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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기에 가수 하현우는 '앙스트블뤼테'라는 단어 하나를 팬들에게 던졌다. 앙스트블뤼테는 '불안 속에 피는 꽃'이라는 뜻의 독일어로, 사상초유의 팬데믹을 겪고 있던 팬들에게 사무치게 다가왔다. 이후 앙스트블뤼테는 콘서트 이름으로, 노래 제목으로 다시 팬들을 찾아왔다.

당시 마음도 몸도 힘들었던 앙스트블뤼테(만 37세, 여, 직장인, 대전 서구)는 역경을 이겨내리라 다짐하며 자신의 별칭으로 삼았다.

그는 원래 2D덕후였는데, 우연히 음악대장 팬아트를 보고 노래를 듣게 되었고, 마침 대전에서 콘서트를 한다기에 갔다가 거하게 '치였다'. 아직도 넋이 나간 상태로 집까지 걸어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애니 주제가나 어쿠스틱 노래만 듣던 그는 그 후로 록덕후가 되었다. 그간 다양한 덕질을 하면서 수행평가 때 연금술 책을 공부한다거나 군부체계를 익히기도 하는 등 자신도 웬만큼 깊이 판다고 생각했는데 국카스텐 덕후들은 차원이 달랐다. 철학과 과학, 종교와 문학을 넘나들며 국카스텐의 음악을 해석해 냈다.

그는 좋아하는 작가를 팔로우하듯이 국카스텐 덕후들을 팔로우해서 원하는 글을 볼 수 있도록 타임라인 구성을 잘 만들어두었다. 그런데 이번 계엄으로 타임라인이 완전 투쟁계로 변해버렸다.

 국카스텐 공식 응원봉이 없어서 직접 만든 응원봉
국카스텐 공식 응원봉이 없어서 직접 만든 응원봉 ⓒ 앙스트블뤼테

고등학교 때 사회과목으로 <정치와 사회>를 선택하고, 대학 때도 전공과 상관없이 법과 사회, 경찰형법 등을 들을 만큼 그는 정치와 사회에 관심이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국회의원들이 왜 몸싸움을 해대는지(그 당시만 해도 국회선진화법 이전이라 몸싸움이 잦았다) 음주운전이나 성범죄 처벌은 왜 그리 관대하고 불합리한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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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하고 부정의한 일들에 화가 났지만, 그로서는 바로잡을 길이 없었다. 게다가 2017년 포항지진(국내 두 번째 규모) 이후에 트위터가 가장 소식이 빠르다는 말을 듣고 바로 트위터를 시작할 정도로 그는 예민했다. 민감하고 겁이 많고 완벽한 J성향인 그는 점차 피곤한 일들은 묻어두는 쪽을 택하게 되었다.

그런데 12월 3일 계엄에 대한 말들이 타임라인을 점령했다. 그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트위터에 매달렸다. 그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당시 백수 3일 차였던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뒤집혀 있을 것만 같았어요. 내가 눈 돌린 사이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고, 세월호 아이들이 죽어갔잖아요. 이번에도 그럴까 봐..."

그는 집회에 나갈 준비를 했다. 대학 1학년 1학기 때 학회장에 이끌려 등록금 투쟁에 참여한 이후 처음이었다. 그때도 출석으로 인정해 준다는 말에 그냥 본관 앞에 서있는 게 다였다. 그는 집회나 시위 등은 엄두도 내지 않고 살았다. 백남기 농민의 죽음이 충격이 커서 그는 쫄보가 되었다. 박근혜 탄핵 때도 그는 서울에서나 집회를 하는 줄 알고 있을 만큼 집회나 시위를 자신의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집회에 필요한 준비물이나 시위 착장 등의 정보를 그러모았다.

대전 사람들의 느긋한 특성이나 부모님의 성향도 영향이 컸을 거다. 공무원인 부모님은 지극히 보수적이었다. 당연히 그에게도 순종적이고 책임감 있는 장녀 노릇을 요구했고, 집회 같은 건 허락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그는 K장녀로서 크고 작은 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맞서 싸우지 않으면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대우를 한 치도 벗어나기 어려웠으니. 그런 성장기가 그를 오히려 소심하게 만들었다. 왜 나만 저항하고 살까, 내 탓은 아닐까, 내내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즈음 그가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머뭇거리기만 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비장한 마음으로 박근혜 탄핵 때 써먹지 못한 정보와 이태원 때 알아둔 대피 요령 등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행여 누군가 알아보지 못하게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끼고 마치 위장하듯이 온몸을 꽁꽁 싸매고 집회장소로 갔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위험한 일은 전혀 없었고 사람들도 많았다. 윤석열이 구속되던 날은 대전 사람들이 이렇게 적극적인 면이 있었나 싶을 만큼 많이 모였다.

"같이 있는 것 자체가 가슴이 뻥 뚫리게 시원했고,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어요."

동질감은 계속 나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12월은 매일 집회 나간 기억뿐이다.

한강진 때 그는 밤새 라이브를 보다가 아침 6시에 옷만 입고 바로 택시 타고 기차역으로 갔다. 남태령 때 교대해주지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렸었다. 특히 아침에는 몸이 안 좋거나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사람들이 줄어드는 게 눈에 띄게 보였다. 그러다 그들이 연행되면 오래 자책할 것 같았다. 육교만 건너면 되는데 경찰이 막고 있어 오르락내리락 길을 돌아 돌아가야 했다. 다행히 여자 셋이 그 자리에서 동행이 되었다.

