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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1 13:50최종 업데이트 25.03.31 13:52

크로스핏에 미친 자는 지치지 않아

[인터뷰]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워킹맘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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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xabay

보라(가명, 35세)는 일주일에 여섯 번, 한 시간 이상 운동을 한다. 10년째 이어온 이 운동은 바로 크로스핏이다. 보라는 크로스핏을 시작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크로스핏 코치 자격증을 따고 다니던 센터에서 코치로 1년간 일하기도 했다. 이사와 임신이 겹치면서 코치 일은 그만두게 되었지만, 새로 다니는 센터에서 37주 차까지 바벨을 들었고 가진통을 느낀 날에도 센터에 가서 몸을 풀었을 정도로 열정적이다. 보라가 '운동을 쉬었다'고 말할 만한 기간은 출산 직후뿐이다.

"아이 낳고 바로 운동하고 싶었는데 당시 코치님이 계속 반대해서 아기 5개월부터 했어요"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기 전에는 남편과 같이 하루에 두 시간씩 운동하기도 했다. 한때 허벅지 둘레가 26인치에 이르렀고(한쪽 허벅지 둘레다!), 국내 대회를 섭렵한 뒤 세계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런 '크친자(크로스핏에 미친 자)' 보라가 최근 일주일에 하루, 많게는 이틀 운동을 빠지고 있다. 일 때문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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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는 지난 11월부터 5개월째 경기도의 신세계푸드 물류센터에서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다. 전날 근무자를 모집하는 단톡방에 출근 희망 메시지를 남기면, 관리자인 반장이 물량에 따라 출근자 명단을 정해 공지한다. 출근 여부가 확정되면 새벽 6시에 일어나 여섯 살 딸아이를 준비시켜 함께 집을 나선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내려주고 차로 10분 거리인 물류창고로 향한다.

이 물류센터는 전국 이마트 에브리데이 직영점에서 주문한 상품을 보내는 허브 역할을 한다. 보라는 여기서 우유, 치즈, 햄, 소시지 같은 저온 상품들을 지점별 롤테이너(바퀴 달린 컨테이너)에 소분해 담고, 가득 찬 롤테이너를 3개씩 엮어 옮기는 일을 한다.

"처음에 텃세가 좀 심해서 힘들었어요. 아무래도 실수할 수 있잖아요. 소분하다가 잘 못 넣으면 검수해야 하는데, 라인 사람들(보통 4명~6명)이 다 멈춰야 하거든요. 한숨 쉬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많아요. 욕하거나,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해라' 말해요. 20대거나 제 또래도 있고 40, 50대 어르신들도 있어요. 그분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 나와서 일하는 분들인데 어린애들이 이렇게 말하는 걸 참고 하는 거예요. 처음 한 달은 힘들었는데 매일 얼굴 보고 끝나고 한두 마디 말 걸어주고, 사탕도 하나씩 주고받고. 그러면서 좀 친해졌어요."

웬만해서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성격인데도 궂은 말을 들으며 일하려니 위축되기도 했다. "이것도 다 지나가겠지"하는 마음으로 버텼다. '정신차리고 일하라'는 말을 듣던 신참은 이제 한쪽 귀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일할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오히려 몸이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발바닥이 아파요. 너무 많이 걸어서. 조금 걸은 날은 한 2만 5천 보, 많이 걸으면 3만 보 넘게 걸어요. 롤테이너 3개 엮은 게 진짜 무겁거든요. 근데 일하는 분 중에 여자도 많아요. 남녀 반반 정도. 50대 여성분도 하시고 제 몸 반도 안 될 것 같은 아기 같은 친구도 해요."

ⓒ 신세계푸드

밥은 잘 나오는데 일이 많아요

보라는 키가 160cm 조금 안 되지만 골격근량이 30kg을 넘는다. 누가 봐도 다부진 체격인데도 매일 3만 보씩 걷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큰맘 먹고 비싼 작업화를 사 신고, 매일 밤 발바닥용 파스를 붙이고 잠든다. 힘든 와중에 좋은 점도 있다.

