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롱 시민기자는 지난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던 현장에 있었습니다. 참사의 생존자인 그는, 지난 2022년 11월 2일 한 포털사이트 커뮤니티에 참사 이후 자신이 받은 상담 기록을 일기와 대화 형태로 정리해 올린 후 <오마이뉴스>에 '이태원 참사 생존자의 이야기' 연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가 전하는 이태원 참사 '그 이후'의 삶에 함께 귀기울여 주세요.
지난 2024년 1월과 3월, 대구에서 2개월 간격으로 각각 다른 서점에서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 북토크를 진행했다.
대구 북토크는 대학생의 참여 비율이 높았고, 독자 중엔 교사나 나이가 지긋한 분들도 있었다. 그리고 대구는 내게 세월호 참사에 대해 깊게 질문했던 곳으로 기억되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참사가 모두 닮아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에 대해서 더 깊게 이야기 해줄 수 있는지' 등의 질문을 받았다. '책의 내용 중, 아이들에게 참사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에 대한 부분이 인상 깊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대학생이라는 친구들에게 '실례지만 몇 년생이냐'고 물어보게 되었다. 그들은 2002년생과 2003년생으로, 2014년도에 초등학생이었던 친구들이었다.

▲지난 2024년 4월 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서 '세월호 참사 10주기 기억식'이 진행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나는 세월호 참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세월호 참사에 대해 정리해서 말씀드리는 것으로 대체하겠다'고 대답했다. 지난 11년간 세월호 참사를 오래도록 바라보며 내 안에 감정과 감성이라는 잔여물은 가라앉았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인 감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2014년 4월 16일 그날은, 내가 대학교 졸업을 한 학기를 앞두고 휴학을 한 채 베이커리에서 오전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였다. 정신 없이 빵을 포장하던 그때, 뉴스 화면을 통해 실시간으로 배가 침몰하는 것을 보았던 게 생각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304명 사망이라는 글자를 보았을 때, 이 비상식적인 상황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는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어지는 뉴스에서, 세월호 선장이 구조선으로 건너오는 장면을 뉴스를 통해 보았던 것이 여태껏 가슴에 깊이 박힌 유리파편처럼 남아있다.
아이들에게 늘 사회는 어른들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가르쳤고, 아이들은 말을 잘 들었다. 그날, 세월호에선 정확한 안내가 있기 전까지 선내에서 움직이지 말고 대기하라는 방송이 울려퍼졌고, 아이들은 기다렸다. 그러나 선장은 탈출했다. 배가 기울어져도 어찌된 영문인지 모를 아이들은 그저 하염 없이 기다렸을 뿐이었다. 중요한 순간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 어른이 도망치고 없었다. 세월호 선장만 그런 어른이었을까.
"한 사람만 제대로 대응했더라도 수많은 인명이 구조될 수 있었는데 모든 시스템이 엉망이었고, 지휘부의 지휘 능력부터 하위직의 간단한 신고 전화 응대까지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해경 본청 간부 검찰 진술)
2014년 4월 16일, '책임자'라는 어른들은 모두 안이했고, 무능했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고, 여전히 밝혀지지 부분들이 있지만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알려진 명확한 사실들이 있다.
세월호가 실어야 하는 무게를 초과해서 화물과, 자동차, 컨테이너 등을 실었고, 그것들을 제대로 고정하여 묶지 않았으며, 단단히 고정하지 않았기에 배가 급하게 방향을 틀 때, 다시 무게 중심을 잡을 복원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과적된 짐들이 한 방향으로 와르르 쏟아졌으니 배가 그대로 쓰러질 수 밖에 없었다. 또, 세월호는 객실과 전시실 등까지 새로 증축하면서 과적을 더했다(세월호가 법적으로 허가 받은 화물 적재량은 987톤이었지만, 실제로 참사 당일 차량 185대(584톤)등 총 2214톤이 적재되었다. 이 모든 화물이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채 배는 출발했다).
