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햇살이 물결을 타고 스며드는 곳, 그곳에서 해조류는 거대한 숨결처럼 흔들린다. 바람조차 머물지 않는 깊은 물속, 오직 파도만이 전하는 리듬에 몸을 맡긴 채, 유연하면서도 꺾이지 않는 자세로 바다를 품는다. 단단한 암반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소란스러운 세상의 소식에도 흔들림 없이, 제 자리를 지킨다.
작은 어촌마을 사람들이 바다를 닮은 마음으로 살아가듯, 해조류도 고요한 바다를 껴안으며 자란다. 그 존재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흔들려도 꺾이지 않는 생명의 상징이 된다. 오늘도 햇살과 파도를 벗 삼아, 깊은 물속에서 묵묵히 자라난다.
강원도 동해안, 작은 어촌마을에 터를 잡은 다시마 이야기다.

▲광진리 바닷속에 터를 잡은 다시마2024년 12월30일에 이식한 다시마가 자라는 모습을 촬영하고있는 조사팀(2025/4/28) ⓒ 한국해양환경생태연구소
바다를 살리는 손길, 어촌의 절박한 선택
지난해 12월 30일, 강원도 양양군 광진리 어촌계는 동해안 생태계 복원을 위한 다시마 종묘 심기 작업을 진행했다(관련기사 :
한겨울 다시마 심는 사람들, 바다숲 살아야 어민도 산다 https://omn.kr/2b6re). 잊힌 바다숲을 되살리기 위한 이 작은 시도는 누구에게도 크게 주목 받지 못했지만,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당시 한 어민의 말처럼, "이제라도 바다를 되살리지 않으면 우린 더 이상 고기를 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이 그들을 움직였다.
다시마 숲, 그것은 단순한 해조류가 아니라 수많은 바다생물의 보금자리이자 어민들의 삶터였다.

▲2024년 12월30일 다시마포자를 광진리 앞바다에 넣기위해 작업하고있다 ⓒ 진재중

▲백령도에서 들여온 다시마 포자 ⓒ 진재중
바다 속 숲, 생태계를 품은 다시마
그로부터 5개월여 후인 4월 28일, 강원도 양양군 광진리 앞바다에서 다시마가 1.5m 이상 자라나는 놀라운 성과가 확인됐다. 그동안 갯녹음 현상과 수온 상승, 인간 활동 등으로 해양 생태계가 크게 훼손됐던 이 지역 바다에 희망적인 변화가 감지된 것이다. 성게와 불가사리 등 조식동물의 접근을 막고 '바다시비'를 투입해 생육 환경을 최적화한 결과, 다시마가 건강하게 자생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는 지역 해양 생태계 회복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인천대학교 해양학과 김장균 교수는 "다시마의 성공적인 성장 사례는 양양 광진리 앞바다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진행 중인 바다 숲 복원 사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현장을 둘러본 국립수산과학원 전제천 박사는 "한 어촌계와 뜻있는 분들의 노력으로 이뤄낸 성과는 매우 의미가 크다"라며 "앞으로 지속적인 관리와 노력이 이어진다면, 이 어촌계는 새로운 모델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1.5m이상 자란 다시마(2025/4/28) ⓒ 한국해양생태환경연구소
해양생물의 휴식공간, 다시마
풍성하게 자란 다시마는 다양한 해양 생물에게 먹이와 서식처를 제공하며 생태계 회복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복원된 광진리 앞바다는 전복, 넙치, 가자미 등 다양한 해양 생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며 활기를 되찾는 모습이다.
이번 성과는 오랫동안 갯녹음, 수온 상승, 인간 활동 등으로 어려움을 겪어온 광진리 앞바다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다시마 복원은 바다사막화 극복을 위한 중요한 첫걸음으로 꼽히며 지역 어민들에게도 큰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양양 광진리 박철부 어촌계장은 어획량 감소로 생계를 포기할 뻔했던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올해는 뭔가 다를 것 같다. 해조류가 하나둘 늘어나면서 바다생물들도 많이 찾아오고 있다"라며 "다시마가 우리 광진리 어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라고 반가움을 감추지 않았다.
작업에 참여한 한국해양환경생태연구소 권욱 연구원은 "사라진 다시마 복원은 몇 차례 시도됐지만, 이렇게 성공적으로 이뤄진 것은 처음"이라며 "지난 겨울 바닷속에 다시마 포자를 이식할 때는 두려움과 설렘으로 가득차 있었는데 기대보다 성공적이다"라고 말했다.

