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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12:17최종 업데이트 25.03.30 12:17

고추밭 망치는 애벌레를 놓아준 뒤 생긴 일

한국·일본·미국의 자연농 인터뷰한 <불안과 경쟁 없는 이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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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다른 삶을 찾아 나선 젊은이들이 있다. 강수희는 서울에서, 패트릭 라이든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경쟁은 끝이 없고 자연 환경은 계속해서 나빠진다. 기계처럼 일하고 쳇바퀴 도는 삶의 연속이다. 두 사람은 함께 손을 잡고 그 쳇바퀴를 탈출하기로 한다.

도시에서의 삶을 회의하며 귀농·귀촌하거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리틀 포레스트> 식의 이야기는 이미 꽤 접했지만, 이 두 사람의 사연은 조금 독특했다. '자연농'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다큐멘터리 제작을 해본 적도 없었던 두 사람이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4년 동안 한국과 미국, 일본의 자연농 농부들을 만났다. 그렇게 해서 다큐멘터리 <자연농>(Final Straw)을 완성했고, 다큐의 내용을 책으로 옮긴 것이 <불안과 경쟁 없는 이곳에서>(강수희·패트릭 라이든 공저, 열매하나, 2017)다.

 다큐멘터리 <자연농>을 만들고 책 <불안과 경쟁 없는 이곳에서>를 쓴 강수희·패트릭 라이든
다큐멘터리 <자연농>을 만들고 책 <불안과 경쟁 없는 이곳에서>를 쓴 강수희·패트릭 라이든 ⓒ FinalStraw.org

무경운, 무비료, 무농약의 자연농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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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자연농'이란 대체 뭘까? 유기농 비슷한 건가? 솔직히 생소했다. 책 첫머리에 나오는, 한국에 자연농을 소개해 온 농부 최성현 님의 인터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자연농이란 첫째는 땅을 갈지 않는 겁니다. 땅을 갈지 않으면 풀과 벌레, 미생물, 작은 동물들이 이 밭에서 온전히 건강하게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땅은 절로 좋아집니다. 비옥해지고 병충해 피해도 사라집니다. 무비료, 무농약의 길이 열리지요." (<불안과 경쟁 없는 이곳에서> 23-24쪽, 이하 쪽 번호)

땅을 갈지 않는다니? 농사의 기본은 밭을 가는 것이 아닌가? 몇 년 전 작은 텃밭을 가꾸며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쇠스랑으로 밭을 갈아 흙을 뒤엎는 것이었다. 농부셨던 시골 할아버지 댁 마당에는 늘 경운기가 있었다. 그런데 땅을 갈지 않아야 오히려 더 비옥해진다니?

희한한 농사 방식에 호기심과 의문을 품고 책장을 넘겨 가는데, 놀라운 에피소드가 등장했다. 최성현 님이 고추 농사를 짓던 중 거세미나방 애벌레가 나타나 고춧대를 망가뜨리는 일이 있었다. 어머니는 당장 벌레를 잡아 죽이라고 했으나, 아들의 대답은 황당 그 자체였다.

"그러면 안 됩니다. 만약 이 벌레를 죽이면, 친구들이 복수하러 올 거예요. 하나 잘라먹을 걸 수십 개씩 잘라먹을 거예요." (33)

최성현 님은 벌레를 죽이지 않고 길이나 풀숲으로 옮겨 주며 '여기서 잘 살아'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피해가 멈췄다고 한다.

 최성현 님이 자연농을 하고 있는 홍천의 모내기 풍경
최성현 님이 자연농을 하고 있는 홍천의 모내기 풍경 ⓒ Patrick Lydon

하나로 연결된 생명들과 건강한 관계 맺는 일

이 놀라운 에피소드를 통해 '자연농'의 개념을 확장시켜볼 수 있었다. 저자들은 "자연농에는 어떤 고정화 된 개념이 없다"면서도 이 책에 담긴 자연농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자연 및 생명들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것, 나아가 그 연결되어 있는 생명들과 건강한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 (308)

기존의 농업은 땅을 갈아엎는 데서 시작해 농작물이 더 빨리 더 크게 자라라고 비료를 주고, 병충해 피해를 막기 위해 농약을 친다. 자연농의 방식이 '연결'이라면 기존 농업의 방식은 '단절'이다.

