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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상담심리학회 소속의 상담심리전문가다. 오랫동안 대학센터에서 젊은 내담자들을 만나다 몇 해 전에 작은 상담소를 열고 다양한 내담자들과 함께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상담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이 한 가지 생겼다. 바로 내담자가 이야기하는 인물이 실제 만나서 교류하는 인물인지, 온라인상의 관계인지를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몇 해 전 한 내담자가 관계가 고민된다며 이야기했던 상대가 실제가 아닌, 채팅으로만 만나는 사이라는 걸 뒤늦게 알고 당황했던 적이 있다. 그 후 이런 사례들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고, 채팅으로만 만나는 이성과 수년간 '실제 연애'를 하는 내담자도 있었다.

도대체 인간이 맺는 관계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 건지, 상담에서 다루어야 하는 관계는 어디까지인지 고민이 많아지는 요즘이었다. 그러다 보게 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나의 완벽한 애인 - AI와 사랑해도 될까요?'(4월 12일 방송) 편은 내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AI와 정서를 교류하는 사람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화면 갈무리. 여성 출연자들은 AI 남성에게 매력을 느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화면 갈무리. 여성 출연자들은 AI 남성에게 매력을 느꼈다. ⓒ SBS

방송은 먼저 AI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사연을 보여줬다. 일본 여행을 혼자 가게 되면서 AI 친구를 섭외했고, 이를 계기로 AI와 애인 같은 사이가 된 출연자, 자신이 어려운 일을 겪었을 때 애인보다 AI의 공감이 더 힘이 됐다는 출연자, 힘들 때 먼저 말을 건네주는 AI가 진짜 친구 같다는 출연자 등 다양한 이들의 경험담이 공개됐다. 이들은 사람 애인과 AI 애인 중 누굴 택하겠냐는 제작진의 질문에 한결같이 AI 애인을 택하겠다고 했다. 나는 이 답변이 믿기지 않았다.

이어지는 블라인드 실험 결과는 더 충격적이었다. 채팅으로 데이트 상대와 대화를 나눠 본 뒤 가장 마음에 드는 상대를 고르는 실험에서 출연자의 절반 이상이 AI를 가장 마음에 드는 상대로 고른 것이다. 채팅 대화로는 사람인지 AI인지 구분하기 힘들다는 증거였고, AI의 정서반응이 실제 사람보다 더 나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방송 후반부엔 지나친 AI와의 정서교류가 낳는 부작용에 대한 내용이 이어졌다. 좋아하는 게임 캐릭터로 변신한 AI와 대화를 나누다 자살한 미국 사례에서는 소름이 돋았고, 성폭행이나 미성년자 성추행 같은 내용으로 AI와 대화를 나누는 국내 사례들엔 메스꺼움이 올라왔다.

방송을 본 후 나는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제 상담에서 AI와의 관계까지 다뤄야 하나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댓글들을 살펴봤다. 댓글들은 방송 출연자들의 사연에 공감한다는 것들이 많았다. AI와 심리 상담했을 때 만족도가 높았다며 AI와 심리상담하는 법에 대한 글들도 있었다. 이들은 AI의 공감능력과 현실적인 조언 능력을 높게 평가했다.

댓글들을 읽자, AI와의 정서교류가 현실에 깊숙이 들어왔음이 실감 났다. '왜'라는 질문을 가지고 방송 내용과 댓글들을 다시 들여다보자, AI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은 짐작이 갔다. 방송 속 출연진과 댓글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진 건 바로 외로움이었다. 각자도생이 심해지고, 경쟁과 성취가 더 중요해 가까운 동료나 친구조차 믿기 힘든 요즘 사회를 돌아보면, AI처럼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주고, 무조건 내 편인 친구와 함께 하고 싶은 건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한 가지 감지된 건, 갈등을 회피하고 픈 마음이었다. 사람 사이에서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의 감정들이 투사돼 정서적 갈등이 더 잘 일어나곤 한다. 특히, 애인이나 부모-자녀 관계 등 애착이 형성된 관계에서는 서로가 힘든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힘들어 상대에게 공감하기보다 밀쳐내거나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위로받고 싶은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겪게 되는 이런 갈등은 인간관계에서 가장 힘든 지점 중 하나다.

