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 교실 (자료사진) ⓒ 연합뉴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
우리 교육 현실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설명하는 비유는 없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도입해도 온갖 편법이 난무하다. 취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는 일이 반복됐다. 문제점을 보완하고 시대정신을 반영하겠다며 정부 출범 때마다 교육과정을 손댔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공교육 정상화를 목표로 도입된 학생부종합전형이 불과 몇 해도 지나지 않아 공정성 시비에 휘말리며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되레 수능의 교육적 가치가 입증됐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심지어 '구관이 명관'이라며 학력고사가 가장 공정한 제도라는 '웃픈' 주장까지 나왔다.
학생부종합전형은 기출 문제 풀이만 반복하던 획일화한 교실을 변혁시킬 더할 나위 없는 대안이었다. 다양한 수업이 시도되었고, 교사들의 효능감이 높아지는 등 '이상적인' 제도였지만, 온존한 학벌 구조에 맞설 힘이 부족했다. 앞서 말한 비유에 빗댄다면, '귤'이었다고나 할까.
나날이 커져만 가는 서울과 지방의 격차에 완고한 대학 서열화와 의치대 열풍까지, 우리 교육은 웬만한 '땜질 처방'으로는 수습할 수 없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대입 제도의 '개혁'은 늘 학교의 혼란만 가져올 뿐이었다. 대입 제도 중심의 교육개혁은 늘 '교육개악'으로 귀결됐다.
학생부종합전형의 실패는 하나의 명징한 사례일 따름이다. 교육개혁의 연이은 패착에도 '교육개악'은 성찰 없이 반복되고 있다. '교육개악'을 또 다른 '교육개악'으로 덮고 있는 모양새다. 오늘도 교사들과 영문조차 모르는 아이들은 '실험용 쥐'가 되어 허둥지둥 일상을 보내고 있다.
지금껏 접하지 못했던 '더 센 놈'이 왔다. 오래전 예고는 됐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속만 끓이다 맞게 된 충격에 전국의 학교가 휘청이고 있다. 일단 시작하고 나면 시간이 걸릴지언정 결국엔 안착하게 될 거라는 생각에서인지, 올해 고1 신입생을 대상으로 전격 시행됐다.
고교학점제, 시작은 했지만...
2022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고교학점제의 도입이 그것이다. 대입 제도에 중점을 두기보다 교육과정을 우선 손댔다는 점에서 예년에 없던 변화다. 외견상 대입 제도가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통째로 쥐고 흔들던 과거와는 달라졌다. 지금껏 교육과정은 대입 제도의 '종속 변수'였다.
고교학점제의 시행 취지는 흠잡을 데가 없을뿐더러 외려 늦은 감마저 있다. 학생 선택 중심으로 개인 맞춤형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학교 간 공동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등 지역사회와 함께 공교육의 다양화를 모색하겠다는 복안이다. 기존의 획일적인 교육에 대한 나름의 극복책이다.
고교학점제는 현행 대학의 학사 운영 방식처럼 지정 학점을 이수해야만 졸업할 수 있도록 한 게 핵심이다. 학년별로 수업 일수만 채우면 진급과 졸업이 당연시됐던 기존의 방식과는 판이하다. 과거 단위 수로 불렸던 교과별 학점의 이수 여부로 졸업의 가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출결 상황만 반영해 온 교육에서 탈피하여 실제 교과별 학업성취도를 기준 삼겠다는 취지다. 다양한 교과를 개설하고 자발적 선택권을 보장하되 스스로 책임감 있게 공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성취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졸업이 애초 불가능한 셈이다.
정부의 도입 취지만 듣는다면, '반박 불가'의 완벽한 제도다. 무너진 공교육을 일거에 회생시킬 수 있는 '도깨비방망이' 같은 느낌도 없지 않다. 정부는 고교학점제의 시행이 아이들의 학습 동기를 자극하고, 진로 설계 역량을 키워 미래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강조했다.
진급과 졸업에 실질적인 학업성취도를 반영함으로써 공교육의 질이 높아질 거라고도 했다. 또, 학교별 교육 격차를 줄이고, 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보장하는 효과도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여러 환경에서 다양한 교과를 공부하면서 융합적 사고 역량도 키울 수 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교육 정책은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연꽃'이 아니다. 온갖 편법이 난무하는 현실을 외면한 정책은 이내 취지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또 다른 편법을 낳게 된다는 점을 우리는 익히 봐왔다. 더욱이 교육 문제는 교육 정책으로만 풀 수 없는 고차방정식이 된 지 이미 오래다.
