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이를테면 내포의 서쪽 끝자락 땅과 앞바다다. 수심가지(水深可知), 인심난지(人心難知))라는 말(물의 깊이는 알 수 있으나 사람의 마음은 알기 어렵다는 뜻)이 이곳에선 정반대로 되는 그런 곳이다. 바람은 물론이요, 드러나지 않은 암초와 수시로 뒤섞이는 물길은 항해에 숙달된 뱃사람마저 속수무책이다. 물속은 알 수가 없고, 이 바다를 맞닥뜨린 뱃사람들 염원은 단 하나, 무사 항해를 빌 뿐이니 저 말이 뒤바뀔 수밖에.
침몰이라는 재앙이, 수백 년 후 보물로 재탄생하는 아이러니도 연출한다. 한 척도 아니고 무려 5척이 인양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태안선과 마도1∼4호선까지 시차를 두고 발견된 배들이 그 주역이다. 엄청난 양의 유물이 건져 올려졌다.

▲안흥진성안흥진성 북쪽 북문과 태국사 쪽에서 바라 본 안흥진성. 너머로 신진도 항이 보인다. ⓒ 국립해양유산연구소
하지만 이 배들은 단순한 보물선이 아니다. 고려인의 삶과 당시 권력의 이면을 가감 없이 보여준 시대의 거울이었다. 무신정권 실세에게 진상되는 품목은 물론 뱃사람들 여가 도구인 장기까지 건져 올려졌다. 국보급 청자에 참기름과 꿀을 담았으니, 그 사치스러움이란.
이 배들을 통해 강력한 중앙집권제는 물론 귀족이 어떤 물품들을 착취했는지 유추해 볼 수 있다. 침몰한 배들은 전라, 경상, 충청도에서 개경 앞바다 벽란도에 있는 경창(京倉)을 향했을 터다. 아직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펄에 묻혀 있는 배는 또 얼마일까? 세곡선은 유독 왜 여기서 침몰했을까?
복잡한 해안선이 물길을 수시로 뒤섞어 놓는다. 8~9m에 이르는 조수간만 차는 능숙한 뱃사람마저 당황케 한다. 걸핏하면 바뀌는 바람이 결코 순풍일 리 없다. 이런 요인들이, 평저선으로 연안을 따라 운항할 수밖에 없는 당시 항해술을 끊임없이 괴롭혔을 터이다.

▲안흥진성(1872년_지방지도_부분)복잡한 해안선과 안흥진성. 산과 능선을 이어 쌓은 성벽과 성안의 시설이 자세하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뱃사람이 물과 바람을 거스르며 항행했을까? 기다리면서 때를 맞췄음은 불문가지다. 그럼에도 연례 행사처럼 조운선이 좌초되었으니, 뱃사람에게 이 바다는 얼마나 심한 스트레스였을까. 오죽하면 '다니기 어려운 바닷길'이란 난행량(難行梁)을 '안전하게 다닐 수 있기를' 소망하는 안흥량(安興梁)으로 바꿔 불렀을까?
굴포(掘浦) 운하

▲굴포운하553년 간 5차례에 걸쳐 판 굴포 운하. 일부는 농토가 되었으나, 곳곳에 물이 흐른 흔적이 역력하다. ⓒ 이영천
공교롭게 태안과 서산의 경계가 굴포다. 하천인 듯 아닌 듯 모호한 지형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고려에서 조선 중기까지 물을 끌어들이려 파낸 흔적이다. 이 모든 게 안흥량 때문이다. 안흥량은 죽음의 바다였고, 배고픈 바다였다. 삼남에서 개경과 한양으로 실어 나르던 세곡선의 무덤이었다. 배가 침몰하면 태안 백성에게 물에 빠진 곡식을 건져 먹고, 2년 후 갚으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그랬으니 백성들 등골이 얼마나 휘었겠는가.
배는 매년 침몰했다. 적게는 수 척, 많게는 수십 척이었다. 조선에 한정하여 굵직한 난파 기록만 보자. 1395년 5월 경상도 조운선 16척 침몰한다. 1403년 5월에 34척의 경상도 조운선이, 연이어 6월에 30여 척 경상도 조운선이 침몰한다. 6월의 침몰에 1천여 명이 목숨을 잃고 세곡 1만 석이 바다에 가라앉는다.
이 출항을 명령한 이방원이 뱃사람의 희생을 애도하며 탄식했다고 실록은 기록한다. 1414년 8월에 전라도 조운선 66척이 침몰하여 2백여 명이 죽고 세곡 5,800석이 가라앉는다. 1455년 9월에 전라도 조운선 54척이 침몰한다. 임진왜란 때 발달한 항해술 덕분인지, 1600년 이후 침몰한 기록이 실록에서 사라진다.

