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 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
안티구아의 성주간

▲행렬(Procesion)은 무거운 '안다스'(andas)라 불리는 플랫폼에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조각상이 놓이고, 수백 명의 신자들이 이를 어깨에 메고 도시를 행진한다. 16세기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가톨릭이 전파됨으로 도입되었다. ⓒ 이안수
4월의 안티구아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가득하다. 과테말라 관광청(INGUAT)에 따르면 성주간에만 방문객이 작년의 경우 120만 명이 넘었고 올해는 그 숫자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같은 기간 동안 과테말라 전체 관광객 수의 50%가 웃도는 수가 안티구아를 방문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인구 5만에 불과한 과테말라의 작은 도시는 숙소의 예약이 이미 완료되었다. 숙박비도 평소보다 2~3배로 오른다. 어떤 호스텔들은 젊은 여행자들을 위해 옥상이나 마당에 텐트를 칠 수 있도록 허락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매년 사순절(La Cuaresma)과 성주간(Semana Santa)에 되풀이되는 연례행사이다.
올해의 사순절은 3월 5일(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4월 20일) 전일인 4월 19일까지이다. 하이 시즌인 이 기간 중에서도 방문객이 집중되는 피크 시즌은 부활절 전 2주간이다.
30개가 넘는 성당과 수도원이 있는 안티구아 도시 전체는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이곳의 성주간 행사는 202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성주간의 방문을 통해 1700년대 3차례나 거듭된 심각한 지진으로 폐허가 된 상황 속에서도 안티구아가 여전히 세계적인 가톨릭 문화와 종교 중심지로서의 굳건한 위치에 변함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행렬(Procesión)
성주간은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부활절 전 한 주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주간이다. 세계적으로 기념되는 종교행사이지만 세계의 사람들이 안티구아로 모이는 이유는 18세기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도시 형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장엄하고 아름답고 독창적인 행사를 직접 목도하고 참여하기 위함이다.

▲안다스안다스를 메는 사람들은 속죄의 마음과 더불어 병의 치유를 서원하기도한다. ⓒ 이안수

▲행렬행렬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안다스에 실린 성상의 모형을 들거나 향을 피우면서 신심을 드러낸다. ⓒ 이안수
압도적인 광경은 도시 전체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거대한 종교 행렬(Procesión)이다. 행렬이 진행되는 날은 자주식 로브(Robe)를 입은 사람들로 거리가 뒤덮인다.
행렬은 성주간 동안 나사레노(Nazareno : 성주간 행렬에 참여하여, 전통 복장인 긴 로브를 입고 고요히 걷거나 기도하며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신자들)라는 코프라디아(Cofradía : 전통 있는 주요 행렬 조직 주체) 회원들이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각 성인들의 '피구라(Figura : 성상)'을 올린 안다스(Andas : 성상이 실린 가마형 제단)를 메고 각 성당에서 출발하여 예정된 루트에 따라 안티구아 시내 거리를 돌고 원래의 성당으로 돌아오는 대열을 말한다.
수천 명이 행렬의 주인공이 된다. 나사레노에게는 각기 다른 역할이 부여되어 수백 미터 이어지는 대열의 구성원이 된다. 그 행렬의 연도에는 수만 명의 인파가 그 성상을 지켜보거나 뒤따르게 된다. 이런 거대한 행렬은 사순절에서 부활절까지 계속된다. 성주간이 가까워질수록 행렬의 수가가 많아진다.
올해는 42번의 행렬이 진행되고 있으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걸어간 길을 따라 예수의 수난을 묵상하며 행진하는 기도 의식과 예수님 수난이나 성모의 슬픔을 표현한 성상을 정교하게 꾸며 설치 예술처럼 제단에 모시고 그 앞에서 기도와 묵상으로 경배하는 밤샘 의식, 예수의 고난과 성모의 슬픔을 음악으로 묵상하는 장송 행진곡 콘서트, 성주간 중 예수님이 세상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순간을 재현하는 의식, 성체 전시를 비롯해 109번의 행사가 열린다.
이 행렬은 뒤따르며 장중한 '행렬장례행진곡을 연주하는 악단과 더불어 짧게는 4시간 길게는 22시간(새벽 3시에 출발해 다음날 새벽 1시까지)이나 계속된다.
알폼브라(Alfombras)
알폼브라(Alfombras : 카펫)는 안티구아의 독창인 문화이다. 이 카펫은 행렬이 지나가는 길 위에 색색으로 물을 들인 톱밥과 꽃과 과일로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지는 도로 위의 거대한 카펫이다.

