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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가 자신의 X(구 트위터) 계정에 올린 이미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지난 2월 찍은 정상회담 기념 사진을 챗GPT에게 '지브리 스튜디오 그림체로 바꿔달라'고 요청해 얻은 결과물이다.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가 자신의 X(구 트위터) 계정에 올린 이미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지난 2월 찍은 정상회담 기념 사진을 챗GPT에게 '지브리 스튜디오 그림체로 바꿔달라'고 요청해 얻은 결과물이다. ⓒ 샘울트먼X계정

2025년은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에 묵직한 질문이 떨어진 해다. 생성형 AI가 단 몇 초 만에 사용자 입맛에 맞는 이미지, 각별히 지브리풍 그림을 뚝딱 그려 내놓는다. 이를 해보지 않은 이보다 해본 이가 더 많다고 할 만큼, 지브리 열풍이 거세게 불었다. 남녀노소 성별과 세대를 초월한 유행이 어찌나 거셌는지 챗GPT와 DALL·E 개발사인 오픈AI 최고경영자(CEO) 샘 올트먼이 자제를 요청하는 입장을 발표했을 정도.

업체가 경영상 이유 등으로 명확히 공개하지 않고 있는 전력소모량과 그것이 앞당길 기후위기 등의 부작용이 어느 정도일진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각종 AI모델과 관련 산업계가 전에는 상상조차 못한 정도의 전력을 소비하고 있고, 향후 더욱 많이 소모하게 될 것이란 사실은 분명하다.

이미지 한 장을 위해 최신 스마트폰을 몇 번이고 완충할 수 있는 전력을 사용하는 게 마땅한 일인지, 그 전력을 사용자 개인이 아닌 생산자가 부담토록 해 프롬프트를 입력하는 개인이 문제를 인식할 수 없게끔 하는 현 상황이 윤리적인 일인지, 이 모두를 감당하는 전력생산이 완전히 친환경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현실이 마땅한 일인지를 우리는 전혀 따져보지 않는다.

좋다. 기후위기따위야 남의 일이니 제쳐두기로 하자. 한국은 지난해 말 제29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에서 오늘의 화석상 1위를 차지한 국가가 아닌가. 그러고도 그와 관련한 사회적 논의는 거의 일지 않았었다. 그러니 오늘은 오로지 창작의 영역에서 이야기를 열어보도록 하자. 지브리 열풍의 시대, 애니메이션, 나아가 한국 애니메이션의 설 자리 같은 문제 말이다.

올 2월 한국 애니메이션 <퇴마록>이 개봉해 큰 관심을 모았다. 1990년대 대단한 인기를 누린 이우혁의 동명원작을 영상화한 야심찬 프로젝트다. 국내, 세계, 혼세, 말세, 외전으로 구성된 긴 이야기 가운데 국내편 일부만을 소재로 독립된 애니 한 편을 내놓았다. 향후 같은 세계관 아래 긴 시리즈가 이어질 가능성을 타진한 작품이다. 관객수는 50만 명, 역대 한국 극장판 애니 흥행순위 10위 작품이 67만 명을 조금 넘겼단 점을 고려하면 나쁜 성적은 아닌 것처럼도 보인다.

'퇴마록'조차 못 넘었다... 한국 애니의 위기

퇴마록 공식 굿즈 텀블벅 펀딩에 5371명이 6억 원 가까운 금액을 후원했다.
퇴마록공식 굿즈 텀블벅 펀딩에 5371명이 6억 원 가까운 금액을 후원했다. ⓒ 텀블벅

그러나 많은 이들이 우려를 표하고 있으니 한국 애니가 바로 설 토양에 대한 것이다. 역대 흥행순위 10위 안에 성인을 대상으로, 적어도 어른을 함께 볼 관객으로 고려한 작품은 손에 꼽는다. 대다수가 <뽀로로> 시리즈, <극장판 헬로카봇> 등 아동용 애니메이션이다.

원작 독자를 중심으로 한 확고한 지지층을 가진 <퇴마록>이 개봉 전부터 기대를 모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손익분기는 100만 명대, 현실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극장판 단순 계산으로는 실패다. 그것도 예정된 실패. <퇴마록>이 아닌 순수 창작 애니였다면 더욱 큰 실패를 피할 수 없었으리란 분석이 나온다. 말하자면 한국 창작 애니의 비참한 현실이다.

이대로라면 산업규모만 수십조 원에 이르는 일본으로 양질의 한국 원작이 흘러나가는 상황을 막을 길 없다. 연출과 작화 등 역량을 기를 기회 또한 박탈될 수 있다. 독립 애니가 설 저변은 자연히 척박해질 테다.

흥행에는 실패한 것처럼 보여도 <퇴마록>이 아주 실패한 건 아니다. 오히려 의외의 지점에서 기록을 썼다. 다름 아닌 굿즈 판매다. <퇴마록>이 제작비 수급차원에서 계획한 공식 굿즈 판매량은 목표액 300만 원을 단숨에 뛰어넘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목각인형 등 상품들이 거의 6억 원어치나 팔려나갔다. 관객수 49만 명이란 숫자 아래 잠들어 있는 강력한 지지와 애정, 곧 가능성을 확인케 한다.