"밥이 너무 잘 나와요. 저는 주부니까 제가 밥을 해야 먹는데 누가 해주는 밥을 먹는 게 너무 좋은 거예요. 보통 친한 사람끼리 먹는데 저는 혼자 가서 한 5분 안에 빨리 먹고 차에서 자요. 좀 쉬어야 해요."

신세계푸드는 구내식당에서 무료로 중식을 제공한다. 보라는 나름 균형 잡힌 식단이라며 만족스러워했다. 정규 근무시간은 8시부터 5시까지고, 오전, 오후 중간에 15분씩 쉬는 시간이 주어진다. 저온 파트 반장(정직원인 것으로 추정)이 무뚝뚝한 편이긴 해도 쉬는 시간은 잘 지켜준다고 했다. 다만 일이 많아서 제대로 쉬지 못한다.

"근데 앉을 데도 없고, 앉을 시간이 없어요. 그리고 언제 시간이 갔는지 몰라요. '쉬는 시간? 벌써요?' 약간 이 정도예요. 그 정도로 계속 움직여요. 뒤에 이제 물건 쫙 쌓여 있는 거 보고 있으면 막 미치겠는 거예요. 빨리빨리 쳐내야 덜 쌓이잖아요. 보통 5시 안에 끝나야 하는데 물량이 엄청 많은 날은 6시고 7시고 계속해서 일을 끝까지 해야 하는 구조예요. 늦어도 6시에 퇴근하면 태권도에서 아이를 픽업해서 데리고 운동하러 가는데, 더 늦으면 아이 아빠가 데려와요. 저도 운동을 못 가고. 이번 주는 이틀 못 갔어요. 늦게 끝나기도 하고 힘들어서."

그 언니들은 아직도 병원에 다녀요

처음부터 신세계푸드 물류센터에 간 건 아니었다. 아이 친구 엄마 중 마음 맞는 한 명과 쿠팡 물류센터를 찾아갔다. 최저시급을 주긴 해도 고정적으로 출근해야 하는 게 아니어서 부담이 적었다. 전주에 출근 신청을 할 수 있고(물량이 적은 날은 거절되기도 한다), 근무시간이 9시 30분부터 4시까지여서 아이가 어린이집에 있는 동안 일할 수 있어 "쿠팡이 만만했다."

쿠팡에서는 프레시백(식품 전용 재사용 가방)을 세척하는 일을 했다. 세척 기계를 통과한 프레시백을 쫙 펼쳐서 용액과 물기를 닦아내고 팔레트에 120개씩 쌓아 랩핑했다. 지인과 짝을 이뤄 일하니 지루하지도 않고, 업무 강도도 적당했다. 퇴직금을 눈앞에 둔 어느 날,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프레시백 찍찍이(벨크로 테이프)가 엄청나게 세거든요. 그걸 계속 뜯어야 해요. 기계 안에서 서로 들러붙어서. 그걸 뜯으면서 팔꿈치가 아프고, 닦으면서 손목이 아프고…. 저보다 먼저 시작해서 1년 넘게 일했던 언니들이 있었어요. 한 1년 동안 하루에 네 팔레트 정도만 세척했는데 갑자기 물량이 점점 늘어났어요. 손목이랑 팔꿈치가 아파서 일상 생활하기도 힘들어지니까 언니들이 먼저 그만뒀어요.

저도 거의 11개월 일했거든요. 그런데 물량이 계속 느는 거예요. 기계를 신형으로 바꿔줄 테니 더 빼라(세척량을 늘려라). 근데 저희는 신형 기계가 아직 익숙하지도 않은데 더 빼라고 하니까…. 중간중간 기계 안에 용액도 넣고 물도 채워 넣고, 걸레도 붙이고, 빨아서 갈아야 하고. 다 씻겨 나오면 물기 닦아야 하고. 한 달만 채웠으면 저도 퇴직금 받을 수 있었는데 1년 안 채웠어요. 몸이 너무 아파서. 연장 근무하면 돈을 1.5배로 더 주긴 하는데. 그것도 아니고. 시급은 똑같고, 같은 시간 안에 그만큼을 더 하라는 거예요. 그게 시급이라도 더 주면 어떻게든 참고 했을 것 같은데…. 그 언니들은 아직도 병원에 다녀요."