▲알폼브라알폼브라는 톱밥, 꽃, 과일 등으로 만들어지며 이는 가톨릭 신앙이 마야 원주민 문화와 융합된 결과이다. ⓒ 이안수

▲알폼브라 만들기알폼브라는 가족이나 회사의 동료들이 자발적으로 비용을 기부하고 함께 만든다. ⓒ 이안수
이는 행렬이 지나가는 도로변의 가정, 가게, 관공서, 회사, 학교 등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비용을 내거나 꽃이나 과일, 채소를 기부해 주제를 정하고 디자인한 다음 행렬이 지나가기 전에 완성할 수 있도록 함께 만든다.
행렬의 거리는 경로와 참가자 인원에 따라 각기 다르지만 6km에서 15km 정도까지 다양하다. 이 거리는 행렬의 시작 전날 밤부터 차량이 통제되고 도로는 완전히 비워진다. 그 거리에 짧게는 5m 길게는 100여 m에 달하는 크기의 톱밥과 꽃의 양탄자가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알폼브라는 행렬마다 수십 개에서 수백 개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는 예수님에게 헌정되는 신앙과 공동체의 정신이 결합된 아름다운 시각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행렬이 지나가면 바로 흩어지고 파괴되어 버린다. 경건한 마음, 창의적으로 디자인해 성심을 다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카펫의 화려한 무늬가 행렬에 밟혀 사라지는 자체가 희생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진다.
행렬의 마지막을 뒤따르는 시청의 차량과 크레인, 20여 명의 청소 담당 인원이 즉시 짓밟힌 양탄자를 수거해 트럭에 실으면 도로는 다시 원위치 된다.

▲알폼브라의 수거알폼브라는 행렬이 지나간뒤 시청 청소담담 부서의 직원들에 의해 즉시 수거된다. ⓒ 이안수
행렬은 소규모로 유럽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도 시행되지만 이 알폼브라는 이곳 안티구아와 과테말라의 도시에서만 만들어지는 고유한 문화이다.
안티구아 Semana Santa의 유래
안티구아의 성주간 행렬은 스페인 가톨릭에서 유래되었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Andalucía)의 세비야(Sevilla)가 본고장이다. 각 형제단이 성상을 실은 안다스를 메고 장송 음악과 함께 시내를 행진한다.
이 전통이 16세기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화하면서 안달루시아 출신 수도회들의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다. 그 수도회의 성주간 의례가 안티구아로 이식되었다. 이 전통이 마야 문화와 융합되어 더 크고 화려하게 거듭났다. 침묵과 고요는 공동체의 축제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정화의 의미로 향을 피우는 마야의 문화가 행렬에 도입되었다.
세비아에서는 '화살'처럼 심장을 관통하는 듯한 깊은 슬픔과 고통이 담긴 즉흥애가 사에타(Saeta : 화살이라는 의미)가 행렬이 지나는 2층 발코니에서 불러 예수와 성모에게 바치는 반면 안티구아에서는 금관악기를 중심으로 한 관악대에 타악기로 구성된 브라스 밴드가 행렬을 뒤따르며 '장례행진곡'을 연주한다.
마야 문화에서는 의식에서 신에게 바치는 의례로서 꽃, 나무 등 자연재료를 활용했다. 이 의례적 예술이 염색한 톱밥으로 알폼브라에 도입되었다.
22시간의 행렬
지난 4월 5일 토요일에는 세 곳 성당의 행렬이 진행되었고 6일 일요일에는 '넘어진 나사렛 예수상(Jesús Nazareno de la Caída)'의 행렬이 있었다.

▲행렬 중에는 브라스 밴드가 성상을 뒤따르며 장송 행진곡을 연주한다. ⓒ 이안수

▲형제단사순절과 성주간의 행렬을 비롯한 다양한 행사들은 '형제단'이라 불리는 신자들의 모임에서 신앙의 실천으로 봉사를 통해 이루어진다. ⓒ 이안수
6주간의 사순절 기간 중 다섯 번째 주일의 행렬로 '성 바르톨로메 베세라 성당(Iglesia de San Bartolomé Becerra)'에서 일요일 새벽 3시에 출발한 행렬은 안티구아의 도로들을 두루 돌아 월요일 새벽 1시에 그 성당에 도착함으로써 종료되었다.
총 22시간이나 지속된 '넘어진 나사렛 예수상' 행렬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는 도중에 세 번 넘어진 사건을 형상화한 성상 행렬이다. 과테말라 전역에서 인기 있는 성상으로 안티구아의 거리는 온통 군중으로 채워졌다.
현재 안티구아의 시간은 도시의 모습도, 사람들의 신심도, 그 의례들도 모두 18세기 어느 날을 살고 있는 모습이다.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경이로움'의 시간이라고 할 것이다.
과테말라 관광청의 통계에 따르면 방문자들의 절대 다수는 마야인들을 비롯한 과테말라 사람들이고 그 다음이 인접 나라인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를 비롯한 종교적 신심을 공유하고 있는 중남미 사람들이다. 미국과 캐나다 등 북미와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 그 뒤를 잇는다.

▲성주간안티구아의 성주간 행사는 예술과 신앙이 어우러진 독특한 문화 행사로 현재 과테말라 관광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이안수
과테말라인들을 비롯한 중남미 주민들은 성지순례의 마음으로, 북미와 유럽인들은 인간과 AI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자국 이기주의의 분쟁과 소음으로 가득한 현재를 탈출해 500년 전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나온 사람들이다.
안티구아의 이 거대한 신앙과 예술의 퍼포먼스는 20일까지 계속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모티프원의 홈페이지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