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파면을 선고한 다음날(5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앞에서 열린 '승리의날 범시민대행진'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4월 4일, 11시 22분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은 파면됐다. 동시에 대한민국은 대통령을 두 번 탄핵시킨 민주공화국이 되었다. '군주론'마저 "군주가 약속을 어길 땐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했다만 윤석열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민주주의를 옹호해야 할 통치자로서 지켜야할 규범과 질서를 부정하고,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불법적이고 부당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렇기에 그 통치자를 주권자의 이름으로 파면시키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무척이나 힘든 겨울이었다. 매일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강풍을 맞으며 추위만큼이나 냉혹한 현실 앞에 투쟁을 노래하는 동료들을 지켜보는 것도, 기꺼이 민주주의와 정치를 옹호하기 위해 광장으로 나선 시민들을 만나는 것도, 나를 비루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심정으로 4개월을 지냈다. 나 또한 토요일은 집회에 나섰고, 긴급히 모이는 행동도 출동하듯 찾아갔다. 그럼에도 모든 현장에 갈 수 없음에 죄책감이 들기도 했고, 설레는 마음이나 기쁜 마음으로 광장에 앉아있을 수 없어 무력함에 젖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이번 광장을 통해 깨우친 희망 역시 분명하다. 비폭력을 넘어서 평화를 지향하는 대규모 집회를 다시금 열어냈다는 것, 게다가 국가 원수의 계엄사태를 민주적 절차로 종결시켰다는 것은 구체적인 희망이다. 촛불에서 응원봉으로, 민중가요와 대중가요가 섞여 흘렀던, 달라진 광장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페미니스트와 퀴어가 만들어 낸 평등의 공간이 주목받았던 것 또한 평생 기억할만한 장면이다. 특히 많은 2030 여성들이 광장에서 연설하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도 특별했다.
반면, 광장에서 평화의 바람이 불었던 것과 다르게 정치권에선 계엄 이전과 이후, 다름을 발견할 수 없었다. 두 쪽으로 나뉜 진영은 책임과 반성은 물론이고, 분열된 사회 회복을 위한 겸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광장 역시 윤석열 파면과 국민의힘 해체의 구호는 있었지만, 불평등과 성차별 그리고 기득권 해체 같은 구호는 외치기 어려웠다. 윤석열 파면 이후의 세상을 그리는 것은 제한되었고, 국민의힘 해체를 외치는 이유나 목적 역시 명확하지 않았다. 여전히 한덕수를 비롯한 국무위원들의 오만함이 그칠 줄 모르지만, 그것을 막아내는 방식도 보다 정치적일 수는 없는 것인가.
정치인들의 주장은 자주 거칠어졌고 상대를 끝까지 밀어붙여 말살하려는 일들은 더욱 늘어났다. 지금 정치의 모습들은 대통령이 바뀐다고 해도 한 번에 좋아질 수 없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기도 한다.
이런 사회에서 나같은 시민이 정치의 행위자가 된다는 것은 몹시 어렵고 괴로운 일이다. 녹색정치와 복지사회를 꿈꾸며 하나의 정당과 몇몇 사회단체에서 활동 '경력'을 쌓아왔다. 두 번 출마한 선거에서 맛본 낙선과 더 다양한 시민을 위한 사회정책 개선을 위해 노력해왔던 8년간의 노력은 짧다면 짧지만, 이제 서른을 막 넘어선 내게 만만치 않은 도전이기도 했다.
단순히 여성, 청년, 소수정당 활동가 등의 신분이나 개인적 특성만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다. 미래 의제, 다양한 시민 옹호, 복지와 평등, 생태와 녹색정치, 다당제 의회와 권력구조 개편 등 지금 체제에 균열과 변화를 요구함과 이를 위한 협상과 계획적 실천 방안 마련을 정치적 과제와 도전으로 생각하는 활동가는 설 자리가 마땅치 않다. 이제 나는 나처럼 정치나 활동을 하겠다는 동료들에게 이 길을 권장하고 권유할 자신이 없다. 특히나 이토록 권력 앞에서의 굴종만이 이기는 정치인 것처럼 착각하는 세상에서 말이다.
한 개인의 정치적 진로는 그에게 남겨두더라도, 시간을 들여 토론과 해법이 필요한 문제를 안아 드는 정치는 꼭 진보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정치를 충분히 갈망하는 정치가들이 많아져야 한다.
