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헌법을 짓밟은 내란의 무대가 123일 만에 '윤석열 파면'으로 막을 내렸다. 너무도 길고 긴 기다림이었다. 드디어 4월 4일 11시 22분 윤석열의 파면 선고를 들은 시민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환호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123일 동안 우리가 겪었던 혼돈과 불안은 윤석열 단 한 사람 때문에 벌어진 일일까? 이제 윤석열 파면 이후 새로운 세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광장에 뛰쳐나온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헌재의 윤석열 파면 선고가 지연되었던 3월 말 그를 작은 카페에서 만났다.
"세상을 혐오하기는 참으로 쉬운 일이다. 혐오하기보다는 분노하라. 분노하기보다는 연대하고 동참하라."
그의 음성은 나직하고 느리지만, 단호함이 배어 있다.

▲윤석열 탄핵 집회에 참석한 12월 어느날윤석열 탄핵 집회에 참석한 12월 어느날 ⓒ 박보현
훤칠한 키에 쩌렁쩌렁한 목소리 어딘가 괄괄하고 고집이 세 보이지만 어쩐지 장난기가 배어있어 눈길이 가는 사람, 어느덧 백발이 된 서도성(77)씨는 진주 시민사회 운동 판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그는 스무 살 무렵부터 매달 발행되는 <신동아> 잡지를 읽으며 사회를 읽는 눈을 키울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당시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찾아볼 수가 없었어, 지금이야 이 핸드폰 하나면 세상이 다 보이잖아. (웃음) 좋은 세상이야. 당시만 해도 <신동아>가 꽤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편이어서 청년들의 목마름을 많이 풀어줬지."
그는 교단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였지만 마음은 늘 콩밭에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콩밭은 바로 '시민단체'였다. 1980년대 후반 진주 YMCA 시민사업부 활동을 시작으로 <진주신문>, 진주환경운동연합을 거쳐 박근혜 퇴진 진주시민행동, 진주평화기림사업회, 역사진주시민모임, 진주교육사랑방 대표까지 역임하며 지역사회 시민운동에 헌신했다.
최근에는 단체에서 맡은 역할을 모두 내려놓고 '숨터'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며 지낸다고 했다. 그의 '숨터'는 손수 가꾼 텃밭 한구석에 자리 잡은 농막이다. 숨 막히는 세상 유일하게 숨통을 틔워 줄 곳을 그는 자연에서 찾았다고 말했다.
그의 텃밭에는 잡초와 작물이 서로 어울려 자라고 작은 나비와 꿀벌도 수시로 드나든다. '숨터' 한편에서 <녹색평론>을 읽으며 평온함을 누리던 그의 일상이 깨진 건 12.3 윤석열의 뜬금없는 비상계엄이었다.
그는 윤석열 '계엄선포'를 보며 전두환 군부독재의 1980년대와 1960년대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1960년대 출근하려고 길을 나서면 진주시청(현 진주시청소년수련원) 주변에 군인들이 철모를 쓰고 총을 들고 서 있으면 굉장히 살벌했거든, 거기를 매일 사람들이 지나치는 거야. 1980년도에도 집에서 시내로 가기 위해 진주교를 지나는데, 일렬로 끝없이 늘어선 전투 경찰의 모습을 보면서 나라에 뭔가 큰일이 났구나 싶었지."
"당시 언론은 광주에 침투, 무장 폭동을 시도한 남파간첩을 잡기 위해 경찰과 군부대가 나섰다는 왜곡 보도를 발표했고, 시민들은 정말 그렇게 믿었다니까."
그는 한참 후에야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며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 수천 명이 국가권력에 의해 처참하게 죽어간 사실이 너무도 소름 끼친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윤석열의 비상계엄과 포고령 선포를 TV로 보면서 이전처럼 시민들이 군홧발에 짓밟히던 시절로 돌아가는 건가…."라며 "정말 군인들이 나를 잡으로 오는 건 아닌지, 피신을 가야 하는지..." 당시의 트라우마가 떠올라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다행히 시대가 변했어, 시민들이 즉각적으로 윤석열의 반헌법적인 계엄을 생중계로 알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정말 다행이다 싶어. 어쩌면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 후대에 계승한 그 정신이 모여 윤석열의 비상계엄을 저지한 게 아닐까 싶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왜 이렇게 허약한가?'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지난 친일 역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 이승만과 박정희의 군사독재는 전혀 심판받지 못 했지. 박정희는 암살당하면서 독재의 역사가 끝나버렸고 전두환과 노태우도 재판을 받긴 했지만 아주 미약한 수준에 그치고 말았던 것 같아. 특히 전두환은 국민에게 고개 숙여 사과한 일이 단 한 번도 없었어."

