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24일(현지 시각) 백악관 루스벨트룸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미 투자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25일 새벽 3시 55분, 현대자동차 그룹은 국내외 언론에 미국 투자를 전격 공개했다. '현대차, 미국에 전략적 투자…2028년까지 210억 달러 집행'이라는 제목의 자료였다. 같은 시각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나란히 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회견은 백악관 유튜브 채널을 통해 생중계됐다. 20분간 진행된 이날 회견 분위기는 좋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현대차는 훌륭한 회사"라고 추켜세웠고, 정 회장에게 "(미국 내 사업에서) 인허가를 받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 나를 찾아오라. 내가 도와주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미국 내에서 생산된 자동차는) 관세를 낼 필요가 없다"고도 했다.
트럼프의 이런 반응은 현대차가 앞으로 4년 동안 미국에 최대 210억 달러(약 30조 8175억 원) 투자 발표에 따른 것이다. 이같은 규모는 현대차의 단일 규모 투자로 사상 최대였다. 정 회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의 최첨단 제조 시설을 방문해 미국 노동자에 대한 현대차의 헌신을 직접 확인해 달라"고 말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바로 "오케이(Okay)"라고 답했다.
이번 회동은 오는 4월 트럼프 행정부의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상호관세 부과'를 앞두고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재계와 통상 당국은 향후 국내 기업에 대한 관세 완화 등 통상 압력을 줄일 수 있는 계기로 주목하고 있다.
새벽에 날아든 정의선-트럼프 회동, 31조 투자 보따리의 정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 백악관 루스벨트룸에서 한국의 대미 신규 투자를 발표하면서 정의선 (왼쪽 세 번째부터) 현대차그룹 회장, 장재훈 현대차 부회장, 성 김 현대차 사장, 서강현 현대제철 사장 등을 호명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현대차가 이날 공개한 대미 투자의 내용은, 트럼프 맞춤형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온다. 우선 31조 원에 달하는 신규 투자 계획은 트럼프 2기에 맞춰 한국 기업 가운데 첫 번째 나온 투자 발표다. 현대차 미국 공장에서 만드는 완성차를 크게 늘리고, 자동차 강판용 제철소를 짓는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또 소형모듈원자로(SMR) 등 에너지 협력 등이 포함돼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기자와 한 통화에서 "트럼프 2기 핵심 의제는 미국 내 일자리 창출과 철강, 반도체 등 자체 기술력과 생산력 강화, 인공지능 혁명에 맞춘 원자력 기술 활용 등이다"라면서 "향후 북미 시장 점유율을 높여 나가기 위해 생산시설을 고도화하고, 자동차 강판 등 기반 시설에 대한 투자를 확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현대차의 투자를 따져 보면 자동차 부문에 86억 달러가 투자된다. 현대차는 지난 2004년부터 미국 앨라배마 공장에서 자동차 36만 대를 생산하고 있다. 또 2010년에 완공된 기아 조지아 공장(34만 대)에서도 자동차를 만들고 있다. 같은 지역에 올해 현대메타플랜트아메리카(HMGMA, 30만 대)가 새롭게 들어서면서, 총 100만 대 생산 시설을 만들었다. 현대차는 이번 투자 계획에서 HMGMA에 20만 대를 추가해, 모두 120만 대 생산 체제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현대제철은 미국 루이지애나주에 전기로 일관 제철소를 짓는다. 270만 톤 규모로 1400개 이상의 일자리가 늘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현대차가 미국에 짓는 최초의 제철소"라면서 "현대는 미국에서 철강을 생산하고, 자동차를 만들게 된다"면서 "그 결과, 관세를 낼 필요도 없다"고 했다. 현대차가 철강과 물류 등에 투자하는 금액이 총 61억 달러다.
정의선 회장도 "이번 약속의 핵심은 철강과 부품부터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미국 공급망을 강화하기 위한 투자"라며 "특히 루이지애나에 새로 건설되는 현대제철 공장에 대한 수십억 달러 규모의 투자에 대해 매우 기대하고 있으며, 미국 내 자동차 공급망을 더욱 자립적이고 안전하게 만드는 기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장 미국으로 수출되는 자동차에 해당하는 건 아냐"

▲현대차 울산 전기차 공장 기공식에서 연설중인 정의선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 현대차그룹
마지막으로 인공지능(AI) 등 미래산업 분야의 협력 확대와 소형모듈원자로(SMR) 등 미래 에너지에 63억 달러를 투자한다. AI 대표기업인 엔비디아를 비롯한 자율주행기업 웨이모 등 혁신 기업들과의 협업과 투자가 진행된다. 현대건설도 미국 홀텐 인터내셔널과 함께 미국 미시간주에 SMR 착공을 추진한다. 정 회장은 이날 "미국 에너지 산업을 지원하고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30억 배럴 상당의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를 구매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 회장의 투자 발표를 듣던 트럼프 대통령은 흐뭇한 표정이었다. 이어진 기자들과의 질의답변 과정에서도 자신의 전방위적인 관세 정책으로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퉈 미국에 투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례 없는 수준으로 자동차들이 이 나라로 들어오고 있다"며 "이 투자는 관세가 매우 효과적이라는 강력한 증거"라고 말했다.
또 '현대가 루이지애나에 대규모 투자를 한 것이 다른 자동차 회사들에도 미국 투자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아주 좋은 질문이며, 현대는 훌륭한 회사"라고 추켜세웠다. 이어 "다른 훌륭한 회사들도 미국에 들어오고 있고, 어떤 회사들은 여기에 머물면서 아주 활발하게 확장하고 있다"며 "자동차뿐만 아니라 모든 산업 분야에서 엄청난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현대차의 이번 투자 발표가 향후 국내 기업에 대한 대미 관세 인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현대차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낼 필요 없다'는 발언은 당장 국내에서 미국으로 수출되는 자동차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북미는 전 세계 자동차 시장 가운데 가장 크고 역동적인 곳"이라며 "현대차도 그동안 시장 확대를 위해 꾸준히 투자를 늘려왔으며, 이번 투자를 통해 관세 효과 등을 포함해 시장 경쟁력을 더욱 높여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트럼프 2기 통상 환경의 불확실이 기업들에는 가장 큰 위험"이라며 "국내 정치 불안정까지 겹치면서 사실상 통상 외교도 전면 중단된 상황에서 현대차의 투자 발표와 워싱턴 회동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