관객수로 울고 굿즈 판매로 웃은 <퇴마록>이다. 지브리풍 이미지 생성의 화끈한 인기 또한 어딘지 양가적이다. 사람들은 작품으로서의 애니만이 아니라 소비할 수 있는 상품, 직접 창작하는 애니풍 이미지에도 환호한다. 이는 유사해보이지만 꼭 같지는 않다. 어쩌면 그 뿌리부터가 다를 수 있다. 완전히 그렇지는 않대도 어느 정도는 그러하다.

누군가는 말할 수 있겠다. 이 또한 그림, 작화, 애니메이션을 향유하는 방식이 아니냐고 말이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을 인상 깊게 보고 좋은 감정을 가진 이들이 이미지 생성을 놀이처럼 즐기는 것이 아니겠느냐며. 또한 지브리풍 작화가 AI가 해낼 수 있는 수많은 스타일 가운데서도 각별히 소구력을 갖는 모습에서 긍정적인 요소를 발견하는 이들도 있다. 그 또한 작가가 만들어낸 스타일이며, 누군가는 대중에게 선택을 받고 있단 걸 보여주고 있다고 말이다.

뜨거운 이미지 생성 유행과 한국 애니의 겨울

 한병아 감독의 단편 <우주의 끝> 이미지
한병아 감독의 단편 <우주의 끝> 이미지 ⓒ 한병아

하지만 어디 그뿐일까. 상업적 오용의 가능성부터 작가의 의지를 꺾는 문제, 예술 본연의 가치를 뭉개는 위협까지가 오늘의 유행 안에 산적해 있다. 단편 <우주의 끝>, <쿠키, 커피, 도시락>을 비롯해 다수 광고 및 트레일러 애니 등을 제작해온 한병아 감독 또한 "양가적 감정이 든다"고 말한다.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 회장이기도 한 한병아는 "어떤 애니메이션 장인의 위대한 스타일이 모두에게 이해돼 일반인들이 그것을 기꺼이 자신의 모먼트로 치환해 간직하고 즐길 수 있다는 것에 창작자로서 부러움과 인류애적인 행복감마저 느낀다"면서도 "누군가의 피땀 어린 노력의 산물이 이토록 쉽게 복제되고 유통될 수 있다는 면에서 분명 심각한 저작권 침해와 창작자로서의 위기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한병아는 AI라는 새로운 기술의 등장이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소수 창작자에게는 분명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면서 "콘텐츠를 설계하고 스타일을 구축하고 제작을 담당하는 재능 있고 숙련된 몇 명의 사람들이 과거엔 많은 인원이 필요했던 제작 환경에 비해 저비용 고효율의 작업으로 완성도 있는 작품들을 만들어 내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스스로도 AI를 참고 목적으로 작업에 활용하고 있다는 그는 "AI를 대중적으로 널리 활용하는 상황이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으나 필연적이라는 건 확실하다"며 "창작자로선 기술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려 노력하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한 명의 창작자로서 변화 앞에 영향이 없을 수는 없다. 한병아 감독은 "두려움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두려움이라는 게 다소 막연하다"며 "현재 저작권에 대한 법적·제도적 준비가 기술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 것 같은데, 세부적인 법적 조항들의 국제표준을 확립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법적 표준 없는 현실... 가능성이냐 위기냐

 영화 <이웃집 토토로> 스틸컷
영화 <이웃집 토토로> 스틸컷 ⓒ 스튜디오지브리

법률가들도 새롭게 등장한 기술과 아직 확정되지 않은 쓰임, 가치충돌 등에 대해 논의를 거듭하고 있다. 백경태 변호사(법무법인 신원)는 "현재로선 특정 화가의 화풍이나 그림 그리는 스타일은 저작권법상 보호대상이 아닌 '아이디어'의 영역에 속한다"며 "저작권법은 이러한 아이디어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창작물'을 저작물로 보호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화풍을 따라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저작권 침해가 성립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백 변호사는 이어 "설령 저작권 침해가 된다고 가정을 해보더라도, AI가 그려낸 사진에 대해 누가 저작권 침해를 한 건지 현행 법 체계에서는 정해진 바가 없다"며 "프롬프트를 입력한 이용자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할지, 아니면 직접 작업을 진행한 챗GPT에게 물어야 할지, 이런 부분은 정리가 되지 않은 영역"이라고 답했다.

아직까지 불거지지 않았을 뿐 법적 문제가 발생할 소지는 산적해 있다. 백 변호사는 "챗GPT를 통해 생성한 이미지를 마치 지브리 스튜디오가 제작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오인하게 하면서 이를 영리적으로 활용할 경우에는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상 부정경쟁행위'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다"며 충분히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문제에 사회가 발 빠르게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지브리가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두고서 애니 산업계는 물론, 법조계의 동태가 민감하게 돌아간다. 소송 가능성을 닫아두지 않고 있는 지브리가 피해 상황을 민감하게 수집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월스트리트저널' 'AP통신' '르몽드' 등 해외 유력 언론사들이 그러했듯 AI 운용업체와 협력계약을 맺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떤 방향이든 향후 AI 생태계와 애니 산업계에 미칠 영향이 막대하단 점은 분명해 보인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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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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