현대 농업에서 농작물은 인간과 하나로 연결된 생명이 아니라 제때 출하해 팔아야 하는 '상품'이다. 그러다보니 농작물이 제 속도대로 자라는 것을 기다리지 못해 화학비료를 듬뿍 준다. 벌레들 또한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생명이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에 독한 약을 쳐 죽인다.

하지만 자연농의 관점에서는 풀과 벌레, 미생물, 작은 동물들 모두 온전히 어울려서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시간이 조금 걸릴 뿐, 자연은 인간에게 먹을 것을 주게 되어 있다.

 홍천 자연농 벼논의 아침 풍경
홍천 자연농 벼논의 아침 풍경 ⓒ Patrick Lydon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삶을 찾아서

자연농 한 명 한 명의 인터뷰가 모두 흥미로웠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13년간의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자연농이 된 무라카미 켄지님이었다.

그는 축산사료업체에서 일하며 양계 기술, 경리, 품질 관리, 고객 상담 등의 여러 업무를 맡았다. 달걀을 생산하는 과정을 보면서 '더 이상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내에서 나는 걸 두고 멀리 외국에서 수입해온 사료를 먹이고, 처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닭의 배설물을 태우는 등의 일이 옳지 않다고 느꼈다.

정작 회사를 그만두기까지는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가족들이 반대했고, 먹고 살 일도 걱정이 됐다. 퇴사 전 1년 반 동안은 요코하마의 고층빌딩으로 출근했다. 창문조차 열 수 없는 46층 사무실에서 일하며, 역시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모처럼 이 세상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인생이라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부모님의 반대가 걱정됐지만,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인생을 사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불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결단을 내렸죠." (70)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자연농 가가미야마 에츠코(왼쪽), 무라카미 켄지(오른쪽)와 다큐를 만든 강수희, 패트릭 라이든(가운데 두 사람)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자연농 가가미야마 에츠코(왼쪽), 무라카미 켄지(오른쪽)와 다큐를 만든 강수희, 패트릭 라이든(가운데 두 사람) ⓒ FinalStraw.org

나는 10년 전 서울을 떠나 제주로 왔다. 서울에서의 삶은 빠르고 편리하고 화려했지만, 그것이 꼭 '좋은'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의문을 가질 때가 많았다. 무라카미 켄지님의 표현대로 '납득'이 잘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남들이 다 뛰니까, 영문도 모르고 뛰는 날들이 많았다. 내가 잘 뛰면 잘 뛰는 대로 따라잡힐까 불안하고 못 뛰면 못 뛰는 대로 영영 뒤처질 것이 두려웠다. 제주에 와서는 내 속도에 맞게 숨을 고르며 걷는다.

행복에는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행복은 대형마트 대신 가는 오일장과 농민장터에, 자극적인 배달음식 대신 정성들여 만드는 집밥에, 공공도서관에서 <불안과 경쟁 없는 이곳에서>와 같이 아름다운 책을 발견하는 기쁨에 있었다.

 <불안과 경쟁 없는 이곳에서>, 강수희·패트릭 라이든 저, 열매하나
<불안과 경쟁 없는 이곳에서>, 강수희·패트릭 라이든 저, 열매하나 ⓒ 열매하나

불안과 경쟁 없는 이곳에서 - 자연농이라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의 방식

강수희 & 패트릭 라이든 (지은이), 열매하나(2017)


#불안과경쟁없는이곳에서#강수희#패트릭라이든#자연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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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는 곳이라도 누군가 가면 길이 된다고 믿는 사람. <청춘, 내일로>, <교환학생 완전정복>, <다낭 홀리데이> 등 몇 권의 여행서를 썼다. 2016년 탈-서울, 이후 쭉 제주에서 살고 있다. 2021년 엄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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