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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장준하 선생 흉상 제막식 17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통일동산에서 열린 '장준하 공원 제막식 및 제37주기 추도식'에서 부인 김희숙씨와 백기완 선생이 고 장준하 선생 흉상앞에 서 있다.
고 장준하 선생 흉상 제막식17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통일동산에서 열린 '장준하 공원 제막식 및 제37주기 추도식'에서 부인 김희숙씨와 백기완 선생이 고 장준하 선생 흉상앞에 서 있다. ⓒ 권우성

장준하와 김희숙은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사제 사이를 뛰어넘어 연모의 정이 쌓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김희숙의 집안에 변화가 생겼다. 생계의 수단이던 하숙을 못하게 되면서 생활이 더 어려워지고, 김희숙은 배우던 학업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장준하와 김용묵이 일본으로 떠나게 되면서 하숙생을 다시 받지 못하였다. 김희숙의 밑으로 여동생만 두 명이 있는 집에서 신상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받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활이 어려워지고 김희숙은 다니던 학교를 중퇴하게 되었다.

이 즈음에 조선에서는 젊은 여성들을 일본군위안부와 일본에 있는 공장으로 끌어갔다. 징용·징병제가 실시되면서 젊은 여성들도 마구잡이식으로 끌어갔다. 김희숙의 집은 부친의 중국 망명으로 일본군위안부에 끌려갈 공산이 가장 높았다.

장준하는 이와 같은 사정이 담긴 김희숙의 편지를 받고 입대를 결심하였다. 그리고 귀국을 단행하고 결혼을 서둘렀다. 입대하기 전에 결혼을 하는 것이 김희숙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일제는 결혼한 여성까지는 끌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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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장준하는 아직은 귀밑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김희숙과 결혼을 하기로 작심하였다. 그것이 한 조선의 여성을 구하는 길이라고 믿었고,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싹트게 된 사랑의 결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김용묵이 알기에 그동안 장준하를 연모하여 짝사랑을 해오는 여자가 많았다. 일본 아오야마학원(靑山學園) 대학의 신 모양, 정주의 조 모양, 역시 정주의 명문가집 딸 김 모양 등의 얼굴이 김용묵의 망막에 어른거리며 스쳐 지나갔다. 김용묵의 생각에 장준하가 결혼을 한다면 그 세 사람 중에서 하나일 줄 알았지만 하숙집의 로자이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던 일이었다.(김용묵, 앞의 책)

장준하가 조건이 좋은 여성들을 뿌리치고 김희숙을 택한 것은 사제간의 정이나 그녀 아버지에 대한 경외심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터이다.

두 사람의 결혼은 넘어야 할 장애가 널려 있었다. 나이 차이가 너무 많았고 종교가 달랐다. 장준하는 24세, 김희숙은 17세이고, 각각 기독교와 천주교인이었다. 그럼에도 1944년 1월 5일 두 사람은 결혼하고 2주일 뒤 장준하는 일군에 입대한다.

장준하는 일본군의 학병에 지원하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일인들이 가장 주목하고 또 가장 미워하던 목사 가운데 한 분이 나의 아버님이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는 죄목으로 선천 신성중학교 교직에서 축출당한 뒤에도 계속 요시찰 인물로 형사들이 뒤를 따르던 형편이었다. 나는 장남이다.

누구보다 배일사상에 투철했던 장준하는 아버지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하여 학병에 지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준하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청년들, 특히 대학이나 전문대학생들의 경우가 '지원'과 '징집'의 앞 순위에 들었다. 외적을 위하여 총을 들고 나서야 하는, 식민지청년들의 불행하고 참담한 시대였다. 일본에서 듣기에, 중국 어디에 우리 임시정부가 있고 광복군이 창립되었다고 하였다.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실록소설장준하#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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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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