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책이 나왔습니다'는 저자가 된 시민기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저자 혹은 편집자도 시민기자로 가입만 하면 누구나 출간 후기를 쓸 수 있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우리 아이들과 슬기를 머금은 우리말 단비를 맞고 싶어서 최근 책을 펴냈다. 내가 쓴 <생각이 깊어지는 열세 살 우리말 공부>이다. 글을 몰라 억울한 일을 겪는 백성들이 안타까워 소리를 묶어낸 세종 임금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나올 수 없었을 책이다.
나는 어려서 몸이 아파 중학교 1학년을 네 해에 걸쳐 세 번 다니다가 만 일흔 살이 넘은 사람이다. 한자나 영어를 잘 몰라 우리말을 곱씹다 보니, 뜻글자라는 한자보다 소리글에 담긴 우리 말결이 뜻을 헤아리기 더 쉽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이 깊어지는 열세 살 우리말 공부/ 앞뚜껑 ⓒ 원더박스
이 바탕에서 요즘 우리 아이들이 문해력이 떨어져 문제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이들 문해력을 탓하기에 앞서 아이들에게 우리 말과 글을 제대로 가르쳤는지 짚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버스와 지하철을 환승 하게 되었을 때 중학교 3학년쯤 되어 보이는 학생들을 본 적이 있다. 셋이 버스에 오르다가 한 학생이 "야, 환승이 뭐냐?" 하고 물었다. 이어 타던 학생은 "몰라. 너는 아니?"하며 따라 타는 다른 아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 학생도 "나도 몰라."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갈아탄다는 말이야."라고 하자 "에이, 그럼 '갈아탑니다'라고 하지."라며 툴툴댔다.
책은 이런 학생들을 위한 것이다. 한편, 이번에 헌법재판소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파면하면서 쓴 선고문의 말들이, 딱딱한 법률용어가 아닌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을 써서 여러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줬다. 쉬운 말이 지닌 힘을 새길 수 있는 좋은 글월이었다고 본다.
글을 이토록 쉽고 결 곱게 쓸 수 있는 힘은 두 가지가 있다. 말을 하는 까닭은 내가 품은 뜻을 남에게 잘 알리려는 데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우리 말과 글이 지닌 맛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어려서부터 우리말에 담긴 뜻을 잘 새기고 다져서 말과 글을 참답게 쓸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헌법재판소는 4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을 선고한다. 윤 대통령을 파면하거나 직무에 복귀시키는 헌재 결정의 효력은 재판장이 주문을 읽는 즉시 발생한다. 사진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앉은 정계선, 문형배, 정형식, 김복형, 조한창, 정정미 헌법재판관, 윤 대통령, 이미선, 김형두 헌법재판관 ⓒ 연합뉴스
그러면 고구마 넝쿨을 들어 올리면 고구마가 줄줄이 달려 올라오듯이 우리말은 낱말 하나를 집어 올리면 닮은 말들이 줄줄이 달려 나온다. 이를테면 튼튼하다는 든든하다는 말이 더 세진 것이고 탄탄하다는 단단하다는 말이 더 세진 말이다.
밥을 든든하게 먹거나 겨울에 옷을 든든하게 입으면 몸을 튼튼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맞춰 운동하면 몸이 단단해지고 꾸준히 하면 탄탄한 몸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조금만 곱씹어보면 든든하다와 단단하다가 사촌 간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하나를 알고 나면 어렵지 않게 이어지는 다른 말뜻을 새길 수 있었다는 말씀이다.
말에 담긴 뜻을 풀 열쇠를 찾은 것이다. 이 열쇠를 우리 아이들과 함께 나누면 좋겠다 싶어서 심심할 때마다 그런 말들을 길어 올려 이리저리 다듬다 보니 책 한 권이 묶였다. <생각이 깊어지는 열세 살 우리말 공부>, 400쪽이 넘치도록 쓴 글을 다듬고 다듬은 끝에 130쪽으로 가붓하니 줄였다. 얇아도 깊이 있는 책을 꼭 빚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방끈이 짧은 내가 아주 커다란 잘못을 하지 않고 한평생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열 살 안팎에 배운 도덕에서 받은 힘이 컸다.
그래서 내가 살아오면서 얻은 적은 슬기나마 이 또래 아이들과 나누고 싶어서 <10대를 위한 내 말 사용 설명서>, <벼리는 불교가 궁금해>, <한글꽃을 피운 소녀 의병>과 같은 책을 펴냈다. <생각이 깊어지는 열세 살 우리말 공부>도 그 흐름 가운데 한 줄기이다. 이 책에서 다룬 낱말은 다음과 같다.