정치를 요청하는 사법부의 '선고문'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선고문의 문장이 있다. "피청구인이 주장하는 국회의 권한 행사로 인한 국정 마비 상태나 부정선거 의혹은 정치적 제도적 사법적 수단을 통하여 해결하여야 할 문제이지 병력을 동원하여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피청구인과 국회 사이에 발생한 대립은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 해소되어야 할 정치의 문제입니다." 바로 입법부와 행정부에게 정치 실종에 대한 책임을 묻는 대목이다.
앞서 서술한 정치의 면면을 정확하게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치를 포기한 대통령의 책임을 명백하게 묻고 있다. 또 그런 책임을 야당에게도 함께 묻고 있다. '과연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필요한 문제인가'에 대한 의문도 들지만, 사법부가 그런 견제와 우려를 할 만큼 정치가 기능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도 맞지 않은가.
그렇기에 그 선고문의 무게는 무겁다. 시민들이 이번 선고문으로 민주시민의 자부심을 되찾고, 명문이라 말하는 것은 헌법재판관들 자체를 칭찬하는 의미보단 정치가 제자리를 찾고, 제대로 자기 할 일을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읽어야 한다.
이미 헌법재판소의 선고문은 자기 할 일을 마쳤다. 그것의 의미를 지나치게 파헤치고, 그 글을 작성한 사람을 찾고 치켜세우는 일보다 이제는 그 이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헌법재판관들이 엄중한 시국에서 숱하게 시달렸던 공적이고 사적인 어려움에서 조금은 완화되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정치에게 남겨진 과제라면 과제일 것이다.
만장일치 파면만큼 중요한 것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직무대행을 비롯한 재판관들이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인용 결정을 선고 한 뒤 법정을 나가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헌법재판소 판결 과정에서 하나 더 짚을 내용이 있다면 만장일치에 대한 부분이다. 정치권과 언론은 끝까지 헌재의 판결에서 '8:0'과 '6:2' 또는 '5:3'과 '4:4'까지 경우의 수를 제시하며 각 숫자의 의미를 파악하고 토론하는 일에 열을 올렸다. 그러는 동안 헌법재판소는 만장일치의 의견을 합의하기 위해 아주 긴 시간을 보냈다.
이 점에 대한 여러 사람의 평가와 생각이 있지만, 대화는 옛날에 사라져버린 지금의 의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너무 늦은 판결에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하지만 다수의 시민들은 헌법재판소에서 사려깊게 도출한 결론에 감동받고 있다. 그러한 감격을 헌법재판소로부터 느낄 수밖에 없는 시민들의 마음이 애달프기도 하다. 원칙을 강조하는 헌법재판소에서 법의 언어를 빌려 갈등을 봉합하려는 시도를 한 것을 마냥 기쁘게만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나의 진솔한 심정이다.
그런 맥락에서도 헌법재판관들이 합의를 통해 만장일치의 의견을 모아낸 일을 보며, 정치인들은 크게 반성해야 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해도 간다"는 말
윤석열 파면 이후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기차역에서 중계를 지켜보던 시민과 기자가 인터뷰 하는 장면이었다. 아마도 그 시민은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졌던 사람 같다. 그에게 기자가 소회를 물으니 그는 그늘진 얼굴로 이렇게 답했다. "섭섭하기도 한데, 또 이해도 가네요"라고. 왜인지 모르게 그 말을 듣고 울음이 터졌다. 그런 사상과 심정까지 헤아릴 필요가 없다하여도 저 나이든 시민이 가지는 쓸쓸한 마음과 섭섭함을 알지 못하는 정치가는 결코 인간적일 수 없다.
작년 6월부터 준비해 내가 살고 있는 마포구에서 작은 정치독서회를 하나 운영하고 있다. 이제 다섯 번째 책을 함께 읽고 있다. 10명도 안 되는 정말 자그마한 모임이지만 그 안에 꽤 다양함이 자리 잡고 있다. 20대부터 60대까지, 학생부터 직장인과 은퇴자. 인류학이나 철학을 공부하는 이와 금융과 IT를 다루는 일부터 언론 또는 의회나 부처에 관여하는 일을 하는 사람까지 모두 평소의 삶에서 보다 주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나 관점이 다를지라도 우리 정치가 좀 더 좋아지길 바라면서 모여 공부하고 있다.
