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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굴 9일 째를 맞고 있는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전파관리소 앞 유해 발굴 현장에서 20여 구의 유해가 드러났다.
발굴 9일 째를 맞고 있는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전파관리소 앞 유해 발굴 현장에서 20여 구의 유해가 드러났다. ⓒ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당진시유족회

발굴 9일 째를 맞고 있는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전파관리소 앞 유해 발굴 현장에서 20여 구의 유해가 드러났다.

당진시와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당진시유족회는 재단법인 더한문화유산연구원에 의뢰해 지난 3일부터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전파관리소 일대에 대한 유해 발굴을 하고 있다.

11일 현재까지 머리뼈 기준 약 20구 이상의 유해가 드러났다. 유해가 드러난 곳은 우당 전파관리소 매장추정지 인근 분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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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 당시 당진 우강면에서는 좌, 우익 학살이 번갈아 일어났다. 증언에 의하면 전쟁 초기 경찰은 보도연맹원 등을 갯벌로 끌고 가 살해했다. 북한군에게 협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예비검속 후 법적 절차 없이 살해한 것이다.

뒤이어 인민군이 점령하자 우강면 창리에서 좌익에 의한 우익 인사 보복 학살이 벌어졌다. 당시 희생된 사람은 30여 명으로 추정된다.

다시 인민군이 철수하자 이번에는 우익 인사들이 재보복 학살을 자행했다. 그 중 대표적인 곳이 이곳 우강면 송산리 부역 혐의 학살 사건이다. 지난 2022년 부경대 글로벌지역학연구소 의뢰로 이 사건을 조사한 유재준 조사관은 "합덕농협 당시 창고와 주차장에서 부역 혐의자 500여 명이 10일 동안 조사를 받았는데 이후 송산리와 전파관리소 두 곳으로 각각 끌려가 학살됐다"고 말했다.

사건 현장은 현 전파관리소가 있는 물구덩이 앞이다. 살해 방법은 총살이다. 유해와 함께 여러 개의 탄피가 함께 출토됐다.

 특이한 것은 쇠 창이다. 쇠로 만든 창인데 모두 5개가 발굴됐다. 재보복 살해를 하면서 총살 직전 고통을 주기 위해 일부 가해자들이 쇠 창으로 찌른 것으로 추정된다.
특이한 것은 쇠 창이다. 쇠로 만든 창인데 모두 5개가 발굴됐다. 재보복 살해를 하면서 총살 직전 고통을 주기 위해 일부 가해자들이 쇠 창으로 찌른 것으로 추정된다. ⓒ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당진시유족회

유 조사관은 "살해된 사람들은 주변에 아무렇게나 매장됐다가 전파관리소 설립(1970년) 공사 때를 비롯해 이후 추가공사 과정 때마다 부근에서 유해가 드러났다"라며 "일부 유족들이 공사 중 드러난 유해를 수습해 가묘 상태로 만들어 함께 매장한 것이 현재 발굴 중인 곳"이라고 밝혔다.

지난 2005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범국민위원회가 펴낸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실태보고서'에 따르면 전파관리소 부근에서 부역 혐의로 희생된 사람을 70여 명으로 보고 있다.

더한문화유산연구원 발굴팀 관계자는 "애초 다음 주까지 발굴하기로 했지만 유해가 계속 드러나고 있어 발굴 기간을 연장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당진시유족회 관계자는 "발굴지가 공사 등으로 많이 훼손돼 70여 구가 다 발굴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11일 현재 유품으로는 고무신과 가죽신 등이 발굴됐다. 특이한 것은 쇠 창이다. 쇠로 만든 창인데 모두 5개가 발굴됐다. 증언을 종합하면 쇠 창은 농사용이 아닌 당시 대장간에서 주문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좌익 인사들이 우강면 창리에서 우익 인사 학살 당시 '구덩이에 밀어 넣고 쇠 창으로 찔러 살해했다'고 한다.

 당진시와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당진시유족회는 재단법인 더한문화유산연구원에 의뢰해 지난 3일부터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전파관리소 일대에 대한 유해 발굴을 하고 있다.
당진시와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당진시유족회는 재단법인 더한문화유산연구원에 의뢰해 지난 3일부터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전파관리소 일대에 대한 유해 발굴을 하고 있다. ⓒ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당진시유족회

그런데 이번 송산리 전파관리소 부근 유해 발굴 과정에서도 쇠 창이 나온 것이다. 재보복 살해를 하면서 총살 직전 고통을 주기 위해 일부 가해자들이 쇠 창으로 찌른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당진 지역 주간신문인 <당진시대>는 2000년 11월 27일 전파관리소 부역 혐의 학살 사건에 대해 당시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담았다.

보도를 보면 한 주민은 "그때의 일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고,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과 경찰의 감시에 시달려서인지 희생자 가족들은 하나둘씩 마을을 떠나 지금은 한 집도 남아 있지 않다"고 증언했다. 다행히 일부 희생자 유족들이 소식을 듣고 발굴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한편 당진 지역에서는 6.25 전쟁 당시 우강면을 비롯해 합덕면, 석문면, 한진 앞 바다 등에서 집단 학살됐다. 우강면 창리에서 처럼 좌익에 의한 우익 인사 학살 사건도 있었지만, 경찰과 청년단원에 의한 예비검속 또는 부역 혐의자 학살 사건으로 인한 희생자 규모가 훨씬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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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발굴#당진#송산리#우강#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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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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