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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전을 보러 호암미술관에 다녀왔다. 호암미술관에서 4월 2일 시작한 전시이고, 끝나는 날인 6월 29일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지만 미술관 앞 전통정원 희원의 봄꽃이 지기 전에 다녀오고 싶은 마음에 서둘렀다.

희원은 조경전문가 정영선이 조경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미술관 쪽에서 풍경을 내려다볼 때 저 멀리 앞산까지 차경을 할 수 있도록 정원의 담벼락을 중간에서 끊은 과감한 선택을 했다. 덕분에 그림을 보고 정원으로 나왔을 때 '우와' 하는 풍경을 만날 수 있다.

165점을 한 자리에서 보는 호사

 희원
희원 ⓒ 최혜선

이번 전시에는 겸재 정선하면 떠오르는 인왕제색도를 비롯, 그의 트레이드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진경산수화부터,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그가 그렸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초충도, 화조영모도 등 다양한 장르의 그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겸재 정선의 그림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두 기관인 삼성문화재단과 간송미술관을 비롯,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대학교, 개인소장가들이 뜻을 모아준 덕에 165점을 한 자리에서 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겸재 정선 단독 전시로는 역대 최대 규모의 전시라고 하니 온갖 고생 끝에 모은 7개의 드래곤볼로 어렵게 이룬 소원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어 어부지리로 횡재한 느낌이다.

1층에 들어서자마자 <인왕제색도>가 관객들을 맞이한다. 2022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건희 회장의 컬렉션을 선보인 <어느 수집가의 초대> 전시에서 본 이후 3년만이다. 호암미술관에서 열리는 겸재 정선의 이번 전시는 6월 29일까지 열리지만 인왕제색도는 5월 4일까지만 전시된다. 해외에서 열리는 이건희 컬렉션 전시를 위해 대여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왕제색도가 다시 한국에서 선보이려면 빨라도 2027년은 되어야 한다고 하니 관심 있는 분들은 서두르는 편이 좋을 듯하다. 5월 6일부터는 <풍악내산총람도>가 전시될 예정이라고 한다.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 ⓒ 최혜선

1층에는 진경산수화가, 2층에는 정선이 이런 그림도 그렸어? 싶은 초충도, 영모도, 중국 고사를 바탕에 둔 고사인물화 등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다. 진경산수화가 전시된 1층에서는 지금은 가볼 수 없는 금강산을, 정선이 몇 번이고 유람하면서 그린 산수화로 실컷 보았다. 산수화가 명작이라 그랬는지 수묵화라는 소재의 특성 탓인지 그림을 보다보니 한 번 밟아본 적도 없는 금강산의 봉우리들이 눈에 익고, 괜시리 그립게 느껴졌다.

진경산수화란 가보지 못한 곳을 상상하여 그리는 관념산수화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낙원을 그린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대표적인 관념산수화 작품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실제 풍경을 바탕으로 그린다는 점에서는 진경산수화와 실경산수화가 비슷하지만 진경산수화는 실제 풍경에 화가가 조금 편집을 더해서 진짜, 혹은 이상적인 풍경이라 생각되는 모습으로 그려내는 것이라고 한다.

전시를 보기 며칠 전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겸재 정선> 큐레이터 토크 & 대담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때 들은 내용이다. 전시를 기획한 조지윤 실장과 오랜 시간 겸재 정선을 연구한 이태호 명지대 석좌교수가 들려준 대담 속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았다.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겸재 정선> 큐레이터 대담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겸재 정선> 큐레이터 대담 ⓒ 최혜선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은 문인 관료 출신 화가인 정선이 이렇게 대화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그의 장수를 꼽았다는 점이다. 마흔부터 여든 살까지 하급관료로 지내면서 화가로 등단하고 출세를 했는데 마흔 이전에 화가로 훈련한 흔적이 없고 그 시절 작품도 드문 편이라고 한다. 겸재가 그림에 몰입하여 개성있는 진경산수화를 그린 시기는 60대 후반부터 70대 중반쯤(출처 이태호 저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이라고 하니 겸재야말로 대기만성의 아이콘이라 하겠다.

호암미술관의 1, 2층을 가득 채운 작품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하나같이 감탄한 것은 정선이 살았던 경복궁 주변 장동, 수성동 계곡, 인왕산 등의 가까운 곳부터, 조금 범위를 넓혀 서울 근교의 명승지를 그린 경교명승첩, 그가 사랑했다는 금강산, 동해안 일대까지 같은 곳을 이렇게 그려보고 저렇게 그려보고 부채에도 그리고 크게도 그리고 작게도 그린 그 성실한 반복이었다. 방 하나를 관람하고 넘어갈 때마다 '이렇게 많이 그렸구나, 이런 그림도 그렸구나' 감탄이 이어졌다.

그림 밖에서도 울림을 주는 화가의 일생

앞서의 대담에서 들은 것 중 정선이 지방 고을 현감을 세 번 하는데 포항 청하 현감일 때도 서울 양천 현령일 때도 일 때도 지방 현감들의 성적을 매겨서 줄을 세우면 전국에서 꼴찌, 꼴찌에서 두 번째일 만큼 행정 능력은 좋지 않았다고 했던 이야기도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가 불멸의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영역이었던 그림에서만큼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산하를 걸으며 그리고 또 그린 결과물을 앞에 두고 '일머리는 없었구만!'이라고 누가 감히 폄하할 수 있을까?

입시 공부에는 흥미가 없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주도적으로 일정을 잡고 친구들을 이끌고 다니는 아들이 생각났다. 고등학교 성적으로 아이를 평가하지 말아야지 하고 말이다. 화가의 일생은 이렇게 그림 밖에서도 울림을 준다.

내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진경산수 하면 정선, 정선 하면 인왕제색도'라는 식으로 외우기 바빴던 지식이 지금에 와서 이렇게 입체적이고 거대한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다니... 이것도 나이듦이 주는 축복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그 시절에는 어떤 작가가 전기, 중기, 후기 그림이 달라지고 외워야 할 작품이 많으면 '왜 이렇게 많이 그리고 야단이야. 시험 칠 때 외울 거 많아지게'라고 볼멘 소리를 했던 것도 같다.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런 불손한 생각은 하지 않았을텐데.

인왕제색도 대신 교체되는 <풍악내산총람도>를 보러 전시 기간 중에 한번 더 호암미술관을 찾게 될 듯하다. 다시 보기 전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신 이태호 교수님의 책을 몇 권 찾아 읽으면 더 풍성하게 전시를 관람할 수 있을 것 같아 벌써부터 신이 난다.

 전시를 보고 와서 읽으려고 빌려둔 책
전시를 보고 와서 읽으려고 빌려둔 책 ⓒ 최혜선

2026년 하반기에는 겸재 정선 탄생 350주년을 기념하여 이 전시가 대구 간송미술관에서 다시 이어질 예정이라고 하니 그때 다시 한번 이 컬렉션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또 마음이 넉넉해진다.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 없이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1년 뒤에 다시 보자고 만날 날을 잡아 놓았기 때문이다.

전시 보기 전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고, 전시를 보러 와서 봄꽃 구경을 하고, 전시를 본 후 책을 보며 본 것들을 되새기고 다시 만날 기약까지 하다니 그야말로 기승전결이 완벽한 관람경험이었다. 많은 분들이 이 경험을 누리셨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글쓰기 모임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 70년대생 동년배들이 고민하는 이야기를 씁니다.
#겸재정선#호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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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만드는 삶을 지향합니다. https://brunch.co.kr/@sword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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