▲2016년 3월 대회사를 낭독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진주기림사업회 서도성2016년 3월 대회사를 낭독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진주기림사업회 서도성, 강문순 공동대표. 출처 : 단디뉴스(http://www.dandinews.com) ⓒ 단디뉴스 박보현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사회정의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 했다. 이 때문에 친일파 후손들이 이 세상의 주류가 되고, 이른바 비주류 흔히 사회 운동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주사파', '종북', '빨갱이' 이른바 '레드컴플렉스'가 사회정의를 가로막는 큰 축인 것 같아."
그는 우리나라는 정치 혐오가 강해 정치와 생활이 자꾸 분리되기는 안타깝다며 시민들이 시의원, 국회의원, 대통령을 등 정치 대리인을 뽑는 활동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내가 살아가는 게 전부 정치 영역이다. 대다수 사람은 정치는 정치 전문인 시의원, 국회의원 이런 사람들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정치적 후퇴로 가는 지름길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정당 가입을 꼭 권하고 싶다."
"그래서 진주가 바뀌나?"... 친구들의 '핀잔'
그는 가끔 친구들 모임이나 사적인 모임에서는 정치 이야기는 절대 꺼내지 않는다고 말했다. 60년 넘게 친하게 지내 온 친구라도 '정치'를 주제로 이야기하면 그 어떤 합리적인 대화가 오가지 않아, 그저 친구의 말을 듣고만 있는다고 말했다.
하루는 친구와 식사 모임으로 횟집을 갔는데 대뜸 친구가 하는 말이 "민주노총 때문에 횟값이 올랐다"며 어떤 근거와 이유 없이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말했다.
"내 또래 친구들이 합리적 비판 사고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게 안타깝다, 윤석열 탄핵만 보더라도, 보수진영 진보진영 편가르기식 논쟁 말고, 민주주의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이 기준이 무너진 지 오래다."
집회에 나가거나 어떤 단체 활동을 하면 친구들에게 "그래서 진주가 바뀌나?", "절대 안 바뀐다"는 핀잔을 받는다고 말했다.
"내 생각은 아니올시다. 그저 내 양심에 비추어 나가야 될 것 같으면 나가고, 아니라면 안 간다. 그게 내 멋이고 내 염치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배곯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나는 부모 잘 만나 다행히 삼시세끼 밥 먹고, 직장 다니고 어렵지 않게 세상을 건너올 수 있었다. 그저 운이 좋아 그런 것일 뿐, 지금 생각하면 나의 안위만 생각한 게 아닌지 부끄럽다."
1990년대 <진주신문> 하면서 김장하 선생님 곁에서 뵐 수 있었다. 그는 "누구에게 어떤 것도 강요하지도 않고 자기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김장하 선생 옆에서 많이 배웠고 반성했다.
"정권교체 별로 희망 없다. 그저 거대양당 선수교체일 뿐..."
마지막으로 그는 내란 수괴 윤석열만 끌어내리고 나면 좋은 세상이 저절로 오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우리 모두 박근혜 탄핵을 겪으면서 처절하게 배우지 않았나?"
"한국 정치는 빨간 당에서 파란 당으로 바뀌고 있을 뿐, 우리 삶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 하고 있다. 그저 거대 양당의 선수교체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한국 정치 토양은 너무도 척박하다. 지금 국민의힘이나 일부 목사들이 하는 선동은 법 자체를 무시하고 가짜뉴스를 퍼뜨리고 있잖아. 그들이 외치는 구호 중에 '헌재를 가루를 내라'는 말을 듣고 상식이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을 다시 일으킬 힘은 반드시 국민에게 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숱한 민주항쟁의 역사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흘린 피를 잊어서는 안 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단디뉴스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