▲무량수각(부분)신진도 폐가의 벽에서 발견된 안흥진 지휘소 문건 중 '구롱'이란 글자가 써진 종이. ⓒ 국립해양유산연구소
안흥량이 삼킨 세곡과 안타까운 목숨이 얼마던가. 2020년 신진도의 한 폐가 벽지에서 안흥량 지휘소 문건 여럿이 발견된다. 그중 '구롱(口弄)'이란 글이 이목을 끈다. "영생을 바란다"는 글 중간에 "농담이겠지"를 장난처럼 써 놓은 것이다. 안흥량을 지나며 영생을 바라는 게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군관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고려와 조선 553년간 안흥량을 피하려 5차례나 운하를 파냈으나 모두 실패한다. 하천과 갯골은 순조로웠으나, 언덕에서 만난 단단한 화강암을 뚫지 못한다. 또한 가로림만과 천수만은 조류도 달랐고, 조수 간만의 차와 해수면 높이차로 파낸 운하가 무너져 되메우기 일쑤였다.

▲굴포운하(근경)마른 봄날인데도 파인 운하에 물이 흥건하다. 이곳이 운하의 최정점 인근이다. ⓒ 이영천
고려는 수면이 일치하는 평형 운하를 시도했다. 이방원 때 하륜이 저수지 형식의 갑문을 고안하지만, 막대한 노동력 낭비로 실효성이 없어 폐기한다. 뚫지 못한 구간을 우마차로 수송하는 방법도 시도하나, 이 역시 효율성이 떨어져 폐기되고 만다. 큰 세곡선 한 척에 수백 석을 실었다니, 얼마의 우마차를 동원해야 할지 짐작해 보면 명쾌해진다.
왜구의 침탈
고려 시대엔 송나라와 교역하던 국제항이었다. 이때 세워진 안흥정의 위치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분분한 모양이다. 손바닥 모양의 태안반도는 국제항구로서 위상은 물론 풍부한 해산물로 일찍이 방어의 필요성이 넘쳐나던 곳이다. 안흥진보다는 소근진(所斤鎭)을 개척, 해안방어기지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안흥량이 문제였다. 삼남에서 거둬들인 세수의 10%~30%를 매년 물에 빠뜨렸으니, 얼마나 근심이 컸겠는가? 항해술을 연구하기도 했겠으나 날씨와 바람, 물길이 잦아들 때까지 세곡선이 안전한 바다에서 기다리는 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성안 마을지금도 수십 호 민가가 성안에 거주 중이다. 옅은 안개에 멀리 구멍 같은 북문과 성벽이 보인다. ⓒ 이영천
이게 왜구의 표적이 되었음은 또한 자명한 사실이다. 실록도 기록한다. 대표 사례가 세종 1년이다. 황해도와 충청도 비인현에 이어 안흥량 세곡선도 약탈당한다. 1419년 6월 대마도 정벌에 나선 계기였다.
대마도 정벌 와중인 7월 4일(음), 안흥량의 세곡선 9척이 또 노략질당한다. 대마도 정벌이 길어진다. 6월 29일 승전보를 띄웠던 이종무의 발목을 붙잡는다. 이어진 전쟁에서 아군 180여 명이 목숨을 잃고, 경상우수영에 정박 중이던 토벌군 배가 파손되기도 한다.

