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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봄바람이 간지럽다. 홍주 가는 길이 뭔지 모를 신명에 살짝 달뜬다. 희망, 새로움, 설렘 같은 정취는 봄이란 계절의 전유물일까. 길에서 풍운아 허균(許筠)이 떠오른다. 내자시정에 임명된 1607년, 홍주목사에 오르려 요로에 청탁했던가 보다. 홍주 출신인 스승 이달(李達)의 영향이었을까.

예로부터 글 잘하는 이의 몫이었으니, 자부심 가득한 그도 내심 기대가 컸던 모양이다. 하지만 벗 '이안눌'의 차지였고, 허균은 부끄러움에 시 한 수를 남긴다.

홍주 고을은 예로부터 글 잘하는 신하를 불러 썼으니 洪州自古用詞臣(홍주자고용사신)
시인 소세양과 정사룡 이름이 그중 가장 뛰어났네. 蘇鄭詩名最絶倫(소정시명최절윤)
검은 인 끈이 오늘 아침 이안눌에게 돌아갔으니 黑紱今朝歸子敏(흑불금조귀자민)
자잘한 재주는 처음부터 남들보다 못하다네. 謏才元是不如人(소재원시불여인)
乞洪陽不得而子敏爲之(걸홍양부득이자민위지) (허균평전. 허경진. 돌베개. 2002. p210)

얼마나 살기 좋은 고을이었으면 직을 탐냈을까. 탄핵과 모함에 수도 없이 관직에서 쫓겨나기를 되풀이했어도, 홍주목사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만은 시로 남겼으니 말이다.

홍성 나들목을 벗어나자, 졸린 봄 햇살이 아지랑이를 피워올리는 와룡천 건너로 기와집이 번듯하다. 4월 햇살에 검은 지붕 선이 돋보이고, 낮은 산에 기댄 집에선 강한 기운이 뻗쳐온다. 그런데 남향이 아닌 북서향이라니?

김좌진 장군 생가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와룡천 변에 북서향으로 앉은 김좌진 장군의 생가. 서해안 고속도로 홍성 나들목 부근이다.
김좌진 장군 생가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와룡천 변에 북서향으로 앉은 김좌진 장군의 생가. 서해안 고속도로 홍성 나들목 부근이다. ⓒ 이영천

이곳은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항일무장투쟁의 본산이다. 19세기 조선을 뒤흔든 안동김씨 세도가 저 지붕 선에 아직도 남아 있을까? 어린 시절 노비를 해방하고 전답을 나눠줬다는 김좌진 장군 생가다.

인조반정을 일으키고 병자호란 때 강화성이 함락되자 자결한 김상용의 11대손이다. 내포 지역이 올곧은 보수의 본향이란 사실을 저 검은 기와가 묵언으로 알려주는 듯하다.

오늘날 타락한 그런 극우와는 차원이 달랐다. 나라를 구하려는 일념에 재산과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질서와 법률, 전통과 정의를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긴 '참 보수'였다.

김복한 선생 묘소와 사당 홍성 서부면 이호리에 김복한 선생의 묘소가 있다. 그 아래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사당(추양사)을 세웠다.
김복한 선생 묘소와 사당홍성 서부면 이호리에 김복한 선생의 묘소가 있다. 그 아래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사당(추양사)을 세웠다. ⓒ 이영천

김좌진은 조카뻘인 김복한에게 글을 배웠다. 김복한이 누구던가? 죽으면서 '일본의 패망을 알려달라'는 유언을 남긴 지사다.

을미 의병과 여하정

홍주아문을 지나면 동헌 안회당이다. 동헌 뒤 네모난 연못 안에 네모난 섬이 있고, 그 위에 육각정이 섰다. 절로 시흥이 돋는 여하정(余何亭)이다.

홍주아문 홍주읍성 치소(治所)인 동헌으로 드는 삼문. 뒤로 홍성군청과 군의회가, 그 뒤로 동헌 안회당과 연못 속 정자인 여하정이 있다.
홍주아문홍주읍성 치소(治所)인 동헌으로 드는 삼문. 뒤로 홍성군청과 군의회가, 그 뒤로 동헌 안회당과 연못 속 정자인 여하정이 있다. ⓒ 이영천

나라가 풍전등화이던 1896년 이승우가 세웠으니, 나라의 앞날과 백성의 안위를 걱정한 우국충정이 이름에 서렸을까? '나(余)는 어찌(何)할 것인가?'라는 매우 철학적인 뜻을 담은 이 정자는 그러나, 이름에 걸맞진 않았나 보다.

승지였던 김복한의 낙향은 동학혁명이 배경이다. 청일전쟁과 조선을 악용할 명분을 찾던 일본이 1894년 7월 경복궁을 점령한다. 꼭두각시 정권을 내세워 개혁을 강요하며 내정을 쥐락펴락하자, 분개한 김복한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것이다.

