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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즐기는 인문학적 붓장난’을 연재하는 까닭은 자연과 인간, 삶과 사유를 잇는 다리로서 글을 쓰고 싶기 때문입니다. 산을 오르며 만나는 풍경과 들꽃, 그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인문학적 질문과 깨달음을 붓글씨와 함께 풀어내며, 독자와 함께 마음의 결을 가다듬고자 합니다. 잠시 멈추어 자신을 돌아보는 사색의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벚꽃이 난분분히 지고 있다. 벚꽃은 눈부시게 피었다가, 허망할 만큼 빨리 사라진다. 꽃이 지기 직전의 찰나는, 언제나 가장 찬란하다. 산다는 것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조차, 꽃은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를 다 태우듯 빛을 쏟아낸다. 그 모습은 생의 끝자락을 품격 있게 수놓는다.

지난 토요일, 태풍급 비바람 예보가 있었지만, 나는 벚꽃의 절정을 놓치고 싶지 않아 서대문 연희숲속쉼터로 향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걸음을 옮기는데, 거리 한복판에서 중년 부부가 얼굴을 붉히며 거칠게 다투고 있었다. 욕설과 저주의 말이 허공을 찢고 지나갔다.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메말라 드는 느낌이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잠시 후 숲에 도착하니, 벚꽃은 환하게 만개해 있었다. 세상의 험한 소리를 모두 흡수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고요히 자신의 아름다움을 펼쳐 보이고 있었다. 한들한들 춤을 추며 내려오는 낙화마저 시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풀나풀 휘날리는 꽃잎을 볼 때면 떠오르는 문장이 있다.

"이 지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은 슬픈 일이나 얼마나 단명하며, 또 얼마나 없어지기 쉬운가! 그것은 말하자면 기적같이 와서는 행복같이 달아나 버리는 것이다."

한국전쟁 때 납북돼 생사를 알 수 없는 수필가 김진섭의 <백설부>에 나오는 이 문장이 벚꽃 낙화와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 나는 벤치에 앉아 막걸리 한 잔을 따르고, 잔 위로 바람에 실려 온 꽃잎이 하나둘 조용히 내려앉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까 들은 말들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자, 배낭에서 지필묵을 꺼내고 붓을 들었다. 그리고 써 내려갔다.

觀花美心 벚꽃 낙화를 보다가 붓장난을 하고 싶었다. 꽃잎은 떨어지고 빗방울도 하나둘 떨어지는 광경이 내 눈에는 참 좋아 보였다.
觀花美心벚꽃 낙화를 보다가 붓장난을 하고 싶었다. 꽃잎은 떨어지고 빗방울도 하나둘 떨어지는 광경이 내 눈에는 참 좋아 보였다. ⓒ 이명수

觀花美心(관화미심) , 꽃을 보면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 먹향 속으로 스며드는 빗물 자국이 마치 내 마음의 굳은살을 지워내는 듯했다.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글씨도, 말도, 단지 의미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마음이 흘러나오는 길이라는 것을. 나는 황금찬 시인의 시 <꽃의 말>을 떠올렸다.

"사람아 / 입이 꽃처럼 고와라 / 그래야 말도 / 꽃같이 하리라 / 사람아."

꽃의 말 길거리에서 험한 소리로 싸우는 중년 남녀를 본 후, 황금찬 시인의 <꽃의 말>을 들려주고 싶었다.
꽃의 말길거리에서 험한 소리로 싸우는 중년 남녀를 본 후, 황금찬 시인의 <꽃의 말>을 들려주고 싶었다. ⓒ 이명수

짧은 시지만, 마음에 오래 남는다. 많은 사람이 외우고, 그 의미를 실천했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을 담아 한 자 한 자 붓으로 써 내려갔다. 요즘 우리의 말은 점점 거칠어지고 있다. TV 속에서도, SNS에서도, 심지어 가족끼리도 말은 다정한 손길이 아닌, 날 선 칼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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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은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자신을 찌르지 않지만, 사람은 혀끝으로 스스로를 베고, 타인을 상처 입힌다. 말은 향기로워야 한다. 그 말은 사람을 꽃피우기도, 시들게도 하니까.