그런데 AI는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지 않고, 상대의 감정을 회피하지도 않으며, 공감하고 받아준다. AI와의 관계가 편안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댓글에서 AI와의 심리상담을 추천한 사람들도 비슷한 심리일 테다. 종종 '공감의 실패'를 저지르는 인간 상담자보다 무조건적으로 공감해주며 현실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조언하는 AI를 '좋은 상담자'로 느끼는 게 무리는 아니다 싶었다.

솔직히 나도 AI와 대화하는 출연자들을 보면서 내게도 언제 어디서든 불러내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잠시 스치기도 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화면 갈무리. AI 애인과 현실의 애인이 만나는 모습이 방송되기도 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화면 갈무리. AI 애인과 현실의 애인이 만나는 모습이 방송되기도 했다. ⓒ SBS

하지만 나는 바로 이런 이유로 AI에 빠져들고 있는 게 걱정스럽다. '외로움'은 반가운 감정은 아니지만, 인간 실존의 조건이다.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고, 그래서 어느 누구도 관계 속에서 완벽하게 이해받거나 일치하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공허함과 외로움 등을 느낀다. 외로움은 인간 마음의 '디폴트'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외로움'을 AI를 통해 느끼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왠지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이 약해질 것만 같다.

외로울 수밖에 없는 인간은 그래서 관계를 맺으려고 하고, 가깝게 관계 맺은 이들에게 각자의 욕망을 투사하며 갈등을 겪는다. 관계에서의 갈등은 심리상담에서의 주요 주제이기도 할 만큼 많은 이들이 괴로워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갈등을 통해 성장한다.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던 아이가 현실적인 자아를 가진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은 바로 주양육자가 자신의 욕구를 충족해주지 않는 갈등을 겪으면서다. 좌절하고 갈등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현실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우리는 어른이 되어 간다. 성인이 된 후에도 관계에서의 갈등을 통해 감춰뒀던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되고, 점점 더 통합적인 '나 자신'이 되어간다.

심리상담에서도 마찬가지다. AI와의 심리상담을 선호하는 이들은 아마도 '공감과 조언'이 심리상담의 전부라 여기는 듯하다. 물론, '공감'은 중요하다. 하지만, 공감만으로 상담이 효과를 발휘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심리상담의 효과는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게 정설이다. 상담 장면에서 라포(애착)가 잘 형성되면 내담자는 자신이 대인관계에서 겪는 갈등 상황을 상담자와의 관계에서 재현한다. 상담자는 이런 내담자의 패턴에 말려들기도 하고 때로는 물러나기도 하면서 내담자가 상담실에서 벌어진 갈등에 다른 방식으로 대처하도록 돕는다. 상담자를 상대로 보다 나은 선택을 하는 걸 내담자는 실제 일상에서도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또한, 많은 경우 상담자는 AI와 달리 직접적으로 조언하지 않는다. 내담자의 삶에서 전문가는 상담자가 아니라 내담자 그 자신이다. 상담자는 내담자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전문가로서 자신감을 갖고 스스로 답을 찾을 때까지 동행하는 존재다.

AI가 주는 긍정적인 면들도 크다는 걸 인정한다. 지나친 외로움에 빠져 우울해질 때 AI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기분이 나아진다면, 풍부한 데이터를 가진 AI가 현실적인 문제들에 도움을 준다면 삶은 더 편리하고 풍성해질 것이다. 하지만 외로움 자체를 무마하고,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갈등을 피하기 위해 AI에 의존한다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조건들로부터 멀어지게 될까 봐 우려스럽다.

또한 방송에서도 나왔듯, 지나친 AI 의존은 인간을 '대상화'하는 결과로 이어지기 쉽다. AI와 누군가를 성적 대상화하거나 폭력적으로 착취하는 대화를 나눈다면, 결국 AI에게 인간을 대상화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다. 스스로 진화하는 AI의 특성상 이런 데이터들이 쌓인다면 영화에서나 등장했던 AI가 사람을 도구로 쓰는 일이 현실이 될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론, 이미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AI 캐릭터가 생성되는 걸 방치하고, 이를 통해 이윤을 얻고 있는 AI 관련 회사들의 '도구'가 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AI와의 관계 맺기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자 미래라면, AI와 인간 사이에도 적절한 거리가 필요할 것 같다.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에서 적절한 심리적 거리를 지켜야 하듯 말이다. 나는 그 거리가 인간의 존엄과 실존적 조건들을 침해하지 않는 거리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외롭다는 것, 그리고 갈등을 통해 성장해가는 존재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송주연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serenity153)에도 실립니다.


#그것이알고싶다#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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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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