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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한 주말, 평소처럼 아침 샤워를 마치고 헤어드라이기를 들었다. 오른쪽 머리를 모두 말리고, 왼쪽 머리를 말리려는 찰나, 이질적인 감촉이 손끝을 스쳤다. '미끄덩' 하는 감촉. 이거 뭐지? 거울을 보고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500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더 큰 모양으로, 머리카락이 빠져 있었다.
지난 1월, 갑작스레 원형탈모증이 왔다. 하필 회식에서 선배들로부터 "젊어서 좋겠다. 건강하고 체력도 좋고"라는 말을 들었던 바로 다음 날 아침이었다. 새해가 선물한 불청객은 참 냉정했다.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움켜쥐고 검색창에 '원형탈모'를 입력했다.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관련 정보들을 탐독했다.
질병관리청 국가건강정보포털을 보면, 원형탈모는 자가면역질환이다. 면역이란 우리 몸에 바이러스나 세균 등 이물질이 침입했을 때 방어하기 위한 작용이다. 내 몸의 면역계가 머리카락을 이물질로 인식해 공격한다는 것이다.
난데없이 확률 복권에 당첨된 기분

▲탈모 초기2025년 1월, 태어나 처음 원형탈모가 생겼다. ⓒ 이민우
"선배, 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머리카락이 갑자기 없어졌어요."
평소 친하게 지내는 회사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했다. 그는 세종에 전문의가 있고 평판이 좋은 한 피부과를 추천해 줬다. 병원을 추천받고도, 한동안은 검색에 매진했다. 병원에 가는 게 무서웠다.
치료를 받기 위해 맞는 주사 때문이 아니었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워서다. 병원 원무과 직원에게 "원형탈모 때문에 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부끄러웠다. 마치 '실패'나 '결함'이라는 단어를 스스로에게 붙이는 느낌이었다. 탈모는 감기, 몸살 등 다른 질병과는 느낌이 달랐다.
원형탈모의 이유로는 흔히 '스트레스'가 꼽힌다. 그러나 질병청에 따르면, 스트레스를 유일한 원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 전체 환자 중 20~30%가량만이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 이후 탈모를 겪는다. 10~42%는 가족력 등 유전적 요인으로 탈모가 발생하고, 바이러스 감염 등 다양한 환경적 요인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설명이 쓰여 있었다.
"아직 젊은데... 참 비극이네요."
내 환부를 본 의사의 위로가 오히려 가슴을 파고들었다. 마음이 아팠다. 그의 목소리 톤으로 추측건대, 원형탈모로 피부과를 찾는 30대 환자가 많지는 않은 듯했다. 내 경우 또한 구체적 원인은 알기 어렵다고 했다. 통계적으로 전체 인구의 약 1.7% 정도가 일생 중 한 번 이상 원형탈모를 겪는다고 한다. 난데없이 확률 복권에 당첨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꼴찌 상품에.

▲탈모 치료 과정피부과 의사가 원형탈모 환부를 소독하고 있다. ⓒ 이민우
환부에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고 연고를 발랐다. 의사는 "보통 환자분들 90% 이상은 회복하세요. 그런데 완치는 보장할 수 없습니다"라 했다. 의사는 "원형탈모 환자 중 3명 중 1명 이상은 탈모가 또다시 생깁니다"며 "확률로는 40% 정도"라고 설명했다. 평소라면 높지 않다고 생각했을 확률이다. 그러나 1.7% 확률로 원형탈모가 생기자, 재발 확률이 적지는 않아 보였다.
사라진 것은 머리카락뿐만이 아니었다. 자신감, 사회성까지 다 흔들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왼쪽 머리를 손으로 부여잡았고, 집 안에만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친한 친구가 "너는 두상이 예뻐서 괜찮아"라는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웃음 속 감춰진 마음이 복잡했다.
어느덧 4월이 됐다. 주사치료를 받은 지 3개월이 넘었지만, 머리카락은 여전히 없다. 오히려 세력을 키우며 더욱 커졌다. 의사는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거예요. 마음 편하게 가지시고 머리카락이 빨리 나지 않는다고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세요"라고 했다.
그는 "발생한 지 1년 미만인 한두 개의 원형탈모반만 있는 경우에는 80%가 자연회복을 보인다"며 "60%의 환자는 적어도 1년 내에 회복한다"라고 설명했다.
달려오기만 한 삶... 인생 100의 1 정도는 나를 위해 쓰기로 했다

▲커진 원형탈모원형탈모가 세력을 키우고 있다. ⓒ 이민우
30살에 마주한 원형탈모는 그간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오롯이 스트레스가 원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원인을 생각하다가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학교는 성적순으로 자습실 자리를 배치했다. 좋은 대학을 목표로 친구들과 경쟁하는 환경을 조성했다.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토익, 공모전, 자격증 등에 매진하며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학우들과 끊임없이 경쟁했다. 취업 후에는 회사에서 인정받기 위해 오로지 성과 내기에만 전념했다. 문득,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자신을 돌보는 시간이 너무 적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퇴사를 결심했다. 내 상태와 환부를 본 부모님의 말이 결정적 영향을 줬다. 어머니는 "돈은 조금 적게 벌어도 된다. 너무 아등바등 애쓸 필요 없다"라며 "지금은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해보는 건 어떻겠냐"라고 조심스레 말하셨다.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 여러 고민 끝에 평소 꿈꿔왔던 세계여행을 1년 정도 가기로 했다. '100세 시대'라는데, 생각하면 거기서 고작 1년이다. 인생 100 중 1% 정도는 나를 위해 투자하기로 마음먹었다. ODA(개발도상국의 경제사회발전, 복지증진 등을 꾀하는 공적개발원조)를 공부 중이라서 동남아를 비롯해 개발도상국 위주로 다니며, 최대한 현지인처럼 살아보려고 한다.
여행 전 마지막 진료를 받았다. 환부에 바르는 '데옥손겔' 두 통을 처방받았다(한 번에 최대 처방 가능한 양이라고 한다). 의사는 "주사보다 효과는 좀 덜하지만 효과가 있으니, 처방해 드린 치료제 꼭 챙겨 바르세요"라고 했다. "원형탈모는 치료되면서 흰머리부터 나니까 너무 놀라진 마세요. 두 통 다 쓰기 전 회복되셨으면 합니다"라고도 덧붙이면서.
물론 준비한 돈이 많지는 않다. 학업 욕심을 부려 아직 갚아야 할 학자금 대출이 산더미다. 퇴직금으로 카드 빚과 남은 대출을 일부 정리했다. 자동차와 취미인 배드민턴 장비 등을 팔아 여행 경비를 마련했다. 남은 돈으로 '최저가 세계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잃었지만, 세계를 얻어보기로 한다. 23일 떠나는 인도네시아행 비행기를 편도로 예매했다.

▲세계여행 준비물.말라리아 예방약, 국제운전면허증 등 세계여행 준비물. ⓒ 이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