나와 우리는 느낀다. 경험하거나 감각하지 못했던 다른 생각과 감정들이 대화를 통해 서로 부딪히거나 연결되었을 때, 단단함과 유연함이 동시에 단련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을 하게 된다. 아주 대단한 정치학적 소양이 단번에 커지진 않더라도, 정치와 민주주의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그 작은 근육을 만드는 일은 때로 벅참을 준다. 그리고 또다시 보통의 세계로 돌아가 피곤한 하루를 견디게 하는 원료가 되기도 한다.
정치가 되찾아야 할, 정치로 되찾아야 할
나는 이 작은 공부모임을 통해, 한국사회에 오래 자리 잡고 있는 '능력주의'가 얼마나 약한 사람들의 삶을 더 궁핍하게 만드는지, 모든 답을 다 알고 있는 듯이 평가하고 재단하며 적대하는 말싸움은 결코 설득과 변화의 재료가 될 수 없음을 다시 배운다. 실수하고 화해하고, 사과하고, 용서할 수 있는 일이 사소하나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느끼고, 동시에 한국정치가 파산해버린 그 실력에 대한 안타까움이 커진다. 시민의 권리와 안전을 볼모로 권력 찬탈을 위해 일으킨 쿠데타를 용서하자는 단순한 의견이 아니다. 그것을 옹위하며 정치분열을 심화시킨 정치인이 사과하면 무조건 받아주자는 한가한 생각은 아니다. 다만 정치가 나빠지면 시민의 삶은 더욱 가혹해지기 마련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93년에 냈던 자서전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정치는 언제나 양면성을 갖습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 악하거나 불결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치 자체가 악하거나 불결하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중략) 우리 사회의 부패를 척결할 수 있는 것도 정치입니다. 억압하는 것도 정치이지만, 그 억압을 몰아내고 자유를 회복하는 것도 정치입니다. (중략) 정치는 흙탕물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의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같은 사람이 이런 말을 자서전에 남겼다. 현대를 사는 대부분은 그가 얼마나 고생스러운 인생을 살았는지 모를 수 없다. 정치를 좀 안다면, 한다면 대부분 존경한다고 꼽는 정치가의 말로부터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날 저녁, 우리동네 나무그늘에 모여
윤석열의 퇴장으로 하루를 시작한 4월 4일,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엔 동네 친구들과 우리동네나무그늘 협동조합의 '슬금슬금'에서 모였다. 새로 취업을 했다는 이와 그를 축하하는 동료가 맥주를 사고, 이번 광장에서 가수로 데뷔한 친구들은 노래를 불러주었다. 저마나 지난 겨울이 얼마나 추웠는지 또 얼마나 대단한 경험이었는지 각자 조금씩 다르지만 느꼈던 마음들을 소소하게 나누며 위로했다. 이제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앞으로를 살아가야 하는지, 과연 다음 대통령과 선거가 내 삶과 우리 마을을 더 풍요롭게 할 것인지 걱정하는 말들도 오고 갔지만 다시 이곳에 모여 웃으며 대화할 수 있음에 작지 않은 안도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겨울잠에서 깬 기분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렸던 산불이 지나간 시간과 하루아침에 집을 잃고 전국적인 사기사건의 피해자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삶의 시간, 사랑하는 존재를 마음에 묻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 사라지지 않는 성폭력과 성차별 속에서 여전히 씻지 못한 고통을 품은 시간, 기둥 끝에 매달려 복직을 말하는 노동자의 시간, 자신의 선의와 무해함을 늘 증명해야만 하는 수급자 또는 이주민의 시간처럼 다시 가꾸고 돌보아야 할 민중의 삶의 시간이 있다.
이미 많이 늦어버린 일도 적지 않다. 앞으로 열리는 선거의 시간은 이 시간을 먼저 앞다투어 선점하려는 정치의 노력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무엇이 그것의 첫 번째 행보가 되어야 할까. 전세사기특별법 유효기간을 연장하는 일부터, 이제는 발의조차 미뤄지고 있는 차별금지법까지 의회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내란 극복이고, 헌법 수호이며, 적폐 청산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