▲안흥진성 남문신진도가 보이는 남문 밖 성벽. 멀리는 군사시설보호구역이다. ⓒ 이영천
이때까지는 소근진 방어에 의지하며, 김종서가 고안한 봉화로 왜구에 대비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은 전혀 다른 계기였다. 전라·충청도 바다가 이순신으로 인해 안전했기에, 전란 중 세곡 운반은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였다. 안흥진 구축의 필요성이다. 임진왜란 와중에 군사를 주둔시켜 바다와 뱃길 보호에 나선다.
안흥진성
1595년 만호진이 된다. 자급자족하는 군사 방어의 원칙을 적용, 땅을 내어 군둔전을 일구게 한다. 전쟁 와중의 고육지책이, 나중 안흥진성의 경제 및 군사의 기반으로 굳어진다. 한때 성안에 300호가 살게 된 배경이다.
정유재란이 발발한 1597년 유성룡 건의로 안흥량과 거제 견내량을 해상 방어 요새로 지정, 국가 차원의 방어기능을 부여한다. 1609년에 종3품 첨사가 관장하는 진으로 승격되고, 1779년에 이르러 정3품 수사가 지휘하는 행영(行營)이 설치되는 등 세곡을 안전하게 운반해야 하는 안흥량의 중요성만큼이나 진성의 위상도 같이 높아져 간다.

▲서문 각자석서문 밖 성벽에 성곽을 쌓은 년대가 분명하게 써진 성 돌. ⓒ 국립해양유산연구소
그렇다면 성곽은 언제 쌓았을까? <대동지지>는 1655년이라 기록하나, 서문 밖 성 돌엔 '만력 11년에 쌓았다'고 새겨져 있다. 이로써 1583년에 쌓았다는 증거로 삼는다. 1655년엔 고쳐 쌓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도 주민이 거주하는 둘레 1,714m, 높이 3~4m의 석성이다. 다만, 군사시설보호구역에 속한 성곽은 곳곳이 허물어져 방치되고 있다.

▲북문과 성벽태국사 쪽 굽은 성벽에서 바라 본 북문과 성벽. ⓒ 이영천
바다엔 거북선과 판옥선을 두어, 군사는 물론 조운선 보호와 항행 안전을 지원했다. 효종은 1665년 위급 시 피난처인 강화도 보좌 목적으로, 안흥성 바깥 작은 섬에 새로운 진을 연다. 작금 태안의 주요 항만인 신진도의 탄생이다. 지금은 나루 津(진)을 쓰지만, 당시엔 새로운 진영의 鎭(진)이었다. 안흥진은 당연히 구진(舊鎭)이 되었다.
1872년 지방지도에 안흥진과 소근진이 뚜렷하다. 이웃한 해미 병영성과의 거리 등을 고려하면, 태안의 행정기능과 안흥진의 해안방어기능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서문 수홍루안흥진성 정문 역할을 하는 서문. 바닷가의 옅게 낀 안개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든다. ⓒ 이영천
심청이 빠진 인당수, 진도 울돌목, 강화 손돌목과 더불어 물살 사납기로 유명한 4대 수역의 하나다. '쌀 썩은 여' 때문에 판목이 파여 안면이 섬이 되었듯, 안흥량으로 태안이 섬이 될 뻔한 역사가 553년이다.
이제 더는 무서운 바다가 아니다. 난행량 아닌 안흥량이다. 오랫동안 섬과 섬 사이, 뭍과 섬 사이도 메워져 복잡한 해안선이 단조로워졌다. 손바닥 모양 태안반도도 섬이 될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전 필요에 따라 파냈던 운하를, 다시 뚫자는 어리석은 주장이 반복되지 않기만을 유순해진 안흥량도 바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