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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딸안경 자랑하는 딸아이와 그 얘길 열심히 듣는 아빠의 모습을 Chatgpt로 생성해 봤어요 ⓒ chatgpt로 생성한 이미지
"아빠, 아빠. 새로 한 안경 어때? 나 공부 좀 하는 학생 같지 않아? 이 안경 쓰고 지능이 좀 올라가 보이는 것 같아요"
얼마 전 시력이 나빠진 딸아이가 안경을 새로 했다. 뭐 본인 피셜로는 수학 좀 잘하게 보인다나 뭐라나. 하지만 상승상태의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잠깐 거울을 보더니 안경 쓴 자신의 모습을 보고 금세 불만을 터트린다.
"안경이 볼에 닿아. 도대체 내 볼살은 언제 빠지는 거야."
툴툴 끝이 없다. 몸만 보면 40킬로인데 얼굴만 보면 80킬로란다. 친구들조차 얼굴은 아직 초등학생이라고 놀린다고 불만을 뱉어냈다. 상승상태의 기분이 채 2분이 가지 못했다.
며칠 전에는 선생님까지 딸아이 통통한 얼굴을 놀렸단다.
'지수야, 어젯밤에 라면 먹고 잤니?'
선생님도 참 왜 그러셨는지. 한참 외모 때문에 말 많고, 탈 많은 딸인데 눈치 없이 디스를 하시다니. 조금은 원망스러운 생각이 머릴 스쳤다. 하지만 금세 아이 불만에 피식 웃음이 났다. 물론 딸아이가 들으면 언짢을 수도 있으니 마음속으로 웃고 말았다.
내 학창 시절도 딸아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생님은 중학교 1학년 첫 시간 이후로 나와 마주칠 때면 종종 내 볼을 댕기셨다. 귀엽다고 하는 스승의 행동이었지만 무릇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던 내겐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그렇게 2년을 시달렸고, 3학년이 되어서야 선생님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시간이 많이 지났다. 옛날이야기만큼이나 꽤 세월이 지난 이야기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 시절 기억이 떠오른다. 내 아이들을 키우며 그 시절의 나를 보는 경우도 많다. 학교에서 어떤 일이 있었다느니, 학교에서 선생님이 자신들에게 어떤 얘길 해줬는데 너무 웃겼다느니 등등.
아이들이 교복 입고 등교하는 모습만 봐도 그 시절 그렇게 입기 싫어했던 교복이 지금은 그립다. 왜 그리도 싫어했는지. 그 시절의 나는 지금의 나를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세월은 우리 아이들을 통해 다시 한번 나를 꺼내 놓는다. 시간이 흘러도 어떤 감정들은 변하지 않는 듯싶다. 우리 아이들의 웃음 속에서, 나는 오래전 내 웃음을 다시 만날 때가 있어서 좋다.
딸아이 볼이야 어쩌겠는가. 그 옛날부터 집안 내력인 걸. 아내나 나나 20, 30대까지도 한 볼살 했었다. 그 통통한 볼살 덕에 얼굴이 동글동글해서 그랬는지 동안이라는 얘길 달고 살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사라지는 것들은 참 많더라. 볼살도 그중 하나였다. 그리 통통했던 녀석이 사라지니 금세 늙어 보인다는 얘길 듣는다. 정말 '아, 옛날이야'다. 딸, 있을 때 잘해라. 없어지고선 다시 생기는 게 얼마나 힘든데.
데자뷔는 프랑스어로 "deja vu"는 "이미 보았다"는 뜻이다. 우린 이미 경험했던 일을 다시 겪으면 데자뷔를 얘기한다. 일반적으로 데자뷔는 뇌의 착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부모, 자식 간에 일어나는 데자뷔와 유사한 현상은 단순한 뇌의 실수가 아니라,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조용히 이어지는 시간의 대화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과거의 나와 현재의 너, 그리고 언젠가의 또 다른 누군가가 시간이라는 거울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또 하나의 데자뷔를 조용히 품는다. 그건 단순한 기억의 착각이 아니라, 사랑의 반복이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개인 브런치(일부)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