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내포에서 융성한 불교는, 지리적으로 태안이 그 시원이다. 중국에서 뱃길로 태안반도에 닿은 불교가, 웅진과 사비를 향하며 골마다 번성해 나갔다. 가야산 동쪽 분지, 흥선대원군 아버지인 남연군 묫자리도 본 주인은 대사찰이었다. 풍수지리를 신봉한 대원군이 가야사를 불사르고 묘를 쓴 일화는 지금도 입방에 오르내릴 지경이다.
서산 운산에 가면 바위를 뚫고 나온 '서산마애삼존불'을 만날 수 있다. 백제의 미소라는 삼존불은 온화함과 평온 그 자체다. 마주하는 이는 물론 주변 초목도 미소 짓는다. 마음으로 주고받는 염화미소의 정수다. 옅게 남은 붉은 입술에선 사그라든 정염의 오묘함마저 느껴진다. 이런 소회가 존엄엔 무례일까?
삼존불의 온화한 웃음, 덩달아 미소 짓는다

▲서산마애삼존불'백제의 미소'라는 칭송을 받는 서산시 운산면 소재 마애삼존불. ⓒ 이영천
태안에서 또 다른 삼존불을 만날 수 있다. 읍성의 북풍한설을 막아선 백화산에서다. '태안마애삼존불'로 서산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모습만 뚜렷할 뿐,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마모되었다. 가운데 작게 조각된 관음보살을 좌·우로 크게 조소된 석가여래와 약사여래불이 어딘가로 인도하는 모습이다. 딛고 선 연화대가 허공에서 미래를 향해가는 느낌이다.

▲태안마애삼존불백화산 태을암에 있는 태안마애삼존불. 땅에 아래가 묻혀있던 걸 파낸 당시 모습이다. 지금은 집을 지어 보존 중이다. ⓒ 국가유산청
서로 다른 표정의 현시인 이들 삼존불은, 불교가 퍼져나간 행로에서 제각기 중생을 충실하게 포용했으리라.
어느 날 갑자기 태안이 다시 돌아왔다. 땅이 새로 열린 개벽처럼 말이다. 1914년 일제가 서산에 편입시킨 후 75년 만인 1989년이다. 고려 말과 조선 초, 왜구의 극심한 침탈에 당시 수령들이 아전 몇과 함께 서산과 예산을 전전한 역사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호위무사 거느린 듯한 이 읍성
태안읍성 뒤에 선 산이 상서롭고 기품있다. 그리 높아 보이진 않으나, 노출된 바위가 굵은 뼈대를 연상케 하는 골산이다. 해발 284m의 백화산이다. 그 앞에 앉은 읍성이, 기골이 장대한 호위무사를 거느린 듯 편안해 보인다.
멀리 팔봉산, 도비산과 호각세를 이루며 뿔처럼 솟았다. 너른 평야가 이들 산에 매달린 모양새다. 백화산 자락이 사방으로 뻗쳐 서해에 몸을 담근다. 뻗어내린 산자락이 손바닥 모양으로 태안반도를 열었다. 바다가 땅으로 파고든 골마다 숨겨진 전설이 파도처럼 철썩인다. 그 한가운데에 앉은 백화산이 무게추 역할을 한다.

▲태안(해동지도)태안읍성이 강조된 해동지도. 편 손바닥 모양의 태안반도가 잘 그려져 있다. 태안읍성-안흥진성-소근진성으로 이어진 방어체계가 한 눈에 보인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마한의 신소도국(臣蘇塗國)이었다. 하늘에 제사 지내는 성역이라는 소도 칭호로 미루어, 태안은 제천의식 중심의 부족국가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백제 때는 성대혜현(省大兮縣)으로, 통일 신라 땐 소태현(蘇泰縣) 또는 소주(蘇州)였다.
고려 충렬왕 때 이곳 출신 환관 이대순이 원나라 황제의 은총을 입어 얻은 이름이 태안이다. 국태민안(國泰民安)에서 파생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때 고을을 다스릴 목적으로 백화산 두 봉우리를 둘러싸 말안장 모양으로 성을 쌓았다. 백화산성이다. 하지만 출토된 유물을 통해, 실제는 백제 때부터 태안을 다스렸음을 유추하곤 한다.