배가 쓰러졌다 해도, 너무 빨리 침몰했다. 세월호는 쓰러진 지 101분 만에 침몰하게 되었다.
"만재배수량이 9907톤에 달하는 세월호가 쓰러진 지 101분 만에 침몰한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통상 배는 격실 구조로 각각의 공간이 '수밀'(밀봉)돼 있다. 이 때문에 쓰러져도 침수되지 않은 격실에 남은 공기의 부력으로 오래 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선조위 조사 결과 세월호 가장 아래에 위치한 이(E) 갑판의 수밀문 2개와 맨홀 5개가 모두 열려 있었다. 수밀문과 맨홀은 닫아둔 상태로 운항해야 한다. 선조위와 마린의 시뮬레이션 결과, 수밀문과 맨홀이 모두 닫혀 있었다면 배가 65도로 기운 상태에서 더 오랜 시간 떠 있을 수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구조 시간을 충분히 벌 수 있었단 이야기다."
- <한겨레> 세월호 퍼즐은 미완성…'탐욕' '인재' 진실의 조각을 인양했다, 2024. 4. 4
뿐만 아니라 배가 쓰러진 후 복원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기관 고장까지 더해져 침몰을 촉발했다는 게 지금까지의 조사를 통해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다.
말도 안 되게 과적을 하고, 증축을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결국 돈이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함이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이익에 눈이 먼 어른들의 욕심. 자본주의만을 너무 좇으면 인간성을 잃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파악하면서 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익을 위해 안전을 안일하게 생각했고 그 결과가 수 많은 희생자들의 숫자로 돌아왔다. 그것도, 채 다 피우지 못한 꽃망울들인 304명이었다.
매뉴얼을 왜 지키지 않았는가, 왜 선박의 결함 등을 미리 파악할 수 없었나... 이것은 더욱 할 말이 없다. 안전불감증이 큰 화를 불렀다고, 무엇이든지 빨리빨리 대충대충 처리하고 보는 문화가 이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다시금 느낀다. 역시나, 말을 잘 안 듣는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다.
누구나 참사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월호에 대해 내가 이토록 자세히 알고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참사의 당사자가 된 이후부터였다. 그 전에도 당연히 사회적 참사로서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고 국가의 실패를 지켜봐왔지만, 참사의 당사자가 된 이후 과거의 참사를 다시금 돌아볼 수 있었다.
이태원 참사 이후, 김훈 소설가는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의 추천사에 이런 말을 더했다.
'재난 참사의 모든 진실은 피해자 쪽에 저장되어 있다. 고통은 피해자의 몸과 마음과 생애 속에 녹아든다. 그래서 참사를 개념화하거나, 타자화하거나, 정치화하지 않고 피해자의 고통을 경청하고 공감하는 것이 비극에 접근하는 입구다.'
북토크를 하는 내내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 책에 대한 소개를 하며, 김훈 소설가의 이 추천사를 매번 언급했다. '타자화'. 나의 일이 아닌 것, 그리고 남에게 일어날 일이 아닌 것으로 선을 긋는 행위. 나는 매번 이것에 초점을 맞춰왔다. 덧붙여, '특별화와 소수화'까지 언급했다.
참사를 일부만 경험하는 일들로 규정 짓고,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로 만들어버리는 특별화와 소수화는 참사를 우리 모두의 일로 만들지 않고, 저 멀리 외딴 섬의 일로 만들어버린다. '이것이 나의 이야기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부터, 참사의 비극은 조금씩 해소될 수 있다는 말을 독자에게 늘 전해왔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참사를 대비하는 예방책이다.
'누구나 예기치 못한 참사를 당할 수 있습니다'라고 가르치고 평소에 참사와 그 이후 과정을 대비하는 교육을 하는 것이 참사 트라우마를 예방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날 이야기를 풀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모든 참사가 닮아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으로 이어졌다.
대구 독자들은 저마다 대구 지하철 참사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었다. 몇 십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대구시민들에게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참사였던 것이다.
