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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부터 주 1회 어르신들과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싣습니다.
나는 복지관에서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이라는 이름으로 어르신과 글쓰기 수업을 한다.

지난해 9월 초 가을 학기 첫 시간, 어색한 서로를 위해 '키워드 카드'를 작성해 발표한 적이 있다. 자기소개할 때 치매 걸린 남편을 20년간 돌봤다는 분이 계셨다. 2년 전 남편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이제야 자유를 얻어 복지관도 나와봤다는 소개였다. 그런데 그 분이 선택한 키워드는 '행복'이다.

"남편이 57세에 치매가 왔다. 80세에 (돌아)가셨다. 아내로서 20년 간 간병하면서 내 삶은 없었다. 남편이 떠나고 1년이 됐다. 못해 준 게 생각나기도 하지만 날개를 달기도 했다.

수묵화로 행안부 장관상을 받았다. 배드민턴, 스키, 파크골프, 수영, 스케이트, 농구, 배구, 탁구 등 못하는 운동이 없다. 지금은 행복하다." 키워드 : 행복.

글을 읽자 교실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오는 탄식과 한숨. 순식간에 모두의 안타까움을 자아낸 분이었다(관련 기사 : 20년 간병, 한 어르신 글에 여기저기서 터진 한숨 https://omn.kr/2a29o ).

카드를 보며 생각중 즉흥스피치는 어르신들께 생각보다 즐거운 시간이 됐다
카드를 보며 생각중즉흥스피치는 어르신들께 생각보다 즐거운 시간이 됐다 ⓒ 최은영

그러나 그때는 조금 글을 쓰시는 듯하더니, 그 뒤로는 '제가 노느라 바빠요'라는 말만 남기고 쑥스럽게 웃으시며 도통 뭘 쓰지 않으셨다.

그러면서도 수업은 안 빠지셨다. 들어올 때마다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수그리고 과장된 '살금살금' 걸음을 보여주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거 봐요, 사람이 죄짓고 못 산다니까요. 언제 써오시냐고요!" 라며 닦달을 했다. 워낙 쾌활하신 분이라 내 잔소리에도 그저 소녀처럼 킥킥대는 통에 나도 그저 같이 웃었다.

드디어 펜이 움직였다

그런데 이번엔, 수업에서 보란 듯이 종이를 흔들며 들어오셨다. 나는 "어머, 드디어 그 20년이 풀어지는 건가요!" 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르신은 간병일지가 아니고 '신혼일지'라고 하셨다.

일기는 뭔가 감상이 들어가야 하는데 감상까지는 쓸 말이 없어서 사실만 나열했다고, 처음 선 본 날부터 신혼살림 시작까지만 썼다고 하셨다. 어르신은 자꾸만 일기 아니고 일지라는 걸 강조하신다.

소재가 되는 시간 범위를 짧고 깊게 잡으라는 말을 이렇게 또 실천하셨다며, 나는 칭찬을 퍼부었다. 어르신 얼굴이 여고생처럼 맑아졌다.

어르신의 글은 이렇게 시작했다.

"남편은 4월 1일에 귀국했다. 우린 4월 3일에 처음 만났다. 너무 새까매서 처음엔 간첩인 줄 알았다. 보자마자 도망가고 싶었는데, 소개해 준 친구가 돈 관리만 잘해주면 된다는 말에 한 번은 참기로 했다. 돈 관리는 무슨, 나는 시외할머니까지 모시고 살면서 남편 월급봉투 구경도 못했다. 시어머니가 다 관리했다. 두 번 만나고 6월 25일이 결혼식이다. 아, 그날을 어찌 잊으리 나의 운명을."

여기까지 보다가 나는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노래 한 소절을 불렀다. 젊은 선생이 그 노래를 어찌 아냐며 의아해하셨다. 나는 '저 고무줄도 이 노래에 맞춰했는데요'라고 했더니 누군가 '우리 선생님 젊은 사람 아니네'라고 하는 바람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드디어 써오셨다 어르신들은 꼭 이면지를 쓰신다
드디어 써오셨다어르신들은 꼭 이면지를 쓰신다 ⓒ 최은영

쓰신 글의 마무리는 수면제였다. 구구절절 자세히 설명하진 않지만, 일상을 버티는 게 힘드셨나 보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피곤하고 해서 죽고만 싶었다. 약국만 보이면 약을 샀다. 잠이 안 온다고 수면제를 달라했다. 너무 고달파서 수면제를 먹고,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했다."

글을 써온 적은 없어도 남이 써온 글에 적절한 추임새로 웃음을 주셨던 분이다. 그런 분이 수면제 이야기를 하시며 울컥하시니, 그 설움이 더 크게만 느껴졌다.

20년 세월이 주는 울림... 어르신 "안 죽길 잘했죠?"

어르신 말씀대로 감정 표현은 거의 없는 건조한 일지였다. 말로 풀어보시라고 하면 드라마를 얘기하듯 울고 웃고 하시지만, 정작 글에서는 감정이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겪어보니, 일부러 정색하고 하는 절제도 아니더라. 아마도 글로 감정을 풀어본 경험이 없는 세대의 특징이리라.

우리가 직접 살아보지 못한 시간은 그 자체로 낯설고 궁금한 풍경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어르신들이 쓰는 건조하게 나열된 사실들은 오히려 상상과 감정의 여백을 만들어내곤 한다.

글쓰기 수업에 집중하는 어르신들 말이 문장이 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확인한다
글쓰기 수업에 집중하는 어르신들말이 문장이 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확인한다 ⓒ 최은영

심리학에서는 이를 전문용어로 '공감의 투사 작용'이라고 부른다. 명확한 감정 서술이 없을 때, 독자는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빈자리에 끼워 넣으며 더 깊이 몰입하게 된다는 것.

이는 사실 나열만으로도 서사가 되는 이유다. 정제되지 않은 기억이 오히려 더 날것의 힘을 가지는 것도,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나 역시 어르신의 팩트 나열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의 남편은 20년간 아내의 돌봄을 받다가 돌아가셨단다.

기껏 저녁을 준비했는데 남편이 뒤늦게 밥 먹고 온다고 전화하면 짜증부터 났던 나는(1시간 일찍 연락 주는 게 뭐 어려워서 내 노동을 쉽게 부리나 하는 심술이 나서 그랬다), 20년을 돌봤다는 어르신 설명을 들으며 그게 말이 되는 건가 싶었다.

그분은 20년을 한 사람의 삶 속에 고요하게 묻혀서 묵묵히 그것을 감당해 오셨다. 거기에 이러저러한 감정 수식이 붙었다면, 지금 이렇게까지 내게 감동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을 거 같다.

대단한 애정으로 했던 결혼이 아닌데도 그 시간을 감당했다는 자체가 내게는 커다랗게 던져진 물음표 같았다. '사랑보다 의리였다'고 말하셨지만, 그 의리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 나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고통 없이 누리는 자유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고 살아온 나를 저절로 돌아보게 된다.

어르신은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때 안 죽길 참 잘했죠? 후후."

그 말이 장난처럼 들렸지만, 어쩐지 박수를 보내드려야 할 거 같았다. 다들 당연하지, 하면서 그분 등을 토닥이셨다.

삶은 어쩌면 견디고 나서야 비로소 이야기로 남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이걸 오래 기억해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날이었다.

덧붙이는 글 | 어르신께 이야기를 공개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 기사는 개인sns에도 실립니다.


#내인생풀면책한권#복지관글쓰기#시니어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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