"가루는 칠수록 곱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

이 오래된 속담이 오늘따라 더 깊게 와닿는다. 말은 아낄수록 빛난다. 나는 입이 험한 사람들을 보면, 이렇게 말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고운 말을 하는 데 돈 한 푼 들지 않으면서 당신의 품격을 높여 주는데, 왜 그렇게 거칠고 험한 말로 스스로 얼굴에 먹칠을 하오?'

누구에게나 말은 공짜지만, 그 한 마디가 누군가의 하루를 따뜻하게 물들일 수도, 얼어붙게 만들 수도 있다. 나는 불교 경전 <법구경> 구절을 가끔 되뇌며 경계로 삼는다.

"모든 재앙은 입에서 비롯된다. 함부로 입을 놀리거나, 남의 귀를 아프게 하는 말을 하지 마라. 맹렬한 불길이 집을 태우듯, 말을 조심하지 않으면 그 불꽃이 삶을 태운다. 입은 몸을 치는 도끼요, 마음을 찌르는 칼날이다."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말은 인격이며, 삶의 결이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 말에도 격이 있다. 그 품격은 혀끝의 기술보다 귀에 닿는 온기에서 비롯된다.

나는 오래전 초등학교 교실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한다. 말이 서툰 한 아이가 용기를 내어 발표를 했고, 교실은 잠시 정적에 잠겼다. 그때 또 다른 아이가 손을 들고 말했다.

"난 네 얘기가 참 좋았어. 네 말엔 진심이 느껴졌어."

그 한 마디가, 그 아이의 말을 바꾸었고, 삶을 바꾸었다. 바로 나 자신의 값진 경험담이다. 말은 누군가의 마음을 여는 열쇠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고, 토머스 모어는 "당신의 말은 당신의 사유와 인격, 세계를 대하는 태도의 총합"이라고 했다. 우리는 말로 세상과 마주하고, 말로 관계를 맺으며, 말로 기억된다. 말은 소리가 아니라, 존재를 드러내는 형식이다.

막걸릿잔에 떨어진 벚꽃잎 술잔에 떨어진 꽃잎이 봄날의 운치를 더해 주었다.
막걸릿잔에 떨어진 벚꽃잎술잔에 떨어진 꽃잎이 봄날의 운치를 더해 주었다. ⓒ 이명수

정치권의 막말, 온라인의 독설, 가정 내 무심한 언어폭력까지. 거친 언어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어른이 무심코 내뱉은 말이 아이에게 평생 남는 상처가 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언어의 상처는, 오히려 육체의 상처보다 더 오래간다. 하지만 우리는 말도 선택할 수 있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을 고르듯, 입 밖으로 나오는 말도 스스로 고를 수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바로 내 인격을 만든다.

사람은 위대해 보이지만, 말 한 마디에 웃고, 또 울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다. 말은 때로 마음에 다리가 되어 주고, 때로는 깊은 상처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말을 곱게 다듬는다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우리의 정서와 사고를 빚는다. 강물의 흐름이 풍경을 바꾸듯, 따뜻한 말 한마디는 내면의 겨울을 녹이는 햇살이 되고, 고단한 삶에 등을 기대게 하는 바람이 된다.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는 말, 귀를 맑게 하는 말, 꽃처럼 피어나는 말—그런 말을 품고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도 언젠가 누군가의 마음에 봄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꽃을 보면, 마음이 아름다워진다. 그 마음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 말이 닿은 곳에, 조용히 꽃 한 송이 피어나리라.

#觀花美心#꽃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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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문학 21』 3,000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어둠 속으로 흐르는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작가로도 데뷔하였다. 40년이 넘도록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철학하는 바보』『깨달음을 얻은 바보』『동방우화』『불교우화』『한국인과 에로스』『중국인과 에로스』 등의 저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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