 쿠팡 배송캠프
쿠팡 배송캠프 ⓒ 연합뉴스

프레시백을 세척하는 곳은 문이 없는 대형 컨테이너였다. 택배차들이 드나들기 위해 열려있었다. 뻥 뚫린 출입구로 바람이 통하니 여름에는 기온 32도, 습도 80%를 웃돌았다. 겨울에도 열악하긴 마찬가지였다.

"진짜 추웠어요. 기계 안에 용액이 나와야 하는데 용액이 얼면 세척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맨날 히터, 열풍기를 기계에 쏘는 거예요. 사람한테 해주는 게 아니고. 저희는 주머니에 손난로 해놓은 걸로 버티고. 거의 야외랑 비슷하죠."

쿠팡 물류센터에는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냉난방 기구가 한 대도 없었다. 6시간 근무 시 제공되는 법정 휴식 시간 30분 동안 점심을 해결했다. 보라는 컵라면으로 추위를 녹였다. 함께 일하는 친구가 있어 1년 가까이 버틸 수 있었다. 아무리 근무 일정이 안성맞춤이라도 더 이상 몸을 혹사할 수 없었다. 며칠 쉬다가 새로 출근하게 된 곳이 신세계푸드 물류센터였다.

아이가 열 살까지 알바하면서 버텨보자

이렇게까지 일하는 이유는 뭘까.

"돈이 되니까 하죠. 처음 상태였으면 계속 고민했을 텐데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이 됐으니까 괜찮은 것 같아요. 또 운동만 했을 때랑은 다르게 밖에서 사람들도 만나고 일도 하고 좋아요. 그냥 활력이 넘친다고 해야 하나. 제가 원래 막 꾸미는 것도 좋아하잖아요. 네일아트 받고 속눈썹 붙이고 이런 것도 좋아하는데, 사실 남편 혼자 벌어서는 그걸 마음껏 할 수는 없잖아요. 이제 제가 버는 만큼 쓸 여유가 생겼죠."

아이가 커가면서 교육비 부담도 늘었다. 지금은 매월 40만 원 정도 들어가는데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지난가을에는 14년 탄 자동차가 자꾸 말썽을 부려 새 차를 들였다. 다달이 차 할부금도 갚아야 한다. 앞으로 계속 일을 해야 한다면 결혼 전에 하던 일을 찾아가고 싶다.

"크로스핏 코치 일을 하고 싶긴 해요. 가끔 센터에서 코치님 대타로 수업해달라고 하면 한두 시간 수업 준비해서 해줘요. 원래 하고 싶었던 일이니까 훨씬 재미있고, 더 좋은 것 같아요. 아이가 손이 덜 갈 때까지, 한 열 살까지 알바하면서 버텨보자. 그 뒤에는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걸 찾아보자, 생각해요."

크로스핏 센터는 직장인 회원들이 많아 주로 저녁 타임 코치를 채용한다. 남편에게 아이 하원과 저녁 육아를 맡기기에 사정이 여의치 않다. 직업 특성상 초과 근무를 하거나 퇴근 후에도 갑자기 불려 가는 일이 잦아 안정적으로 아이를 돌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아이도 아빠와 집에 있는 것보다 엄마와 센터에 가는 것을 더 즐거워한다. 그래서 보라는 일단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에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좋아하는 것을 놓지 않고, 성장하는 자신을 확인하면서.

"저는 운동할 때 숨차서 숨넘어갈 것 같은 느낌을 좋아해요. 힘든데도 쉬지 않고 운동하는 게 좋고요. 내가 과거보다 더 늙었지만 운동 능력이 향상되고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 힘든데도 쉬지 않고 유지하는 제 모습이, 좋아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신세계푸드#쿠팡#물류센터#노동자#워킹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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