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미경 소설가의 <한승원 문학연구>(문학들, 2024년) ⓒ 안준철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는 것은 머릿속에 있는 어둠 감지 기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불은 빛을 필요로 하는 자, 잠들어 있지 않고 깨어 있는 자, 어둠을 인식하는 자가 밝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불, 모든 빛은 어둠을 먹고 산다. 소설도 그러하다. 소설은 소설가가 어둠을 감지한 결과 만들어낸 빛이다. 소설가는 어둠을 감지하는 한 소설을 쓰지 않을 수 없다."
<한승원 문학 연구>(문학들, 2024년)는 정미경 소설가의 박사 논문을 좀 더 다듬은 연구서이다. 위 제시문은 <한승원 중단편 전집 1~6> '작가의 말'의 일부로, 책머리와 본문에서 두 번 인용된다. 한승원 소설가를 스승으로 모셔 온 정미경은 "이것이 선생님 자신에게 한 말이면서 내게도 주문한 말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작품 목록을 정리하면서 평생을 소설 쓰는 일을 하면서 어둠을 감지하고 빛으로 화하는 일을 하며 살아오신 선생님에 대한 경이로움과 존경심이 절로 일었다"고도 책에 적었다.
'어둠을 감지하는 한 소설을 쓸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주는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의 아버지로 잘 알려지기도 한 한승원 소설가는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목선(木船)>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이래 현재까지 창작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고향 바다를 배경으로 여순사건과 6·25전쟁, 군부정권, 5·18민주화운동 등 근현대사의 비극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갯가 사람들의 삶을 다루어왔다.
이 책은 한승원의 '원체험'에 대해 다루고 있다. 원체험이란 작가의 성장 배경과 관련이 있다 하겠다. 먼저 정미경에 의하면, 그동안 한승원에 관한 연구는 그의 수많은 작품에 비하면 미비함을 보인다. 대부분의 논의는 학술지 논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주제에 있어서도 고향과 바다, 신화와 한, 샤머니즘, 생태 등에 편중되어 있다.
정 작가는 "특히 '원체험'에 대한 논의는 없는 실정이어서 전반적인 작품 세계를 조망함에 있어 문학적 기원을 결하는 아쉬움을 남긴다"고 강조한다. 한승원의 원체험이야말로 그의 문학적 근원을 이루며 전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다.
정 작가는 이 책(논문)을 통해 "한승원의 유년기 원체험이 소설화 과정에서 어떻게 형상화되며, 나아가 어떻게 극복되고 확장되는지를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한승원의 원체험은 그에게 콤플렉스로 작용하였으며, 그의 생은 그것의 극복과정이었다. 한승원의 콤플렉스 기원은 아버지이다."(35쪽)
책에 따르면, 한승원은 조상 대대로 키 작은 좀씨 내림이었던 집안에서 유일하게 체구가 컸다. 말수가 적고 어른들의 말에 고분고분 순종하였던 탓에 어머니와 고모들, 두 누님 등 여인들의 사람을 독차지했단다.
하지만 전통적인 조선의 가부장 유형으로 근엄했던 아버지의 눈에는 키만 컸을 뿐 당차지 못했던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거기에다 아버지는 자기를 닮은 한승원의 형을 좋아했다. 소설에서도 그런 유년의 체험들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수 눈방울 굴리는 것 보라고, 남자는 성질이 그렇게 불같은 데가 있어야 하는 것이여. 그래야 당차고 사람들을 휘어잡을 수가 있는 법이여. 한이는 순하기만 하고 성질이 고무줄같이 늘어지고 (…) 한은 억울하고 슬펐다."(89쪽)
한편, 어머니는 한승원이 성장하면서 엄부와 갈등하고 대립할 때마다 그의 편이 되어준다. 아버지가 고등학교만 마치게 한 후 농사짓게 하다가 장가를 들이려 했을 때 대처로 보내 공부시킬 것을 주장한 이도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불구가 되었을 때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동생들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한승원을 공부시킨다.
이런 성장 과정으로 인해 한승원은 아버지만이 아닌 "어머니 콤플렉스"마저 겪게 된다. 무엇이든지 어머니가 원하는 것이면 들어주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어머니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강박은 콤플렉스로 작용했고, 어머니를 "자궁 권력자"로 인식하도록 한다.
