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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군 출신으로 『사상계』를 창간한 장준하
광복군 출신으로 『사상계』를 창간한 장준하 ⓒ 장준하기념사업회

'실록소설 신채호'에 이어 두 번째로 장준하 선생을 뽑았습니다.

두 분은 생몰 연대와 활동무대 그리고 추구하는 가치에 차이가 있습니다. 신채호는 1880년 충남 대덕군에서 태어나고, 장준하는 1918년 평안북도 삭주군에서 출생했어요. 30년의 시차가 있습니다. 한말과 일제강점기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투쟁의 대상이 일제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신채호는 민족언론인·계몽사상가·해외 망명과 역사저술·항일투쟁·아나키즘 수용과 투옥·옥사, 장준하는 학병으로 간 일본군 탈출·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한국광복군 활동·귀국 후 김구 비서·월간 <사상계> 발행·반독재 투쟁·국회의원·재야 민주화운동·의문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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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이 닮은 지점은 국권을 침탈한 일제타도와 자주독립을 목표로 삼았고, 대쪽같이 바른 심성,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는 강직성이었습니다. 말과 행동에서 사특함이 없었고, 고정된 관념에 매몰되지 않았고, 행동하였어요. 신채호가 살았던 시대에 장준하가, 장준하의 시대에 신채호가 살았데도 두 분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 분은 우연도 겹칩니다. 57세에 눈을 감았어요. 신채호는 여순 감옥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8년의 옥고를 치르던 중 의문의 뇌일혈로 숨을 거두었고, 장준하는 대통령 긴급조치의 폭압에 저항하며 어느 날 등산길에 나섰다가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 계곡에서 의문사를 당했습니다.

신채호의 죽음(죽임)은 일제강점기 해외의 감옥에서 벌어져 정확한 사인을 밝힐 수 없었습니다. <조선의열단선언> 등 '강도일본'을 매섭게 질타하고 국제아나키스트들과 연대하여 독립운동의 국제화를 시도하려한, 출옥 후의 활동을 두려워한 일제의 소행이었을 것입니다.

박정희 유신체제에서 장준하의 활동은 대단했습니다. '재야 대통령'으로 불리며 유신체제를 강타했어요. 박정희는 그의 존재가 두려웠습니다. 그의 정적이 정계에서는 김대중이지만 재야에는 장준하였습니다. "밀수대통령",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지만 박정희 만은 절대 안 된다"는 등 강펀치를 수시로 날렸지요. 자신이 일본군 장교 출신인데 비해 장준하가 광복군 출신이라는 콤플렉스 때문에 그에 대한 증오심과 적대감은 대단했습니다.

올해는 독립운동가 출신 민주투사 장준하 선생이 의문사 당한 지 50년입니다. 반세기가 되는 오늘까지 그의 사인이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광복 80주년이 되도록 광복군 출신의 죽음과 죽임을 밝히지 못 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일본군을 탈출하여 임시정부를 찾아 6천리 행군 중 서주의 중국군수비대에 갇혔을 때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를 가슴 깊이 새겼습니다. 그리고 평생의 화두로 삼았습니다.

조국애를 몰라서 조국을 귀하게 여기지 못했고, 조국을 귀중하게 여기지 못하여 우리의 선조들은 조국을 팔았던가. 우리는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련다. 나는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이 가슴의 피눈물을 삼키며 투쟁하련다. 이 길을 위해 나는 가련다. 나의 일생의 과정을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이정표의 푯말을 꽂고 이제부터 나를 안내할 것이다. 하나님이 날 기어이 그 길로 인도해주실 것이다.

장준하의 고난에 찬 생애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에 압축됩니다.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이 되고, 해방정국에서 김구의 비서를 지내고 정론지 <사상계>를 발행하고, 이 길이 봉쇄되자 직접 반독재 민주화의 행동에 나섰지요.

저는 장준하 선생이 의문사를 당하자 지인들과 약사봉 현장을 몇 차례 탐사하고, 함석헌 선생이 내는 <씨알의 소리>(1975년 11월호)에 '약사봉 계곡의 진혼곡'을 기고했다가 정보기관에 잡혀가 혼쭐이 나고, 의문의 죽임과 관련 <민족주의자의 죽음>(1993년 학민사) 그리고 <장준하 평전>(2009년 시대의 창)을 쓴 바 있습니다.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지 반세기가 되는 오늘 세월의 풍상과 함께 고인의 고귀한 삶은 잊혀지고 의문사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습니다. '내란수괴 윤석열 일당의 친위쿠데타와 그 잔불을 지켜보면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의 신념이 우리의 소중한 가치관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실록소설' 형식을 빌어 선생의 생애를 다시 소환키로 했습니다. 팩트와 픽션의 경계를 융합하는 형식이지만 기본은 팩트에 더 많이 주어짐은 분명히 합니다.

"사실적 뼈에 아름다운 살을 붙여야 한다"(문일평, '조선심')는 정신을 따르고자 합니다.

선생께서는 <사상계> 1959년 3월호 '권두언'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또 다시 3.1절을 맞으며"에서 거듭 이 명제를 다짐합니다. 이승만 독재가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현실에서 우리로 가장 애국하게 하는 길이겠는가. 두 말 할 것도 없이 민족정기를 세우고 흐트러진 사회기준을 바로 잡는데 거족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다. 여기에서 가장 먼저 요청되는 것은 개척정신이요, 과학적 방법이다. 먼저 나서고 과학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연후라야 우리가 바라는 이념의 태동을 볼 수 있고 나라살림의 올바른 실제도 기대할 수 있으며 참다운 재건과 부흥도 이루어 질 것이다.

우리 또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은 만천하 동지들 앞에 호소하는 바이다.

'실록소설'을 쓰면서 선생의 삶과 죽음(죽임)의 과정은 한 편의 장편소설과 같다는 생각입니다. 이보다 더 '흥미진진'하고 파란곡절의 스토리도 흔치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반백년을 돌이키면서 선생이 가끔 불렀다는 유행가 한 가락을 읇조리며 먼 길을 함께 걷고자 합니다.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쉬네
추억에 목 메인 애달픈 하소
그리운 내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실록소설장준하#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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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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