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출간된 책 <우리는 언제나 타지에 있다>는 농촌의 국제결혼 가정에서 태어난 '이주배경 청년' 고예나의 자전적 수필이다(출판사 제공 책소개에는, 저자는 "차별을 내포하게 된 단어 '다문화'를 대신해 국제 통용어인 '이주배경청년'으로 스스로를 소개한다"고 써 있다).
법무부 통계(2023.12)에 따르면, 한국 주민등록 인구의 4%에 해당하는 약 220만 명이 체류 외국인이다. 일반적으로 인구의 5%가 외국인일 때 해당 국가가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고 평가한다. 한국은 현재 빠르게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는 중이다.
대략 1990년대 중반부터 결혼이민자가 급증했다. 이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의 경제성장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영향이 크다.

▲한국은 현재 빠르게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는 중이다.(자료사진) ⓒ mahbodakhzami on Unsplash
정부가 산업연수생 제도를 도입해 이주노동자들이 들어오던 시기와도 겹친다. 초창기에는 일본인 여성과 중국 조선족이 주를 이루었으나, 2000년대 이후로는 동남아시아 여성들이 결혼 이민자로 대거 들어왔다.
한국서 자란 '타인', 이주배경 청년의 목소리
한국은 결혼이민을 제외하면 '이민'을 공식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난민 인정에 있어서도 OECD 국가 중 가장 인색한 편에 속한다.
한국은 소위 '단일 민족 신화'의 상상적 허구에 갇혀 산 지가 오랜 나라이고 그만큼 외국인에 배타적이기도 하다. 서구 백인들에 대해서는 막연히 동경하면서도 저개발 국가 출신 외국인들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차별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일 때가 적지 않다.

▲인문에세이 <우리는 언제나 타지에 있다 - 이주배경청년의 일, 배움, 성장에 관하여> 위고출판사. ⓒ 위고
결혼이민 여성 대다수는 농촌 지역에 정착한다. 1960~70년대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젊은이들이 일자리와 교육을 찾아 도시로 떠났고, 농촌에는 부모를 부양하거나 가업을 잇기 위해 남은 총각들과 노인들이 주로 남게 되었다. 한국 대다수 여성은 농촌 생활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이에 많은 농촌 총각이 외국인 여성과 결혼하였다.
고예나 작가의 가족도 바로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
"연애를 하기는커녕 일면식도 없던 외국인 둘이서 처음 만난 날 곧바로 혼인 신고서에 서명을 했고 사흘 후 합동결혼식을 통해 가정을 이뤘다. 나는 자라면서 그런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 너무 부자연스럽다고 느꼈다.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존재 같았다. 엄마와 아빠의 결혼이 개인적으로도 이상한 선택이지만,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여겼다. 하지만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만드는 생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때마다 언제나 나를 붙드는 것이 있었다. 바로 내 동생들." (15쪽)
이 책은 농촌 총각과 국제결혼을 통해 형성된 가정에서 자란 이주배경 자녀가, 지난 세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생생하게 전해 준다.
고 작가가 성장한 모습을 보면 시골에서 자란 내 어린 시절과 겹쳐 보인다. 하지만 당시 나는 1970년대에 자랐고, 고 작가는 2000년대에 태어난 사람이라는 점에서 무려 30년의 간극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고 작가는 어린 시절 하루에 버스가 네 번 밖에 오지 않고, 화장실은 재래식이며, 밤이면 쥐들이 천장에서 뛰노는 집에서 살았다고 회상한다. 몇 해 전에는 새 집을 짓기도 했지만, 그의 유년 시절은 지금의 중장년 세대가 경험한 비슷한 한국 농촌의 현실을 고스란히 겪었다.
결혼이민자와 그 자녀들의 삶... 국제결혼 가정의 갈등과 긴장
그러나 분명한 차이도 존재한다. 그는 '이주배경' 자녀이기에 언어, 문화, 교육, 가족 등 일상 전반에서 차별과 소외를 경험했다.

▲농촌 풍경(자료사진). ⓒ bluecanis on Unsplash
결혼이민자와 그 자녀들은 이 사회에서 '소수자'로 살아가야 했으며, 주류 사회로부터 차별과 소외를 숙명처럼 강요당하였다. 단지 가난한 게 아니라, 억울하고 외로운 삶을 견뎌야 했고 정체성의 혼란도 컸다.
외국에서 온 이모들이 일하는 곳은 빨래 공장만이 아니다. 우리 엄마처럼 집안의 농사를 함께 하는 경우도 많지만, 내가 아는 이모들은 거의 다 밖에 나가 일을 한다. 식품 가공 공장에 나가고 식당에서 서빙과 설거지를 한다. 방과후 교실이나 도서관에서 보조를 하고 요양원이나 요양 병원에서 청소나 간병을 한다. 작은 네일숍에서 손톱을 다듬고 마트에서 계산을 한다. 틈틈이 농사도 짓는다. 그렇게 번 돈으로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반찬거리와 옷을 산다.
한때 사람들이 동남아 사람들은 게으르다는 혐오 표현을 서슴지 않기도 했지만, 적어도 지금 우리 동네에서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우리 집도 우리 마을도 엄마와 이모들의 노동 없이 돌아가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 우리 마을에 사는 이주여성 중에 전업주부는 없다.(58-59쪽)
이는 단순히 인권의식 향상이나 복지정책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지난날 한국 국가 정책이 삼농(농촌, 농민, 농업)의 희생 위에 대도시 중심으로 국토를 개발하였기에 생겨난 구조적 문제에 해당한다. 농촌의 삶의 질이 개선되고 경제적 기반이 강화된다면, 귀농·귀촌을 택하는 인구도 늘어날 것이다.
고 작가는 어느 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물컵을 던져 경찰이 출동했던 '물컵 사건'을 회고하며 그 폭력의 뿌리를 깊이 성찰한다. 이 장면은 충격적이지만, 국제결혼 가정의 갈등과 긴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물은 아래로 흐르고, 사람은 위로 흐른다"는 말이 있다. 많은 결혼이민 여성은 한국을 '기회의 땅'으로 보고, 상대 남성이 누구인지 충분히 알지 못한 채 결혼을 택했다.
서로 언어와 문화적 차이가 크다 보니 함께 살며 갈등을 겪는 일은 필연적이다. 교육이나 상담 등 사전 준비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런 결혼에는 본질적인 한계가 따르며 그 해결 역시 쉽지만은 않다.
고 작가는 이주배경 청년을 '사회적 배려 대상'으로만 보는 시각에 반기를 든다. 바람직한 태도라고 본다. 이주배경 청년에 지나친 특혜를 줄 필요도 없지만, 차별해서도 안 될 것이다.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은 두 문화를 배경으로 자라 시야가 넓고, 이해력도 깊으며, 이중 언어 능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활동이 가능하다. '소수자'라고 해서 반드시 '약자'는 아니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인 이주민의 삶을 통해, 한국 사회의 또 다른 얼굴을 들여다보고 성찰할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겨자씨신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