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안함 앞에 앉은 엄마는 딸이 즐겨쓰던 모자를 쓴 채 흐느꼈다. ⓒ 소중한
12.29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딸 박예원씨를 잃은 이효은씨는 매일 아침 추모관으로 향한다. 딸이 좋아하던 커피와 케이크를 양손에 사들고서.
지난 3월 25일 오전, 어김없이 광주에 있는 추모관을 찾은 이씨를 만났다. 그는 딸 예원씨, 함께 여행을 떠나 같이 세상을 떠난 이민주씨, 그리고 또다른 동갑내기 희생자의 유골함 아래 커피와 케이크를 내려두고 한참을 머물렀다.
"이 추모관에 같은 비행기 타신 분들이 좀 있거든요. 옛날 어른들 말씀이 같이 죽으면 영원히 같이 다닌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추모관에 오면 항상 (다른 고인들도) 같이 보고 가고, 같이 잘 지내달라고 해요."
"내 안에 지구가 멸망했다"

▲엄마는 예원씨를 "친구 같은 딸"이라고 소개했다. ⓒ 소중한
2000년 12월 25일생인 예원씨는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엄마에게 왔다. 그런 엄마가 마지막으로 딸의 모습을 본 건 2024년 12월 25일이었다. 스물넷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딸에 대해 말하면서 엄마는 울음을 토했다.
"예원이가 태어난 날에 광주에 대설주의보가 있었어요. 그날 눈이 엄청 왔거든요. 그런데 1월 7일 발인을 하는 날도 대설주의보가 있었어요. 이제는 눈만 보면 가슴이 미어져요. 크리스마스가 생일이라 아침에 케이크를 먹고 오후 비행기로 (방콕에) 보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사고가 나고서는 (손상된 유해를) 엄마들은 보지 말라고 해서 못 봤거든요. 저는 계속 기도해요. 시간여행자를 만나서 예원이가 생일날 (여행을) 떠나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전해달라고."

▲엄마가 쓴 편지는 항상 "예원아"로 시작한다. ⓒ 소중한
엄마의 노트는 딸에게 쓴 손편지로 가득차 있다. 서두는 항상 "예원아"로 시작한다.
"예원아, 내 안의 지구가 멸망했는데 세상은 그저 무탈하게 돌아가는구나. 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그날에 내게 온 예원. 스물넷의 생일날 얼굴 본 게 이 생의 마지막이었다니 원통하고 원통하다."
딸을 갑작스러운 참사로 잃고 엄마는 한 달 뒤에는 시아버지를 잃었다.
"예원이가 가고 두 달 있다가 예원이 할아버지가 가셨어요. 그래서 예원이 (추모관 유골함) 위가 예원이 할아버지세요. 예원이 사고 소식 듣고 충격받아 쓰러지셨어요. 다시 못 일어나고 돌아가셨어요."

▲손녀의 참사 소식을 접한 할아버지는 이후 병을 얻어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손녀와 할아버지의 봉안함은 위아래 나란히 자리해 있다. ⓒ 소중한
첫 공연 마치고 세상 떠난 "친구 같은 딸"
엄마는 추모관에 오면 휴대폰으로 예원씨의 첼로 연주 영상을 틀어둔다. 인근 대학서 첼로 전공으로 음대를 졸업한 딸은 3인으로 구성된 여성음악팀 '아이리스'의 첫 공연을 마치고 세상을 등졌다. 음악 학원에서 학생들에게 첼로를 가르치면서, 머지않은 미래에는 중국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첼로를 가르치고자 새벽까지 중국어 공부에 매진하던 딸이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요. 우리 딸이 살아서 돌아온다면 밤이고 낮이고 여기 와있을 텐데, 여기 있으면서도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아직도 예원이 방에 가면 예원이가 이불 뒤집어 쓰고 자고 있을 것 같고, 잠옷 바람으로 나와서 강아지들 간식 챙겨줄 것 같죠. 왜 (여행에 갔다) 안 오는지 모르겠어요."

▲엄마는 여행지에 도착한 직후 딸이 보낸 사진을 내보이며 잠시나마 옅은 미소를 내보였다. ⓒ 소중한
엄마에게 예원씨는 "친구 같은 딸"이었다.
"옷을 샀는데 마음에 안 들면 조용히 제 방에 갖다 놓아요. '뭐야, 이거?' 하면 '응, 엄마 입으라고' 그래요. 편한 친구처럼 늘 옆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마음 놓고 살았나 봐요. 저는 예원이가 너무 예쁘고 아까워서 다치거나 누가 납치라도 할까봐 전화를 많이 했어요. 그러면 투덜투덜 대면서도 어디에 있고 누구랑 있다고 잘 이야기해 주었어요."
엄마는 입고 있던 바지를 가리켰다.
"제가 (지금) 입고 있는 바지도 예원이 것이거든요. 신발도 같이 신고 옷도 같이 입었어요. 늘 내 옆에 붙어있던 껌딱지였는데, 그냥 내 몸 하나가 없어진 것 같아요."
유가족들은 아직도 공항에 있다
2024년 12월 29일 참사 당일, 엄마는 봉사를 하러 광주에서 나주로 차를 몰고 가던 길이었다.
"예원이가 올 시간이 다 됐는데 안 오는 거예요. 전화도 안 받고. 전화를 안 받을 리는 없는데 이상하다 싶었어요. 그런데 제 여동생이 전화가 와서 '언니, 예원이 왔지?' 물어봐요. '아니, 아직 안 왔는데 전화를 안 받는다?' 말하니 (전화기 너머로)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요. '언니야, 지금 공항에서 비행기가 폭발했다'고..."

▲엄마는 매일 딸이 있는 추모관을 찾는다. ⓒ 소중한
엄마는 바로 무안공항으로 향했다.
"도착해서 제가 '아, 이게 잘못됐구나' 느꼈던 것이 소방차가 사이렌을 엄청나게 울리면서 공항으로 들어갔거든요. 그런데 사이렌을 안 울리고 그냥 나오는 게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아..."
엄마는 그날로 '유가족'이 되었다.
"이제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대한민국에 살면, 비행기를 타다가 다치더라도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잖아요. 그거 믿고 타는 거잖아요. 이제 어떻게 믿고 타겠어요."
참사 후 엄마는 "전화를 잘 받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들이 전화해서 '목소리 괜찮네?' 그러면 너무 상처가 돼요. 세상 사람들을 못 만나겠어요. 참사 일주일 정도 후부턴 언론에 (참사 소식이) 거의 노출되지 않아 (유가족이 어떤 상황인지를) 많이 모르고 있어요. 아직도 무안공항에는 우리 유가족들이 있어요."
12.29 제주항공 참사 유가족협의회의 당면한 과제는 진상규명과 피해 구제를 위한 '제주항공 참사 특별법'이다. 특별법조차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채, 유가족은 '참사 후 100일'을 맞고 있다.
[참사 아카이브 - 100일째 수취인불명] https://omn.kr/2cuq6

▲고 박예원, 첼로를 켜는 모습이 너무도 멋있었던 청년. ⓒ 소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