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윤여정 ⓒ 연합뉴스
최근 배우 윤여정이 한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큰아들이 게이임을 밝혀 이목이 집중됐다. 더불어 이미 미국 뉴욕에서 동성 결혼식을 올렸다는 소식도 전했다. '커밍아웃'(자신의 성정체성을 상대방에게 스스로 밝히는 일)은 성소수자 당사자들에게도, 그들의 가족에게도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에 대중적인 배우인 그녀의 고백은 사회에 의미 있는 울림을 주기 충분했다.
개인적으로 놀란 점이 있다. 그녀의 큰아들이 2000년 커밍아웃을 했고, 이후 뉴욕에서 동성결혼이 법제화됐을 때 온 가족이 그곳에 가서 결혼식을 열고 축복해 줬다는 사실이었다. 윤여정이 인터뷰에서 "한국은 매우 보수적인 국가다"라고 밝혔듯이, 유명 배우로서 커밍아웃 부담을 무릅쓰고 그렇게 한 것은 가족으로서 당연하면서도 어려운 결정이었을 테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뿐만 아니라, 성소수자로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진심 어린 존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동안 윤여정은 베테랑 배우로서의 연기는 물론이고, 삶의 지혜가 담긴 발언과 당당하면서도 겸손을 잃지 않는 태도로 동시대 사람들에게 귀감이 돼왔다. 그런 그녀의 언행일치가 아들의 커밍아웃과 동성 결혼식 사례를 통해서도 다시 한번 입증된 셈이다.
그녀는 제2의 전성기를 열어준 영화 <미나리>(2020) 이후 젊은 사람들에게까지 인지도를 확장하고 많은 이들의 '롤 모델'로 꼽혀왔다. 이번 일을 계기로 그의 팬들에겐 '윤여정 배우처럼 나이 들고 싶다'라고 말할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됐고, 윤여정은 말 그대로 한국 사회에서 또 하나의 아이콘이 됐다.
윤여정의 용기가 주는 의미
윤여정은 이안 감독의 영화 <결혼 피로연>(1993)을 리메이크한 동명의 작품에서 동성애자인 한국계 남자 주인공의 할머니 역할을 맡았다. 이번 리메이크는 영화 <스파 나잇>(2016)을 연출한 한국계 미국인 감독 앤드류 안이 메가폰을 잡았고, 지난 4월 18일 미국 현지 개봉 후 지금까지 상영 중이다. 앤드류 안 감독은 윤여정이 '아들을 위해 이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고, 이는 영화를 만드는 중요한 동기가 됐다고 자신의 소셜 미디어를 통해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에서 커밍아웃은 큰 용기와 위험 감수를 동시에 요구한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학교나 직장에서 차별받을 수 있고, 사랑하는 친구나 가족과 멀어질 수도 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에서 성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현실이다. 차별금지법은 여전히 국회에서 외면받고 있고, 동성결혼이 허용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윤여정의 소식을 두고 이렇게 떠들썩한 걸 보면 한편으로는 다른 인권 선진국들에서는 정말 '별일 아닌' 커밍아웃을 아직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성소수자의 부모로서 커밍아웃한 윤여정이 반갑고 놀라왔다.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이자 여성으로서, 노인으로서, 동양인으로서 온갖 고정관념을 배우라는 직업으로 당당하게 타파해 온 그녀가 이번엔 '게이 아들의 엄마'로 대중 앞에 섰다는 자체가 새로운 도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커밍아웃으로 고민하는 성소수자들에게 "네가 누구든 너는 내 손자야"라는 영화 속 대사 그 이상의 힘을 전하고 있다. 이렇게 누군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목소리를 낼 때 세상은 분명 좋은 방향으로 변한다는 점 또한 우리는 지금 경험하고 있다.
윤여정의 인터뷰 내용이 국내에 알려진 날, 내가 처음 엄마에게 커밍아웃했던 과거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엄마, 나는 사실 동성애자야'라고 말문을 여는 데까지 성정체성을 깨달은 날로부터 1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그날의 나는 울면서 그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처음에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한참 후에, 조용히 내 눈을 보고 말했다.
"그래도 넌 내 아들이야. 고생이 많았겠구나."
그때는 미처 어렸기에 나의 어려움만 헤아렸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게이 아들을 둔 엄마의 마음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당연한 힘들었을 테다. 성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들이 가장 먼저 부딪히는 어려움 역시 자신의 자녀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가까운 친척과 지인들에게 숨기거나, 또는 커밍아웃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는 일이다.
내가 엄마에게 커밍아웃하던 그때, 만약 우리나라에 커밍아웃한 더 많은 사람들, "성소수자여도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윤여정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나도 엄마도 조금은 상황을 빨리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조금은 덜 외롭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오늘날 그녀의 소식은 성소수자 자녀를 두고 말 못 할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부모들에게도 분명 큰 위로가 됐을 것이다.
커밍아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성소수자와 부모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너에게 가는 길>(2021)의 한 장면 ⓒ (주)엣나인필름
중요한 건 커밍아웃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며, 그 이후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나 역시 가족에게 커밍아웃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어색한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엄마는 나와 혼인신고를 한 배우자를 아직 '사위'라고 부르는 대신 '그 친구'라고 부른다. 서로의 호칭은 아직 어색하지만 가족으로서 좋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안부를 묻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윤여정은 인터뷰에서 특유의 농담 섞인 뉘앙스로 '현재는 (아들보다) 사위를 더 사랑한다'라고 말했다. 큰아들 부부와 화목한 가족을 만들어가는 엄마로서의 모습 역시 존경받을 만하다. 그녀는 2021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에서 '사랑하는 아들아, 이건 엄마가 열심히 일한 결과란다'라고 남다른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을 이제 와 되새겨보면서 서로를 향한 신뢰와 응원이 얼마나 깊은지 가늠해 본다.
커밍아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선 더 많은 커밍아웃이 필요하다.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커밍아웃한다는 건 아주 기쁜 일이고 '당신을 믿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냥,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달라는 의미다. 더 많은 성소수자와 부모들이 배우 윤여정으로부터 작은 용기를 얻어 서로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 자신들의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길 바란다.
무엇보다 앞으로도 성소수자의 삶에 대해 지혜로운 할머니처럼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엄마이자 배우인 윤여정의 모습을 떠올리면, 같은 나라에 살고 있는 한 명의 팬이자 관객으로서, 혹은 누군가의 게이 아들로서도 기대되고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