대구지하철 참사 당시 그 지하철에 타고 있었다고 했던 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돌아보면, 죽을 뻔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고, 살아 나오면서도 당시에는 참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시공간을 초월해 어안이 벙벙하게 몇 날 며칠을 보냈다는 이야기였다.
나 역시 그랬다. 참사가 벌어지기 10분 전, 사람들의 압박에 의해 발이 동동 떠 몇 초간 숨을 쉬지 못했음에도, 이러다가 곧 풀리겠지- 했다. 특별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참사가 벌어진 그 시각에도 나는 앞뒤 사람에 가로 막혀 바로 앞에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인지하지 못했다. 내 곁의 사람들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빨리 나가고 싶다고 짜증만 내던 상황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뉴스를 본 뒤 내가 겪었던 상황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배 안에서 지시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에게 닥쳐올 참사를 감히 상상도 못하던 아이들의 시간은 어떠했을까. 어떤 이는 목숨을 서서히 잃어갔고, 어떤 이는 우연히도 목숨을 건졌다. 시간은 물리적으로 공평하게 흐른다고 하지만,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참사는 그렇게 평범한 삶을 덮친다.
참사가 벌어지기 전, 세상의 잘못을 바로잡고, 더 나아가기 위해 노력했다면 어땠을까. 참사는 과거의 해야 했을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을 때, 마치 업보처럼 발생한다. 참사가 되풀이되는 이유다.
그날로 돌아간다면

▲지난 2024년 10월 2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10·29 이태원참사 2주기 추모식에서 유가족과 참석자가 희생자의 영정에 헌화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2023년 12월 15일 대전의 버찌책방 북토크에서 초등학교 3학년 독자가 스케치북에 질문을 적어왔다. '사람들이 작가님에게 질문했던 것 중에, 답하기 힘들었던 것이 있나요?'
그간 받아온 질문엔 대체로 답변을 했지만 단 한 가지, 대답을 못했던 질문이 있었다.
시간을 돌려서 과거로 갈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면 2022년 10월 29일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었다. 대답을 선뜻 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마무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버찌책방에서 만난 그 초등학생 독자를 바라보며 이야기 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제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주저 없이 과거로 돌아갈 것이다. 그날로 돌아가서, 상황을 알지 못해 어리버리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던 나를 바꾸고,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바로 앞에서 참사가 벌어졌다고 알릴 것이며 보다 적극적으로 구조 활동에 참여할 것이라고.
트라우마가 다시 나를 덮치게 된다 해도, 다시 과거로 돌아가 다른 행동으로 참사를 정면으로 맞닥뜨리겠노라고 대답했다. 내게 하는 약속이기도 했다. 아무리 힘들고 아픈 일이더라도 앞으로 절대로 숨거나 외면하거나 하지 않겠다. 이런 스스로 약속을 참사의 당사자가 되기 전에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늘 아픔이 내게 벌어진 후에야, 이런 약속을 하는 사람이라서 부끄럽다.
마지막으로, '참사를 제대로 애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참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참사를 기리는 당일만이라도 유가족의 이야기를 듣고 참사 당일의 일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는 것. 그것이 충분한 애도임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참사의 당사자로서 내가 그런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으므로. 그런 노력을 목격할 때마다 마음의 상처에 약을 바르는 것 같았으므로.
그런 마음으로 나도 세월호 참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깊이 애도하며, 11주기를 기리는 글을 쓰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며 함께하는 모든 이들이, 유가족과 희생자들에게 위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작은 관심들이, 참사를 예방하는 첫 번째 걸음이라고 확신한다.

▲세월호 참사 10주기 "기억하지 않으면 되풀이 됩니다"세월호 참사 10주기인 지난 2024년 4월 16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 앞 세월호 기억공간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10주기 시민 기억식'에서 시민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 이정민
4월 16일, 11년째 수학여행지에 도착하지 못한 배가 여전히 기울어져 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반드시 세월호를 바르게 세워놓겠다는 다짐으로 11주기를 맞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