이듬해 왕후가 일본 낭인에게 살해당하고, 뒤이어 단발령이 시행된다. 상투를 자르라는 말은 선비들에게 목숨을 내놓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우국지사이던 김복한이 의거를 일으킨다. 1차 홍주 의병이다. 무장봉기였으되, 홍주성을 손쉽게 함락한다. 1896년 정월 초하루 수백 의병이 무혈입성한다.

이어 정월 대보름과 이튿날 청양과 정산 등지에서 각 수백 명이 합류함으로써 기세를 올린다. 김복한이 대장으로 추대된다. 홍주목사 이승우도 김복한의 설득에 의병에 합류, 그야말로 민관이 하나가 되어 일본군에 맞선 셈이다.

여하정 1896년 홍주목사 이승우가 세운 연못 속 육각정자 여하정(余何亭). 그의 행위는 이 철학적 의미의 정자 이름에 걸맞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정 반대였을까?
여하정1896년 홍주목사 이승우가 세운 연못 속 육각정자 여하정(余何亭). 그의 행위는 이 철학적 의미의 정자 이름에 걸맞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정 반대였을까? ⓒ 이영천

그런데 이는 속임수였다. 이승우가 배신하여 순검대를 끌어들인다. 김복한 등 의병 주요 인물들을 체포, 투옥함으로써 결국 강제 해산당한다. 이런 관리가 나라를 위해 어찌할까를 고민했다고 생각들지는 않는다. 그에겐 모름지기 자신의 안위가 우선 아니었을까?

고종실록 1896년 4월 9일 기사에 김복한을 비롯한 홍건·이상린·송병직·안병찬·이설을 벌하자는 법부 의견에, 고종은 특별사면하여 방면하는 아량을 보인다.

서문 수로, 조양문과 병오 의병

고을 위상에 어울리는 성문의 위용이다. 그로부터 10년 후, 나라는 누란의 지경에 빠져버린다. 을씨년스런 그해(1905) 외교권이 강제로 일제에 찬탈당한다. 을사늑약이다.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발각되어 김복한을 비롯한 지사들이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한다. 이 고문으로 김복한은 평생 불구로 살아야만 했다.

조양문 홍주읍성 동문인 조양문. 홍주목의 위상에 어울리는 자태와 위용이다. 1906년 병오의병 때 일본군의 극악한 포격이 이뤄진 곳이기도 하다.
조양문홍주읍성 동문인 조양문. 홍주목의 위상에 어울리는 자태와 위용이다. 1906년 병오의병 때 일본군의 극악한 포격이 이뤄진 곳이기도 하다. ⓒ 이영천

을미사변 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또 다른 지사가 있었다. 가산을 털어 무기를 마련한 민종식이다. '광수장터 봉기'라 부르는 몇 번의 홍주성 공략에 말미를 찾지 못한다. 무기 열세를 느낀 그는, 소수 병력의 거사로는 불리하다는 걸 깨닫는다.

홍주의병 진행도 제2차 홍주의병(병오의병)을 개괄한 현황도. 세세한 기록을 통해 당시 의병의 절박함과 견결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홍주의병 진행도제2차 홍주의병(병오의병)을 개괄한 현황도. 세세한 기록을 통해 당시 의병의 절박함과 견결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 이영천(홍주성역사관_촬영)

1906년 4월 보령 홍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전라도 여산·진안·장수·용담·무주 등을 돌며 병력을 모은다. 기세를 몰아 청남·서천·남포·보령 등을 점령하며 홍주로 향한다. 홍주 남산에 이르러 5천 의병이다.

일본군이 지키던 홍주성을 공략한 날이 5월 19일 장날이다. 성문이 굳게 닫혀 공격이 여의치 못했다. 이에 날랜 의병 셋을 서문 수로를 통해 잠입시킨다. 이들이 안에서 성문을 열자 성이 함락된다. 그러나 성안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이미 달아나고 없는 상태였다.

서문 수로 1872년 지방지도에 수문(水門)으로 표시된 서문 수로. 이 수문을 통해 날랜 3명의 의병이 성안으로 잠입, 성문을 열어젖힘으로써 의병이 손 쉽게 읍성을 함락할 수 있었다.
서문 수로1872년 지방지도에 수문(水門)으로 표시된 서문 수로. 이 수문을 통해 날랜 3명의 의병이 성안으로 잠입, 성문을 열어젖힘으로써 의병이 손 쉽게 읍성을 함락할 수 있었다. ⓒ 이영천

성을 함락시킨 민종식은 부대를 재편하여 적의 반격에 대비한다. 일본군이 이튿날부터 공격을 개시한다. 28일까지 여섯 차례다. 소총과 화승총의 싸움이다. 월등한 화력의 일본군에 맞서 열흘 가까이 성을 지켜낸다.