▲성게와 불가사리 등 조식동물의 공격을 피하고 무성하게 자란 다시마(2025/4/28) ⓒ 한국해양환경생태연구소
잃어버린 바다의 보물, 다시마의 추억
과거 동해안에서 다시마는 중요한 수산 자원이자 어민들의 '효자 작물'로 불렸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연간 1000톤이 넘는 다시마가 생산됐다. 수확철이면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마을 전체가 함께 작업에 나섰다. 해안 경계를 위해 설치된 철조망은 다시마 건조대로, 해안도로는 다시마를 널어 말리는 공간으로 활용되며 마을 전체가 '다시마'로 물들었다.
관광객들에게는 이색적인 풍경이자 어민들에겐 익숙한 일상이었다. 광진리 한 어촌계원은 "그때는 다시마를 말리는 풍경이 동네 곳곳에 펼쳐졌다. 옛날 그 장면이 많이 그립다"라고 회상했다.
또 다른 마을주민은 "예전에는 백사장이 다시마로 가득 차서 귀찮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아무리 찾아보려 해도 보기 힘든 귀한 존재가 됐다"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다시마 말리는 현장다시마 수확철이면 동해안 바닷가는 다시마로 넘쳐났다 ⓒ 진재중

▲다시마 말리기다시마 수확철이면 해안도로 아스팔트는 다시마로 가득차있었다 ⓒ 진재중
광진리 앞바다, 생명의 터전을 잃다
광진리 앞바다는 한때 해조류가 풍성했으나, 빠르게 '바다사막화'가 진행되었다. 바다사막화는 해양 생명체가 살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어 해조류의 소멸을 초래했고, 그로 인해 어민들의 생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바닷속을 직접 촬영하는 곽철우 박사는 " 광진리 앞바다 뿐만 아니라 동해안 전체에 사막화가 심각하다"라며 "옛날에 그 많은 해조류들은 사라지고 암반은 하얗게 변하고 그 위에 성게와 불가사리만이 다닥다닥 붙어있다"라고 심각성을 말한다.

▲바다사막화, 성게와 불가사리 등 조식동물이 자리를 차지하고있다 ⓒ 진재중
다시마 복원, 탄소재로의 원천이자 어민들의 삶
광진리 해변의 다시마 복원은 단순한 해양생태계 회복을 넘어 지역 공동체 재생의 신호탄이다. 해조류는 바다 속 탄소 흡수원으로서 기후 위기 대응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어민들의 소득 기반 회복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번 복원 프로젝트는 단기적인 수익보다 지속 가능한 어업을 목표로 하는 투자로 평가된다. 광진리 어촌계는 '탄소제로 1호 어촌계'를 목표로 본격적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박철부 광진리 어촌계장은 "다시마 복원을 시작으로 다양한 해조류를 지속적으로 복원해 어민들의 소득을 높이고, 탄소재로 어촌계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어촌에서 다시마를 복원하는 일은 단순히 한 종의 회복을 넘어서, 해양 환경과 바다 자원의 회복에 큰 기여를 한다. 바다의 건강과 어촌 경제, 그리고 지속 가능한 자원 관리의 핵심적인 해결책으로 작용할 수 있다.
강릉원주대 정인학 명예교수(강원 농어촌연구소 이사장)는 "다시마는 모든 식품에 필수적인 요소로, 단순한 해조류 복원이 아니라 바다 생물들의 고향을 만드는 중요한 사업"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작게 시작한 이 프로젝트들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면, 다시마뿐만 아니라 다른 해조류도 복원되고, 바다 생물들이 돌아와 어민들의 소득 증대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원특별자치도 글로벌본부 해양수산국 이동희 국장은 28일 "강원도는 그동안 다시마 복원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으나 뚜렷한 성과를 내기 어려웠다"며 "이번 광진리 어촌계의 다시마 복원 사례는 매우 고무적인 성과"라고 평가했다. 그는 "앞으로 해양수산부와 긴밀히 협력해 복원 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시마와 함께 바다숲을 이룬 해조류 군락지(2025/4/28) ⓒ 한국해양환경생태연구소
탄핵과 조기대선이라는 격동의 시대 한가운데서도, 작은 바닷가 마을에 조용히 뿌리내린 다시마는 우리에게 변함없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바다가 품은 소중한 생명, '검은 비타민' 다시마! 이제 우리는 동해안에서 다시마 숲을 복원하여, 잃어버린 생태계를 되찾고 새로운 미래를 함께 열어가야 한다.

▲광진리 앞바다에서 다시마 생육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바닷속으로 입수하고 있다 ( 2025/4/28) ⓒ 진재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