첫 집회에 나갈 때와 달리 아무 준비 없이 가서 걱정했는데, 도착하자마자 모닝빵을 나눠주고 음료를 주고 핫팩을 주었다. 배부르고 따뜻했다. 가끔 사탕과 초콜릿이 담긴 봉지가 돌기도 했다.

 깃발 만들기 부스에서 만든 '국카스텐 3집 나오기 전에 처리하자' 깃발
깃발 만들기 부스에서 만든 '국카스텐 3집 나오기 전에 처리하자' 깃발 ⓒ 조용미

충남대 윤자영 교수는 "윤석열 탄핵집회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모습을 모두가 확인했"고 (이런 경험으로 향후) '돌봄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사회적 자본이 구축됐다"(<오마이뉴스> 기사 인용)고 했는데, 앙스트블뤼테도 그런 돌봄을 경험한 셈이다.

행진을 시작하자마자 경찰이 불법집회라는 방송과 함께 세 명을 연행했다. 그는 말로만 듣던 폭력사태를 실제로 보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쫄보이긴 하지만 막상 닥치면 물어뜯는 성격이라 경찰들을 마구 째려보면서 목청껏 구호를 외쳤다. 다행히 연행된 이들은 오후에 나왔고, 소식을 듣고 더 많은 시민들이 몰려왔다. 감격스러운 장면이었다.

"이럴 때를 위해 하현우가 콘서트 할 때마다 팬들 목청을 틔워준 건가 봐요."

3월에는 집회에 가지 못하고 주로 리트윗과 후원, 청원만 했다. 놀랍게도 집에 손바닥만 한 거미가 나타나서 손가락과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세종호텔에 컵라면을 보냈다. 그는 사서 9년 차였지만 여전히 계약직이며 최저시급이다. 심지어 '파견비' 같은 수당까지 합쳐서. 순회사서는 2월부터 11월까지, 공공기관은 11개월만 계약한다. 퇴직금을 주지 않기 위해서. 직장생활 N 년 차에 처음 퇴직금을 받아봤다. 겨우 1년짜리 계약 두 번으로. 결국 얼마 전에는 업종을 바꿔 취직을 했다.

"매년 구직하는 삶이 얼마나 피곤한지 아세요? 인간적으로 비정규직은 없어져야 해요."

도서관 사서는 책 선정이나 정리법에 있어서 통일성이 있는 게 좋다. 주민들도 같은 사람이 있어야 라포가 형성되는데 계속 바뀌니까 아쉬워한다. 그런 점을 모르지 않으면서 국가가 주도해서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걸 보면 희망이 꺾인다.

그래도 노동조합 있어서 다행이다. 이번에 노조에 대한 편견도 깨졌다. 사실은 노동조합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쌍용차 사태 등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과는 먼 이야기였다. 그때만 해도. 이제는 아니다.

"고공농성장에 한번 가보고 싶어요. 근데 못 갈 것 같아요. 세종호텔 밥 먹으러 오라고 하고 향연님 농활에 오라고 하는데 갈 수 없어요. 여태 한 게 너무 없으니까요."

같은 국카스텐 덕후로서 그와 이야기 나누는 게 마냥 즐거웠던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김형수님과 박정혜 소현숙님, 고진수님을 뵈러 한 번 가야겠다는 생각을 속으로 했다.

그는 덕후들이 투쟁에 나서지 않았으면 용기를 내지 못했을 거라 말한다. 또 국카스텐 덕후들이 열심히 투쟁하는 걸 보며 나도 했다고 인증하고 싶어서 계속 나간 거라고 수줍게 말한다. 그럴 수 있다. 우리는 때로 누군가의 뒤를 따라가면서 길을 찾는다. 그는 불안을 딛고 한 발 한 발 나아갔고 광장 속에 작은 꽃봉오리를 틔웠다. 이제 불안을 걷고 덕질만 해도 되는 시간이 보장되면 좋겠다.

그에게 광장은 "새로운 세계"다. 지혜복 선생님을 알게 되었고, 농민들의 어려움을 보면서 시야가 트였다. 그가 바라는 건 간단하다. 사람으로 존중해 달라는 것. 더 이상 살해당하지 않고, 성범죄 당하지 않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는 것.

"원래 국산만 쓰고 SPC 불매하고 새벽배송하는 쿠팡 안 쓰고 살았어요. 그런데 좋은 소비를 하는 길도 알게 된 거죠. 언니네 텃밭이나 농사펀드를 애용하고 있어요."

어찌 보면 작은 실천일 수 있지만 그는 아는 만큼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라 결코 작지 않다.

그는 얼마 전 국카스텐이 발표된 곡 <Ocelli>의 가사가 지금 사회현상을 노래한 것 같다고 했다.

진실을 지우며 남겨진 거짓을 찾는 자여
질문 속에 그대를 빠뜨리는 백 개의 눈을 조심하라
....
깜빡이지 않고 모든 걸 봤지만 봤던 것은 무엇인가
연못 위에 비친 새를 낚았지만 손에 쥔 건 무엇인가

가사를 곰곰이 들여다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모든 음악은 만든 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청자의 것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한 번씩 들어보기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 천둥의 브런치(https://brunch.co.kr/@toddle222)


#인터뷰#국카스텐#탄핵#오셀리#하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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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toddle2) 내방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늘 무언가를 추구한다. 거실에는 모임이 끊이지 않았고 학교와 마을에서 사람들과 온갖 작당질을 꾸몄다. 정해진 궤도에서 벗어나기를 좋아해서 지금은 갈무리하지 못한 것들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쓰고 그리는 일을 한다. 에세이, 그림책, 소설을 넘나들며 막무가내로 쓴다. 깨어지고 부서진 것들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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