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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쌀을 구입한다고? 일본 정부가 치솟는 쌀값을 잡기 위해 비축미 방출 등을 추진했음에도 쌀 소매가가 더 오르는 가운데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 관광객들이 대형마트에서 쌀을 사 가고 있다는 일본 언론 보도가 나오고 있다. 사진은 16일 서울 한 대형마트 쌀 판매대 모습.
한국에서 쌀을 구입한다고?일본 정부가 치솟는 쌀값을 잡기 위해 비축미 방출 등을 추진했음에도 쌀 소매가가 더 오르는 가운데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 관광객들이 대형마트에서 쌀을 사 가고 있다는 일본 언론 보도가 나오고 있다. 사진은 16일 서울 한 대형마트 쌀 판매대 모습. ⓒ 연합뉴스

면과 빵 메뉴가 늘었다. 동경 공립 초등학교에 재학 중인 아이 급식 이야기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밀가루가 주식인 날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였다. 그러나 올 들어 밀가루 메뉴가 일주일에 두 번으로 늘었다. 이 같은 변화의 원인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지난해 여름부터 고공 행진을 멈추지 않는 쌀 값 때문이다.

지난해 봄까지만 해도 일본 각지의 슈퍼에서 쌀 5kg는 2500엔 정도에 거래됐다. 그러나 여름부터 쌀 값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14개월 동안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올해 4월 현재 쌀 5kg의 평균 가격은 4200엔(한화 4만2500원)으로 지난해에 비해 두 배 가까이 상승했다.

급식까지 바꿔놓은 일본 쌀 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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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올해로 16년째 일본에서 살고 있는데, 쌀 5kg가 4000엔을 넘은 것은 처음 경험한다. 덕분에 쌀 밥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 가족의 한 달 식대가 눈에 띄게 늘었다. 갑자기 두 배 가까운 가격으로 쌀을 사려니 아까운 마음도 두 배다. 오죽하면 요즘 내가 가장 부러운 사람이 농사짓는 친인척들이 쌀을 보내준다는 지인들일 정도다.

타격을 입은 것은 나 같은 소비자들만이 아니다.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랑받던 도시락 가게가 문을 닫고, 고학생들의 배를 채워주던 학교 앞 식당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가격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엔저 현상과 물가 상승에 더불어 쌀 값까지 오르니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존폐의 위기에 놓인 자영업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일본 초등학교 급식의 일례. 올 들어 밀가루 메뉴가 늘어났다.
일본 초등학교 급식의 일례. 올 들어 밀가루 메뉴가 늘어났다. ⓒ 세타가야구청 홈페이지

일본인들의 주식인 쌀 값이 왜 이럴까? 전문가들은 복수의 원인을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이상 기온의 영향이다. 일본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여름의 평균 기온은 평년보다 1.76도 높았다고 한다.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래 가장 더운 여름이었다. 이 같은 극심한 더위 때문에 쌀 품질이 떨어져 소비자들에게 내놓을 만한 쌀 양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쌀 수요가 급격히 늘어서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쌀이 주식이었다. 다만 근래에는 빵이나 면 요리 등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며 쌀 소비가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전쟁과 물가 상승으로 외국산 곡물의 가격이 급등했고, 엔저 현상으로 물가가 올랐다. 이에 상대적으로 가격이 안정적인 쌀로 소비자들이 몰려 가격이 폭등하는 결과를 낳았다.

사재기 심리도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항간에 "쌀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말이 돌면서 쌀을 대량으로 구입해 보관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실제로 일본 전체의 쌀 생산량은 예년과 차이가 없는데 비해 지난해 시장에 공급된 양은 80%에 그쳤다는 통계 결과가 있다. 이와 관련 예년과 다른 업자들이 쌀의 대량 유통에 관여됐다는 추측이 돌기도 했다.

일본 정부 비축미 풀었지만

일본 미디어들은 쌀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를 '레이와(현재 일본의 연호) 쌀 대란'이라 부르며 정부 차원의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 농림 수산성은 기자회견을 통해 3월부터 21만 톤의 비축미를 방출하겠다고 밝혔다. 정부의 '비축미'는 통상 국가가 재난을 당했을 때 방출하는 쌀이다. 쌀을 둘러싼 일본의 현 사태의 심각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농림수산성 관계자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비축미 방출이 전체 쌀 가격에 반영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5월 중순쯤에는 3000엔 정도의 가격대로 안정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했다. 그러나 낙관하기에는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지난 3월부터 미국산 비축미가 시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며칠 전 우리 부부가 들른 집 근처 슈퍼에도 '비축미 혼합 쌀'이 놓여있었다. 가격은 다른 쌀에 비해 500엔 정도 싼 3600엔(한화 3만6400원) 정도였다. 그러나 '한 가정 당 한 포대'라고 적힌 4000엔대의 쌀은 거의 다 소진된 반면 비축미는 가득 쌓여 있었다.