▲백화산성백화산 정상 봉화대 아래에 일부 남아 있는 백화산성의 성벽. ⓒ 이영천
지금도 서해안 방어 목적의 군부대가 산 정상에 주둔 중이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을 향한 요새로써 태안반도의 중요성은 여전해 보인다. 백화산성 절반 이상이 군부대에 편입되어 있다. 태안마애삼존불을 모신 태을암과 그 주변으로 성벽 일부가 남았고, 조선 시대에 생긴 봉화대가 산성에 속했음을 웅변할 뿐이다.
소근진성이나 안흥진성과 연계된 방어 체계는 조선 시대 구축된다. 태안읍성의 행정 기능에도 불구하고, 비상시 대피와 항쟁 용도로써 백화산성의 역할과 존재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폐성되어 사용하지 않는다'는 기록이 그 근거다.

▲태안읍백화산 정상에서 본 태안읍과 남면 방향. 사진 가운데, 누런 흙이 드러난 곳이 태안읍성이다. ⓒ 이영천
백화산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경관이 일망무제다. 서쪽 손바닥 형상의 땅은 물론 천수만과 가로림만, 바로 아래 태안읍의 길과 집들이 손안의 미니어처 같다. 태을암에서 임도를 따라 편하게 산에서 내려와 읍성 동문을 향한다.
다른 나라 외교관 자주 머물렀던 곳
태안에도 읍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도 그럴 것이 행정과 군사를 총괄하던 읍성보다 안흥진성의 규모가 훨씬 더 컸던 까닭이다. 또한 나라는 물적, 군사적으로 엄청난 지원을 안흥진성에 쏟았으며, 세곡선 관리와 안전에 특히 민감했다. 읍성과는 정반대였다.

▲태안읍성 동문복원된 태안읍성의 동문과 성곽. ⓒ 이영천
둘레 728m의 작은 읍성이다. 그러함에도 성문 등 엄연한 격식을 갖춘 성곽이었음을 여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나마 동문 일곽 성벽이 복원되어 하나의 실체로서 옛 읍성의 존재와 긍지를 웅변하는 중이다.
태안읍 곳곳에 읍성의 오랜 존재를 증명하는 지명들도 오롯하다. 동문리, 남문리는 물론 수령의 행정업무와 재판이 열리던 옛 동헌 '목애당' 등이다.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리겠다는 함의에 맞는 선정을 펼쳤을까. 오랜 기간 군청 민원실로 사용되었다니, 그 뜻의 절반은 채워낸 듯 보인다.

▲목애당태안현의 동헌으로, 삼문 앞 회양목이 고을과 동헌의 나이를 짐작케 한다. ⓒ 이영천
남문 앞 옛 건축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여느 읍성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시설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경이정'(憬夷亭)이다. 관에서 관리하던 휴식과 집회 기능의 정자다. 조선 초 정종 때의 건축물로 추정한다. 정월 대보름이면 지역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치르는 곳이기도 하다.
태안이 밖으로 열린 외교 도시였을까. 고양 벽제관이나, 서울 독립문 자리에 있던 영은문 같은 존재였을까. 아니면 중국 사신 숙소로 변해버린 한양의 남별궁 같은 지위였을까. '경이'는 멀리서 항행해 온 사신의 평안을 기원하는 뜻이란다.

▲경이정태안읍성 남문 터 앞에 앉아 있는 경이정. ⓒ 이영천
산둥반도에서 안흥항으로 사신이 오갔나 보다. 나라를 세운 초기, 명나라와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따라서 바닷길로 오는 명나라 사신을 안전하게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중국 사신이 들어와 여기서 휴식을 취했다니 말이다.

