까 불이 나기 쉬운 재료들이었어요. 완제품은 안전하지만 재료들은 안전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노동자들이 일하는 환경이 안전하지 않은 거죠. 대학원에 꼭 가서 노동자가 안전한 기술을 개발하고 싶어요. 곧 대학원노조에 가입할 거예요."

그가 꼭 대학원에 진학해서 대학원노조에 가입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https://brunch.co.kr/@toddle222


#광장#탄핵#페퍼톤스#응원봉#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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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toddle2) 내방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늘 무언가를 추구한다. 거실에는 모임이 끊이지 않았고 학교와 마을에서 사람들과 온갖 작당질을 꾸몄다. 정해진 궤도에서 벗어나기를 좋아해서 지금은 갈무리하지 못한 것들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쓰고 그리는 일을 한다. 에세이, 그림책, 소설을 넘나들며 막무가내로 쓴다. 깨어지고 부서진 것들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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