당황한 일제는 한양에서 1개 대대를 급파한다. 첨단 무기인 기관포와 폭약, 기마대까지 딸려 보낸다. 5월 31일 새벽 2시 30분, 일본군이 조양문에 폭탄을 터트리고, 시가전이 벌어진다. 성안이 쑥대밭으로 파괴된다. 날이 밝은 7시 30분까지였다 하니, 의병의 분전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일천여 명이 학살당하고 수백 명이 포로가 된다. 홍주성의 이 싸움은 1907년 이후 들불처럼 일어난 전국적 항쟁의 불씨였다. 1909년 일제가 잔악한 살육을 벌인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이어진다.

어느 식목일, 학생들이 나무를 심는 과정에서 당시 사상자 유해가 발견된다. 이들 유해를 모아 만든 의사총이 읍성 가까운 언덕에 자리한다. 전투 후 사상자들을 흙으로 덮었음이 밝혀진다. 참으로 잔인한 족속이다. 죽지 않은 부상자도 적잖이 생매장되었을 터다.

병오항일의병기념비 읍성 안에 이완용이 일본군을 찬양하는 비석을 세운 자리에 그 비를 허물고, 백성들이 뜻을 모아 세운 병오의병 기념비.
병오항일의병기념비읍성 안에 이완용이 일본군을 찬양하는 비석을 세운 자리에 그 비를 허물고, 백성들이 뜻을 모아 세운 병오의병 기념비. ⓒ 이영천

이때 일본군을 찬양하는 비석을 이완용이 읍성에 세운다. 현명한 백성들이 그 비석을 허물고 의병을 기리는 비석으로 바꿔 놓는다. 대마도에 끌려간 9인의 의병 대표자들이 갖은 고초를 겪다 4년 만에 가까스로 석방된다.

홍주를 격하?

가야산과 삽교천 중심인 내포가 어떤 곳인가? 곧은 절개와 굳은 의리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추상같은 기세로 학문과 시서화에 매진한 추사 김정희가 있다. 사육신 성삼문이 최영 장군과 같은 마을에서 태어난 전설 같은 곳이다.

윤봉길과 김좌진은 무장봉기로 항일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쳤다. 불교발전은 물론 독립과 우국으로 한 생을 살다 간 한용운은 어떠한가?

홍주읍성 전경 많은 부분 옛 모습을 찾아 가는 홍주읍성 전경.
홍주읍성 전경많은 부분 옛 모습을 찾아 가는 홍주읍성 전경. ⓒ 국가유산청

내포신도시 북쪽은 예산, 남쪽은 홍성으로 행정구역이 둘로 갈린다. 따라서 이곳 신도시 명명에 많은 고심이 있었으리라. 수백 년 만에 홍주로 도청을 옮겨오는 일이니 더욱 그랬을 터이다. 가야산에서 덕숭산, 다시 용봉산으로 이어지는 빼어난 산세를 신도시가 고스란히 받아 안았다.

흔히 홍주와 결성에서 한 글자씩 빌어 홍성이 되었다고 말한다. 공주와 일본어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홍성으로 바뀌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는 차분하게 살펴야 한다. 조선의 지방 관제 중 州(주)가 붙은 지명은 부윤·부사·목사가 파견되는 부나 목이 통상적이다. 충청도엔 청주·충주·공주·홍주가 있었고 이들 도시에 번갈아 충청감영이 설치되었다.

일제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홍주 일부를 청양에 떼어주고, 이름을 홍성으로 바꾼다. 하지만 전국 어디도 이름에서 州가 빠진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네들의 행정편의를 뛰어넘어, 식민체제에 강력히 반발한 홍주의 저항정신과 항일의식을 말살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이름이 곧 지역이고, 지역이 곧 정신이니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홍주읍성(1872년_지방지도_부분) 실제는 남북으로 긴 홍주읍성을, 관청 위주로 표현하면서 동서로 길게 그려졌다 홍성천과 월계천이 남북에서 해자 역할을 하고, 성안으로 물줄기가 흘렀으나 지금은 메워졌다. 합수한 이 물줄기가 삽교천으로 흐른다. 지도엔 남문이 없으나, 발굴 결과 유적이 있어 복원하여 '홍화문'이란 편액을 달았다.
홍주읍성(1872년_지방지도_부분)실제는 남북으로 긴 홍주읍성을, 관청 위주로 표현하면서 동서로 길게 그려졌다 홍성천과 월계천이 남북에서 해자 역할을 하고, 성안으로 물줄기가 흘렀으나 지금은 메워졌다. 합수한 이 물줄기가 삽교천으로 흐른다. 지도엔 남문이 없으나, 발굴 결과 유적이 있어 복원하여 '홍화문'이란 편액을 달았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웅장한 홍주읍성이 그나마 제 모습을 찾아가는 중이다. 옛 지도엔 없는 남문을 가파른 언덕에 세운 뜻도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대나무처럼 곧은 절개와 의리, 충의가 오래된 성벽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오래된 성 돌이, 따스한 봄볕에 더욱 도드라져 보이고 있었다.

#을미의병#병오의병#김복한#민종식#홍주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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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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