고교학점제가 막상 시행은 됐지만, 정부는 현직 교사들의 '현실적인' 질문엔 어느 것 하나 똑 부러진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당장 수능과 고교학점제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제도라는 지적이 들끓지만, 조만간 대안을 마련하겠다고만 한다. 그때그때 보완해 나가자는 식이다.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게 한둘이 아니어서, 벌써 고교학점제의 폐지를 입에 올리는 교사들이 적지 않다. 작성해서 제출하라는 관련 서류 더미 앞에서, 이를 교육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잡무'로 여기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미 고교학점제는 '서류만 갖추면 되는' 일로 규정됐다.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제도

▲고등학교 교실 (자료사진) ⓒ 연합뉴스
지적하자면 끝도 없지만, 대표적인 사례 하나만 든다. 고교학점제의 취지를 살릴 가장 중요한 절차인 '최소 성취 수준 보장제도(최성보)'는 현실성이 거의 없어 실패가 예견된 제도처럼 보인다. 이는 교과별로 성취율 40% 이상을 획득해야 학점 이수가 인정되는 제도다.
검정고시의 '과락' 제도와 흡사한 방식으로, 기본적인 학업성취도에 미치지 못하면 미이수로 처리된다. 참고로, 성취율 40% 이상이라는 건, 절대평가 방식으로 100점 만점에 40점을 넘겨야 한다는 뜻이다. 미달 시에는 학교가 보충 지도, 대체 교과 수강 등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현실상 미이수 처리되는 아이들이 적잖이 나올 수밖에 없지만, 미이수 처리되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 된다. 미이수 처리가 되면 대학 입시의 유불리를 떠나 당장 졸업이 불가하다. 이걸 이해 당사자인 아이들 스스로 책임지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교학점제는 이를 학교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다. 모든 아이를 이수 성취 수준에 도달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거다. 언뜻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아니, '특단의 조치' 없이는 불가능한 과제다. 정부도, 학교도, 이를 예측하고 이미 '편법'을 마련해 두었다.
최성보에 따라 학교는 성취 수준에 미도달한 아이들에게 1학점당 5시간의 보충 지도를 별도로 실시해야 한다. 3학점 교과인 한국사의 경우, 학기에 15시간이 확보되어야 하는 셈이다. 보충 지도 시간의 2/3 이상, 곧 10시간 이상 참여하면 법적으로 이수 처리가 된다.
시간 수로 이수 여부를 판단하면, 교육은 '서류 작업'으로 귀결된다. 곧, 1학점당 5시간의 보충 지도는 미이수에 대한 '처벌'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미이수자라는 '낙인'에 반발해 보충 지도에 참여하지 않거나 게을리하는 아이들에 대한 대책이 마땅찮다는 점이다.
여러 과목이 한꺼번에 미도달한 경우도 난감하다. 정부는 주제별 교과 통합 수업을 하면 중복으로 인정된다고 밝혔다. 예컨대, 가사 문학을 공부하며 저자가 살던 시대 상황과 답사 계획을 한데 엮어 수업하면, 국어와 역사, 지리 교과 각각 보충 지도 시간으로 인정된다는 뜻이다.
보충 지도는 대면 수업이 원칙이나 실시간 온라인 원격 지도도 허용된다. EBS 사이트에 교과별 콘텐츠가 있어 강의를 수강하도록 하면 된다는 거다. 이든 저든 편법이 횡행할 수밖에 없는 대책들이다. 이미 보충 지도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거라는 이야기가 만연해 있다.
애초 미이수자를 없애려는 학교의 '편법'도 정부 못지않다. 성취 기준을 준수하되 시험 문항의 난이도를 대폭 낮추고, 수행평가의 비중을 높이는 것이다. 어떻게든 교과별로 40점을 넘길 수 있도록 배려하는 방식이다. 최성보로 인해 학교마다 '내신 점수 퍼주기'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는 최상위권의 변별력 확보를 어렵게 한다. 결국 수능처럼 두세 문제의 '킬러 문항'으로 서열을 정하는 형식을 띨 수밖에 없다. 서열화한 대학 입시가 버티고 있는 한 최성보는 '동그란 네모'를 그리는 일로, 고교학점제는 실패가 예정된 또 하나의 '교육개악'으로 기록될 것이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식의 교육개혁은 이제 멈출 때도 됐다. '판을 갈아엎는 혁명'이 아니라면, 어쭙잖은 정책으로 학교 현장을 들쑤시지 않길 바란다. 그때마다 '편법'을 찾아내는 능력만 향상될 뿐이다. 대체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는' 경험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사족. 학점 이수에 출결은 기본이다. 그런데 반영 절차가 무척 번거롭다. 매시간 스마트폰의 '네이스 플러스(NEIS+)' 앱을 구동시켜 출결을 확인한 다음, 수업 후 노트북을 켜서 네이스(NEIS)에 접속한 뒤 '가져오기'를 통해 결과를 반영한 다음 저장하고 출결 마감해야 한다.
과장 섞인 푸념일 테지만, 출결 마감하느라 정작 수업 준비도 못할 지경이라고 한다. 예년 같으면, 교과별로 출결 확인한 뒤 학급 담임교사가 일괄 마감 처리했다. 출결 확인조차 '잡무'로 만들어버린 정부의 탁상행정에 분노가 치민다. 그들에게 교육은 '행정'의 하위 개념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