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의 정치성
추모는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사회는 모든 죽음을 동등하게 애도하지 않는다. 국가가 정의한 '애도할 가치가 있는 생명'만이 사회적으로 기억되고, 공적 공간에 흔적을 남길 자격을 얻는다. 반면, 국가의 기준에서 벗어난 존재들은 삶과 죽음마저 쉽게 지워진다. 이처럼 애도는 불평등하게 분배된다. 국가 권력은 어떤 생명은 가치 있고, 어떤 생명은 무가치하다고 서열화한다. 그리고 이 서열에 따라 죽음의 의미를 해석하고, 추모의 형식을 규정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죽음은 언제나 이처럼 일방적인 규정을 초과한다. 유족과 동료들, 생전에 함께 살아간 이들은 국가가 정한 추모 서사를 따르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애도하며 질문을 던진다. "왜 죽었는가?", "누구의 책임인가?" 이러한 질문은 애도의 자리를 곧장 정치적 책임을 요구하는 실천의 장으로 전환한다. 특히 산재사망 노동자의 경우, 죽음의 의미를 둘러싼 권력투쟁은 더욱 분명해진다. 국가와 기업은 그 죽음을 불가피한 사고, 개인의 실수, 위험한 노동의 숙명으로 자연화하거나 개인화하려 하지만, 이는 노동환경의 구조적 문제를 은폐하는 장치일 뿐이다.
기억은 언제나 선택적이다. 어떤 죽음은 기념되고, 어떤 죽음은 잊힌다. 이렇게 사회적 기억은 애도의 가치 판단을 내리는 생명정치권력 아래 재편된다. 그러나 소외된 기억을 복원하고, 제도적 무관심을 고발하는 추모는 그 자체로 정치적 행위가 된다. 특권화된 추모 서사에 균열을 내고, 또 다른 죽음을 막기 위한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추모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단지 형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바꿔낼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투쟁이다.
애도 받을 자격
산재사망 노동자를 어떻게 추모해 왔는가는 그들의 죽음을 어떤 의미로 사회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모든 죽음이 애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가 허용한 애도만이 공적 공간에 표상될 수 있으며, 애도의 형식과 의미 역시 국가의 시선에 의해 구성된다. 발전주의 시기 한국에서 노동자의 죽음은 경제성장, 국가발전이라는 목적 아래 조직되었고, 그에 따라 기억되고 추모되었다. 그 죽음은 숭고한 '희생'으로 미화되거나, 시스템이 아닌 개인의 부주의로 치환되며 애도의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채 잊히곤 했다.
태백 산업전사위령탑은 이러한 발전주의 국가의 기억 방식이 응축된 대표적 사례다. '전사(戰士)'라는 명명은 탄광 노동자의 죽음을 국가를 위한 '싸움'의 결과로 정의하며, 그 죽음을 체제 밖의 비극이 아닌 체제 안의 헌신으로 위치시킨다. 이처럼 죽음을 전쟁의 은유로 치환함으로써 고통과 착취는 사라지고, 대신 충성과 명예가 강조된다. 마찬가지로 서울 보라매공원에 위치한 산업재해희생자위령탑과 그 옆의 노동자 군상은 노동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듯 보이지만, 조형물의 구성은 국가 발전을 위한 단결된 공동체 이미지에 집중된다. 특히 군상은 결연한 표정으로 같은 방향을 응시하며, 아이를 안은 가족과 같은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는 산재사망 노동자의 개별적 고통을 지우고, 하나의 이상화된 '국민'으로 전형화하는 상징적 구성이다.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인근의 순직자 위령탑 역시 유사한 구조를 지닌다. '순직'이라는 명명은 노동자의 죽음을 구조적 위험이나 제도적 책임이 아닌, 직무 중 발생한 불가피한 불행으로 서사화하며 책임의 방향을 흐린다. 고속도로 건설 과정에서 사망한 노동자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국가 인프라의 상징인 고속도로 중심에 설치했다는 점은 노동자의 죽음을 국가 프로젝트의 일부로 봉합하는 효과를 낸다. 결국 이들 기념물은 발전의 정당성과 국가적 목표의 위엄을 재확인하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그러면서 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뒤로 밀려난다.
이처럼 발전주의 국가가 주도한 산재사망 추모 조형물은 기억의 구조를 특정 방향으로 조직한다. 이러한 추모 형식은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와 같이 사회적 책임을 지는 방식이 아니라, 국가 발전이라는 목적에 그들의 삶과 죽음을 복속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조형물의 시선, 구도, 명명 방식, 공간적 배치 모두가 이러한 국가주의적 서사, 생명정치권력의 논리를 반복하며, 죽음의 원인과 책임을 가시화하기보다는 은폐하고 미화한다. 이는 주디스 버틀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어떤 죽음은 충분히 애도되지만 어떤 죽음은 사회적으로 지워지는 '애도 불가능한 생명'으로 간주된다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
진정한 추모는 국가의 시선이 부여한 애도 자격을 넘어서, 그 죽음의 원인을 묻고, 책임을 규명하며, 더 이상 같은 죽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적 실천을 요구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발전주의 시기의 산재사망 추모 조형물은 단지 기억의 대상이 아니라, 기억을 구성하는 권력의 장치로서 비판적으로 재독해되어야 한다.