작가의 원체험 양상, '물 무섬증과 여성의 생명력'
'바다 소설가'로 알려진 한승원은 뜻밖에도 물을 무서워했다. 한승원의 "물 무섬증"은 다섯 살 때 집 마당에 있는 웅덩이에서 배를 띄우며 놀다가 빠져 사경을 헤맨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물 무섬증은 여성에 대한 인식에도 크게 작용한다. 다음은 정 작가가 한승원을 인터뷰 한 내용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이성과의 성적인 함몰에의 두려움, 가령, 성행위를 할 때 여성의 몸속으로 함몰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나타나 여성을 대할 때마다 경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물 무섬증은 저에게 있어 세상 속에서의 함몰을 두려워하는 의식 같은 것이었습니다."(65쪽)
책의 앞부분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작가 정미경에 머물러 있었다.
정 작가는 한국작가회의 순천지부(순천작가회의)가 태동할 때부터 함께 활동해 온 내 오랜 문우이다. 나는 은퇴 후 고향인 전주로 이사를 왔지만 내 문학적 고향은 순천이다.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내 자가용인 무궁화호 완행열차에 몸을 싣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미경은 한동안 순천작가회의를 떠나 있었다. 주로 시를 중심으로 작품 합평회를 하는 자리에서 시인이 아닌 자신이 설 자리가 마땅치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고 있었던 것도 아닌 터였다.
그 후 정미경은 2004년 <광주매일신문> 신춘문예 소설 부분 당선으로 십 년에 가까운 공백을 훌쩍 뛰어넘어 우리 앞에 나타난다. 소설집 <공마당>으로 부마항쟁문학상 소설 부문을 수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 작가의 작가로서의 고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책 출판기념회가 있던 날 정 작가는 조용한 어조로 그간의 일들에 대해서 자신의 심경을 소상하면서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소설을 쓰면서 늘 감정에 치우쳐 있다는 지적을 받곤 했는데 그걸 극복하고자 대학원에 진학하여 한승원 연구 논문을 쓰면서 이성적 글쓰기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마치고 다시 소설을 쓰고자 했을 때, 이번에는 거꾸로 소설가로 돌아오기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런 고민은 더 이상 안 해도 되겠다, 싶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책은 정미경 작가의 박사 논문을 펴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소설을 읽듯이 재미있게 읽었다. 책을 빨리 일독하고 책 소개를 할 생각이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책에 풍덩 빠진 것이다.
처음에는 한승원의 '원체험'을 추적해 가는 정미경 작가의 글에 빠진 것인데, 차츰 정 작가가 풍부하게 인용한 한승원의 맛깔스러운 언어와 작품의 깊이에 풍덩 빠져버린 거다.
"초여름의 바다는 초반의 알 것 다 알아버린 여자 같았다. 수줍음을 몰랐다. 벗어야 할 때 벗을 줄 알았다. 싱싱한 몸을 잘 굴렸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물너울이 질펀했고 밋밋했다. 초여름의 파도의 굽이는 고왔다."(「돌아온 사람들 2」, (156쪽))
나는 이 책 한 권으로 한승원의 소설을 다 읽어버린 듯한 착각마저 든다.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한국인에게 큰 선물을 해준 한강 작가의 글 수업이 그의 아버지인 한승원의 소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이 책(논문)은 본론에서 '작가의 원체험의 양상', '저항과 극복 대상으로서의 아버지', '세계의 폭력성과 폭력의 구조', '시원적 생명력과 여성성의 이미지', '한승원 소설의 기원으로서의 원체험의 의의' 등에 대해서 논한다. 하지만 한승원이 "남도 갯가"에서 길어 올린 풍부한 언어를 만나는 즐거움과 감동이 내게는 더 컸던 것이 사실이다.
저항의 대상, '사회역사적 차원에서의 새로운 아버지 찾기'
한승원의 아버지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원체험은 그의 작품에서 끊임없이 갈등과 대립, 화해를 반복한다. 그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개인적 아버지에 대한 서사는 사회역사적 차원의 아버지 극복이라는 주제로 나아간다. 그런가 하면, 한승원의 어머니와 누님, 누이, 아기업개 등 여성들에서 비롯된 원체험은 남성들로부터 핍박받는 어머니/여성들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간다.
또한, 한승원의 작품에서 폭력은 초기에서 후기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나타나는데,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폭력은 표면상으로는 개인 간의 충돌로 인해 빚어지는 개별적 폭력 형태를 띠고 있지만, 역사적 사건을 근원으로 한 구조적 폭력이라는 심층적 의미를 띠고 있기도 하다. 다음은 정미경이 이 책의 결론 삼아 쓴 문장이다.
"한승원의 소설은 원체험에 내재해 있는 어둠을 빛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저항이자 극복 과정이었다."(192~3쪽)
국문학 전공자나 소설가가 아니라도 이 책을 권해드리고 싶다. 나의 소중한 벗이기도 한 정미경 작가의 성취와 그간의 노고에 큰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