결 / 꿈틀꿈틀 / 남 / 넉넉하다 / 더, 덜, 덤 / 돈 / 동무 / 든든, 튼튼, 단단, 탄탄 / 말 / 맹 / 먼지 / 밉다 / 반기다 / 비로소, 마침내 / 빛, 볕 / 사랑 / 살 / 살림살이 / 생각 / 어, 아 / 열심, 한심 / 울음 / 이름 / 일 / 있다, 없다 / 저절로, 스스로 / 참, 거짓 / 처음 / 한가위 / 힘껏
말에 담긴 뜻만이 아니라, 말을 따라가며 생각을 넓히는 얼개도 담아냈다. 이 가운데서 몇 마디 꺼내어 나눈다.
"남은 '나를 받쳐 주고 나를 북돋아 주는 사람'이라는 뜻을 담은 말 아닐까 하고 생각하지.
…프랑스에는 이런 속담도 있대. '네가 누구인지 알고 싶으냐? 그럼 네가 뭘 먹었는지, 누구를 만나서 무슨 말을 듣고, 뭘 읽었는지 알려다오. 그러면 네가 누구인지 알려 주마.' 나는 내가 아닌 남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야."- <생각이 깊어지는 열세 살 우리말 공부> 18쪽
"나는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눈물처럼 어리어 오르는 것이라고 여겨. 밤이 낮으로 바뀔 때 느닷없이 어둠에서 밝음으로 넘어가지 않고 시나브로 희뿌옇게 바뀌면서 아침이 밝아오듯이, 꽃이 급작스럽게 활짝 피지 않고 몽글몽글 몽우리가 맺히면서 천천히 벌어지듯이, 돌다리도 두드리는 마음으로 그 사람 마음이 어떤지 살펴보며 천천히 다가가야 그 사람도 내 마음을 헤아리면서 내 뜻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서로 다가서면서 좋은 느낌이 거듭 이어지면서 서로 아끼는 마음이 어리어 오르다가 무르익어야 사랑이 활짝 피어나지."- <생각이 깊어지는 열세 살 우리말 공부> 74~75쪽

▲생각이 깊어지는 열세 살 우리말 공부결에서 겨레와 겨를이 나온다. ⓒ 원더박스
"그런데 아니? '한심'이 빠진 '열심'은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열심은 더울 열(熱)과 마음 심(心)이 모여 이룬 낱말이야. 무언가를 부지런히 하느라 마음이 땀이 날 만큼 데워졌다는 뜻이지.
…감기에 걸린 적 있지? 감기에 걸려 체온이 1도나 2도만 높아져도 몸이 펄펄 끓고 머리가 아파서 견디기 어렵잖아. 그럴 땐 어떻게 해? 병원에 가서 열 내리는 주사를 맞고 해열제도 받아 먹지? 얼음찜질도 하고.
…마음도 몸과 마찬가지야. 무엇을 하느라 뜨거워진 마음에도 소나기가 내리고 밤이 와야 해. 나는 그 소나기와 밤이 한심이라고 생각해. 한심은 차가울 한(寒)과 마음 심(心)이 모여 이룬 낱말로, 뜨겁게 달아오르던 마음을 서늘하니 식힌다는 뜻이야."
- <생각이 깊어지는 열세 살 우리말 공부> 92~93쪽
나는 짧지 않은 세월 우리말을 새겨 왔다. 그래도 아직 모르는 말이 적지 않다. 아는 줄 알고 썼는데 알고 보니 어긋났다는 것을 알고 놀란 적도 흔하다. 그런데 알고 하는 말과 잘 모르고 하는 말은 다르다. 하늘과 땅만큼이나. 내가 하는 말에 무슨 뜻이 담겼는지 알면 품은 뜻을 또렷하고 틀림없이 알릴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사전하고 무척 가깝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거나 글을 쓰면서 이 낱말이 얼마나 품이 너른지 얼마나 깊이 있는 뜻을 담았는지 사부작사부작 이 사전 저 사전을 오가면서 들춰 보곤 하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뜻을 찾아내고는 빙긋 웃기도 한다. 그러면서 우리 말결에 생각이 깊어지는 열쇠가 있다고 생각했다.
가만가만 살살 더듬어가다 보면 우리말에는 살면서 겪는 어려움을 풀어 줄 숨겨진 열쇠가 아주 많다. <생각이 깊어지는 열세 살 우리말 공부>는 열세 살 무렵 이 열쇠를 찾기 시작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이끌어 펴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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