▲서울 동작구 보라매 공원의 산업재해희생자위령탑 옆 노동자 동상 ⓒ 소바칸의여행블로그
어떻게 추모할 것인가
경기도 화성시에서는 산재사망 추모 조형물 건립을 둘러싼 갈등이 벌어졌다. 화성시는 2024년 기준 지난 5년간 산재사망 노동자 수가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2022년 화일약품 폭발사고로 고 김신영 노동자가 사망한 후 추모 조형물 건립을 화성시에서 약속한 적이 있다. 하지만 조형물 건립은 기약 없이 미뤄졌고, 인구 100만 특례시에 맞춘 행정 개편에서 민생경제국을 기업유치실로 변경하여 기업 유치와 지원에 진력하였다. 화성노동안전네트워크를 비롯해 여러 단체에서 화성시 내 산재사망을 예방하기 위한 노력을 촉구하는 차원에서 산재사망 추모 조형물 건립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투쟁은 단지 조형물을 만드는 데 방점이 있지 않다.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묻고, 지배적 가치 질서를 재정립하려는 것이다.
해외에서도 추모하기를 둘러싼 사회적 투쟁이 지속해서 존재했다. 그중 시민재해 사례이긴 하지만 참고할 만한 것으로 JR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가 있다. 2005년 4월 25일, 일본 효고현 아마가사키시에서 JR 후쿠치야마선이 탈선하여 107명의 사망자와 562명의 부상자를 냈다. 이후 일본 사회는 사고 재발을 막기 위한 과정으로써 다양한 추모하기를 실천했다. 우선, 열차가 충돌한 아파트는 전면 철거되지 않고 일부가 남겨져 추모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그곳에서 JR서일본의 사장이 사죄의 말을 발표했으며 매년 사고 시각에 맞춰 희생자들을 기리는 위령식이 열리는 등 추모와 반성의 장소로 기능하고 있다. 다음으로, JR서일본은 신입사원 연수센터 앞에 사고 차량을 보관하는 시설을 건립하여, 직원들에게 사고 교훈을 잊지 않도록 교육하고 조직문화를 바꾸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참사의 유가족들은 사고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활동을 지속해 왔는데, 정부를 상대로 독립적인 조사 기관 설립을 촉구하여 항공·철도사고 조사위원회 설립으로 이어졌고 이 단위는 이후 교통안전위원회로 확대·개편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추모하기는 그 지향점이 어디를 향해 있는가에 따라 추모의 형식과 내용, 나아가 효과가 달라질 수 있음을 함의한다.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을 제정하는 계기가 되었던 1993년 태국 케이더(Kader) 공장 화재의 경우에도 추모 조형물이 건립되고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다. 여기에 더해, 케이더 공장 화재를 추모하는 노래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뉴질랜드의 가수 돈 맥글래션(Don McGlashan)의 'Toy Factory Fire'라는 곡이 있다. 이 노래는 단순히 희생자들의 아픔을 기리는 데 그치지 않고, 노동자들의 안전 문제와 노동 착취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처한 열악한 근무 환경과 사고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묘사하며, 이를 통해 노동자들의 인권과 안전이 얼마나 소홀히 다루어졌는지를 밝힌다. 비극의 구조적 원인을 명확히 짚어 사회적 책임과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다.
대항 기억 만들기
따라서 애도는 행동으로 이어질 때 정치적 의미를 획득한다. 단지 슬픔을 공유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무엇을 애도할 것인가?",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를 둘러싼 투쟁 속에서 추모가 이뤄지는 것이다. 또 다른 추모곡인 '그 쇳물 쓰지 마라'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제페토의 글을 가수 하림이 노래로 만든 이 노래는 '함께 부르기 챌린지' 방식으로 확산되었으며, 노래를 부르는 행위가 추모를 넘어서 증언이자 저항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산재 노동자의 죽음이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임을 사회적으로 상기시켰다. 단지 상징적 기념비처럼 산재사망 사고의 순간을 박제해 두는 게 아니라, 노래를 부르는 현재에 맞게 재구성하고 그 의미를 계속해서 되새길 수 있도록 했다. 그럼으로써 현장을 돌아보고 바꾸는, 이른바 추모가 변화를 열어내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형식의 예술 행위를 통해, 공감-기억-책임-변화로 이어지는 애도의 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
발전주의 국가 또는 생명정치 권력의 기억하기는 비가시화, 주변화, 개인화, 숭고화라는 특징을 띤다. 노동안전보건운동은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을 그러한 국가 주도의 추모 서사에 균열을 내고 산업재해에 관한 대항 기억을 창출하는 계기로 삼으려 투쟁해 왔다. 유가족 모임, 노동운동, 시민사회가 힘을 합해, 살인기업 선정식을 비롯한 여러 시도를 해왔다. 비록 제도화되지 못하고 비공식적인 기억 실천이라 하더라도, 책임의 구조를 묻고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추모 행동을 매년 이어나가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의 필자인 박기형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선전위원장입니다.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의 노동안전보건 월간지 <일터>에도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