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했다가 환속 후 1970년대 8mm 소형영화 감독으로 촬영 다니던 한의사는 부산영화의 발판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 중학교를 그만두고 1980년대 부산 프랑스문화원 씨네클럽에서 대학생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활동했던 청소년은 이후 영화의전당 대표이사를 지냈고, 부산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며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던 감독은 부산독립영화협회를 만들었다. 친구들과 함께 부모님께 받은 대학 등록금을 엉뚱한 데 사용한 결과가 1990년대 부산 시네마테크 운동의 거점이었던 '씨네마테크 1/24'의 출발이었다.
부산광역시가 펴낸 <구술로 보는 부산영화의 역사>에는 1970년대~1990년대까지 부산을 터전으로 부산영화를 구축해 온 13인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영화감독, 영화제작자, 촬영감독, 동시녹음기사, 영사기사 극장미술인, 영화평론가, 영화제 집행위원장 등으로 각기 다른 경험과 활동을 통해 '부산영화'의 역사를 만들어 온 이들의 회고를 통해 부산영화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있다.
출발은 각자 달랐으나 이들은 지금의 부산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점이다.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가 만들어지고 부산에서 수많은 영화가 촬영되는 등 부산에서 영화의 가치가 높아지는 데 이들의 역할은 좋은 토양을 만들었다.
지금의 부산영화를 구축한 사람들

▲<구술로 보는 부산영화의 역사>에 수록된 방추성 전 영화의 전당 대표 ⓒ 부산시
충무로 중심의 한국영화 역사에서 서울 외 지역의 영화 활동을 이야기하면 극장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대기업이 영화산업에 진출하기 전 크고 작은 극장이 영화문화를 이끌던 때였다. 1970년대 유현목 감독이 주도한 소형영화 동호회의 영향으로 8mm 촬영이 늘어났고, 이는 부산에도 영향을 끼쳤다. 1980년~1990년대 영화운동은 부산에서 성과를 나타내는데, 대표적인 게 부산국제영화제였다.
그 출발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오는 프랑스문화원 안의 영화모임이었던 부산씨네클럽이 나온다. 부산 프랑스문화원이 부산영화 성장에 큰 도움을 준 건데, 여기서 중심을 이뤘던 젊은 대학생들은 2000년대 전후 한국영화의 중심으로도 부상하게 된다(관련기사 :
"나 아니면 누가 돕겠나?" 반대 물리친 프랑스문화원장 https://omn.kr/1oimp).
<구술로 보는 부산영화의 역사>가 담은 13인의 이야기는 1970년대~2000년대 전후 부산영화의 전체적인 활동을 조망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기록적인 가치가 크다. 이른바 지금의 부산영화가 구축되는데, 노력해 온 이들의 면면을 통해 부산영화의 형성 과정을 비춘다.
소형영화 감독이었던 한의사 강선태, 1960년대부터 극장 영사기사로 일했던 김영호, 1970년대부터 극장 간판을 그리던 전병곤 선생 등의 이야기는 부산의 극장 풍경을 돌아보게 한다.
부산 경성대 연극영화과 1기인 전수일 감독이나 1990년대 제주 4.3 항쟁을 다룬 <레드헌트>로 이념적 금기를 깬 조성봉 감독, 프랑스문화원 씨네클럽 막내에서 제작자로 영화행정가로 변신한 방추성 전 영화의전당 대표, 동시녹음기사로 부산독립영화협회 초대 공동대표를 지낸 이성철 감독, 부산 시네마테크 운동의 주역인 김희진 감독, 부산에서 국내 최초로 어린이청소년영화제를 만들었던 김상화 전 집행위원장, 부산 영화의 촬영을 책임지고 있는 정성욱 촬영감독, 부산영화평론가협회를 만든 김이석 동의대 교수 등의 회고는 2000년대 전후 부산영화의 흐름을 복기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부산 영화인들의 연대기로서 다양한 각도에서 부산영화와 지역 영화인들을 조명하고 있고, 부산영화의 약사를 정리해 놓은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풍부하다. 개인의 회고를 통해 전하는 부산영화의 중요한 장면들이 곳곳에 담겨 있다.
책에는 박광수 부산영화제 이사장이나 이효인 전 한국영상자료원장 등도 포함돼 있으나, 부산 영화인으로 구분하기에는 한국영화에 기여한 공로가 더 커 보인다. 다만 이용관 전 부산영화제 이사장이나 오석근 전 영진위원장 등 1980년대 이후 부산영화의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 빠져 아쉬움이남는다.
지역영화사 연구 좋은 선례 만든 부산시

▲구술로 보는 부산영화의 역사 ⓒ 부산시
<구술로 보는 부산영화의 역사>에서 주목할 부분은 부산시가 편찬에 나섰다는 점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지역 영화사는 주목도가 다소 약하게 취급되는 경향도 있으나, 지역에서의 활동을 바탕으로 충무로에 진출한 경우도 많고 독립영화의 경우는 그 영향이 컸기에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 대학이나 연구기관 등이 맡아야 할 작업일 수도 있으나 행정기관이 지역사의 관점에서 접근해 알찬 결과물을 만들어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부분이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 중 하나인 광주극장이 있는 광주광역시 동구가 지역 영화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고, 지역에서 활동하는 영화인들을 조명하는 책도 발간되는 등 지역영화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는 시점에서 부산시가 좋은 선례를 만든 것이다.
대전이나 대구 등 1990년대 전후로 시네마테크 활동이 활발했던 지역들 역시 2000년 이후 한국영화 성장에 긍정적 바탕이 됐다는 점에서 관심과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행정기관이 지역사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좋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조유장 부산시 문화체육국장은 "<구술로 보는 부산영화의 역사> 발간은 부산시민들의 지역 역사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고 부산 근현대 예술사 연구를 더욱 풍부하게 하기 위한 초석이다"라며 "앞으로도 부산시는 부산역사를 통해 시민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 연구자들을 위한 기초자료를 쌓아가겠다"고 말했다.
책은 비매품으로 전국 공공도서관 또는 부산시 누리집이나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누리집에서 내려받거나 열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