 일본 정부가 방출 예정인 비축미
일본 정부가 방출 예정인 비축미 ⓒ TBS 뉴스 화면 캡쳐

일본인인 남편은 "일본인들은 수입산 쌀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미국산 쌀은 맛도 식감도 다르니 돈을 조금 더 주더라도 국산 쌀로 사자"고 말했다. 쌀 코너에 덩그러니 쌓여있는 비축미는 수입산 쌀에 대한 일본 소비자들의 정서가 반영된 결과처럼 보였다.

그나마 소비자들이 슈퍼에서 비축미를 봤다면 상황이 나은 편이다. 대부분의 비축미는 이미 대형 체인점들이 물량을 독점적으로 확보했기 때문이다. 소규모 상점이나 개인 정미소 업자들은 여전히 비싼 가격에 쌀을 팔 수밖에 없다. 지방에 있거나 충분한 상권이 형성되지 않은 곳에 사는 소비자들이 "비축미가 나오기는 했나?"라고 의아해 하는 이유다.

일본 내에서는 '레이와 쌀 대란'을 교훈 삼아 농업 정책 전체의 구조 조정이 필요하다는 반성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일본의 식량 자급률(2023년도)은 칼로리 기준 38%로 주요 선진국 중 최하위 수준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농업 관계자들의 고령화가 진행되며 쌀 전체 생산이 감소하고 있는 것 또한 심각한 과제다.

이런 상황에서 쌀 값이 안정되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외국산 쌀을 수입하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외식 업체와 가공식품 업체들이 비용 절감을 위해 수입쌀을 선택하고 있다. 현재 일본의 민간 업자가 쌀을 수입하는 경우 높은 관세가 부과된다. 그러나 관세를 지불해도 수입 쌀을 사는 것이 더 싼 경우가 생겨나고 있다.

일본 정부는 현재 매년 무관세로 77만 t 정도의 쌀을 수입하고 있다. 이 중 미국산 쌀이 차지하는 비중은 45%에 달한다. 일본 정부는 미국산 쌀을 수입해 일본산 쌀 가격을 안정시키려는 구상인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까지 일본은 쌀 값 유지와 농가 보호를 위해 사료나 가공 식품 외의 주식용 쌀의 수입양을 10톤으로 제한해 왔다. 하지만 니혼케이자이신문은 "일본 정부가 주식 용으로 쓸 미국 산 쌀 수입을 늘리는 카드를 검토하고 있다"라고 전하며 농가들의 반발이 예상된다고 우려의 목소리를 전했다.

한국 가는데 쌀 사올까

 한국 쌀을 사오는 일본인 관광객들을 다룬 일본 뉴스 화면. 일본의 1/3 가격에 구입 가능하다고 적혀있다.
한국 쌀을 사오는 일본인 관광객들을 다룬 일본 뉴스 화면. 일본의 1/3 가격에 구입 가능하다고 적혀있다. ⓒ ANN 뉴스 캡쳐

일본의 쌀 소동은 한국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미 일부 한국 언론들이 보도한 것처럼 한국을 찾은 일본 관광객들이 쌀을 사서 돌아오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이런 경우가 한두 사람에 그치지 않은 탓인지, 일본 언론들도 이 같은 자국민들의 모습을 보도하기도 했다.

나 역시 5월에 한국 친정을 방문할 예정인데, 수화물에 여유가 있다면 쌀을 사 와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 중이다. 이대로라면 쌀 가격이 당분간 떨어질 일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쌀 가격이라면 10kg의 경우 5000엔(한화 5만600원) 이상 싸게 구입이 가능하니 여러 불편함을 고려하더라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인 셈이다.

나 같은 개인 소비자만이 아니라 일본 정부 혹은 민간 차원에서 한국산 쌀을 수입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일본의 공영 방송인 NHK는 지난 21일 뉴스에서 "한국에서 쌀을 수입하려는 움직임이 증가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일본에 있는 한국 농협 관련 회사가 지난달 한국에서 2톤의 쌀을 수입했고 다음 달에는 20톤을 추가로 수입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이처럼 한국쌀이 일본에 유입되는 것은 관련 업체가 1990년 통계를 내기 시작한 이래 최대치가 될 전망이라고 한다.

'레이와 쌀 대란'이 언제까지 지속되고 어떻게 마무리될지, 한국이 이를 반면교사 삼아 대비해야 할 일은 무엇일지, 쌀을 둘러싼 일본의 움직임을 주목해 볼 일이다.

#레이와쌀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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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두껍게 할 글쓰기를 꿈꿉니다. Matthew 22: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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