▲태안읍성(1872년지방지도_부분)태안읍성의 성곽과 주요 시설 및 남문 앞 경이정이 그려져 있다. 뒤 백화산엔 '고산성지'라고 씌여 있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기실 태안읍성은 큰 아픔을 간직한 성곽이다. 애석하게도 내포의 동학은, 동학혁명 역사에서 그다지 큰 비중으로 다뤄지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태안과 서산지역의 동학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목 졸라서, 매 맞아서, 작두로... 희생당한 민중들
교형은 목을 매다는 형벌이다. 장형은 곤장이라면 이해가 쉽다. 암벽은 이들 형벌의 앞 글자를 따서 교장(絞杖)바위가 되었다. 선생님의 지칭이 아니다. 얼마나 잔혹한 학살이 자행되었으면, 저런 끔찍한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1894년 9월(음) 전라도 삼례에서 반외세를 외치며 재봉기한 동학군에 호응하여 충청도 동학도 봉기에 나선다. 그달 말 해월 최시형의 통문에 내포에서도 수천 명이 기포한다. 10월 1일엔 태안과 서산 관아를 잇달아 점령한다. 태안읍성이 이때 크게 훼손된다. 다음날 이들이 합세하여 해미읍성마저 함락시킨다.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동학군이 당진 승전곡에서 조·일 연합군에게 승리한다. 10월 24일이다. 연달아 예산 신례원과 관작리에서도 승전고를 울린다. 여세를 몰아 내포 최대 도시인 홍주성을 공략하나 패배하고 만다, 10월 28일이다. 동학군은 해미읍성으로 후퇴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교장바위1894년, 태안에서 붙잡힌 1백 수십 동학농민군이 여기서 교형과 장형 등으로 희생당했다 해서 이름이 '교장(絞杖)바위'가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일본인 교장 선생의 고마움을 기려 '교장(校長)바위'라는 주장도 있다. ⓒ 이영천
공주를 지키고 있던 토벌군 이두황이, 이때를 틈타 총구를 내포 동학군에게 돌린다. 가야산 자락 일락산에 주둔하는 척하며 은밀히 해미향교로 진군, 해미읍성을 기습공격한다. 11월 7일이다. 패배한 동학군이 밀리고 밀려 각지로 흩어진다. 태안 동학군도 마찬가지다.
악랄하기로 호가 난 이두황이다. 여기서 그칠 인사가 절대 아니었다. 태안 깊숙이 진군, 10명이 1개 조로 밀정을 앞잡이 세워 동학군 색출에 나선다. 태안에서만 수백 명이 붙잡힌다.
이들 중 1백 수십을 읍성에서 총 개머리판으로 쳐 죽였단다. 11월 15일이다. 나머지 일백 수십을 교장바위에서 말 그대로 목을 졸라서, 매를 쳐서, 심지어 작두로 목을 베어 죽였다고 한다.
교장바위 아래 '동학혁명 추모탑'이 조촐하다. 이두황 군에 희생당한 후손들이, 보리며 쌀 등 십시일반으로 모금하여 1978년 세운 탑이다. 동학혁명에 초개와 같이 나선 농민군 후손답다. 제아무리 하찮아도, 서로 보듬으면 기억이 된다는 걸 후손들이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태안 동학농민혁명 추모탑1978년 희생자 후손들이 십시일반 모금으로 세운 추모탑. ⓒ 이영천
교장바위와 추모탑을 뒤로하고 아래로 내려오자, 태안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친구인 듯 반겨준다. 길이다. 민중이 닦은 길이다. 여러 갈래일 망정 이렇듯 길은 언제나 놓여 있다. 어떤 길을 갈 것인지는 주체와 판단의 몫이다. 하지만 역사는 오직 한길뿐이다. 패배와 살육, 쓰라린 아픔이 서렸어도 변화와 혁신, 진취적 낙관을 열망하는 길뿐이다.
태안마애삼존불이 걷는 길은 어떤 길일까? 두 여래불이 인도하는 관음보살의 길이 문득 궁금해졌다. 부분 복원된 태안읍성에서, 마애삼존불 길의 끝자락이나마 엿볼 수 있길 바랐다. 그런 간절한 열망이 연무처럼 백화산을 감싸고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