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12일이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당시 부회장)이 아버지 이건희 회장 별세 후 첫 경영 행보를 재개한 곳은 서울 서초구 우면동 서울R&D 캠퍼스였다. 그곳에서 이 회장은 전사 통합 디자인 전략회의를 통해 "디자인에 혼을 담아내자. 다시 한 번 디자인 혁명을 이루자"고 강조했었다.
그때 이 회장 옆에 있었던 이가 한종희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당시 DX부문장)이었다. 한 부회장은 삼성전자에서 입지전적인 이력을 쌓은 인물로, 특히 삼성전자 TV 사업의 19년 연속 세계 1위 기록을 이끈 주역이다.
삼성전자 TV의 '살아있는 역사'로 평가받는 한 부회장이 25일 갑작스럽게 심정지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중국 출장 중인 이재용 회장은 애도의 마음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한국 전자산업의 거목이 졌다며 고인을 추모하는 분위기다.
TV 부문에서만 30년... 2022년 2월 삼성전자 부회장 자리 올라

▲2020년 11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오른쪽)과 한종희 부회장(가운데)이 서울 강남구 삼성디지털프라자 삼성대치점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 ⓒ 삼성전자
한 부회장은 1962년생으로 천안 고등학교와 인하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1988년 삼성전자에 입사했고, 그 후 TV 부문에서만 30년 근무했다.
입사 당시부터 2009년 1월까지 삼성전자 영상사업부 개발팀에서만 21년 동안 일했다. 그 후 영상사업부 개발팀 개발2그룹장을 거쳐, 2011년 12월부터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에서 상품개발팀장, 차세대전략팀장, 개발팀장 등을 역임하며 2017년 11월까지 연구임원으로 재직했다. 입사 후부터 줄곧 엔지니어로서의 '길'을 걸었던 셈이다.
2017년 11월 삼성전자 CE부문 영상디스플레이 사업부장(사장)을 거쳐, 2021년 12월부터 삼성전자 DX부문장·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부회장으로 재임했다. 명실공히 삼성전자의 기술력을 대표하는 '얼굴'로 자리매김했다. DX 부문은 전자 제품 설계부터 제조, 판매, 마케팅, 유통 등 일체를 담당하는 사업 부문이다.
2022년 2월,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 자리에 오르면서 성공한 샐러리맨의 표상으로 주목받았다. 또한 DX부문장,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 생활가전사업부장, DA사업부장, 품질혁신위원장 등을 겸임한 점들은 그에 대한 그룹 내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별명은 코뿔소... "부회장님이나 대표님 말고 JH로 불러 달라"

▲2019년 1월 6일(현지시간),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이 세계 최대 가전·IT 전시회인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2019' 개막을 이틀 앞두고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아리아호텔에서 열린 삼성 TV 퍼스트 룩 2019(Samsung TV First Look 2019) 행사에서 세계 최소형 '마이크로 LED'를 적용한 75형 스크린을 공개하고 있다. ⓒ 연합뉴스
- 평소 회사에서 코뿔소라는 별명으로 불리실 만큼 우직한 성격으로 알려지셨는데요. 혹시 사회에서 반드시 지켰던 자신만의 신념이나 평소 지키고자 하는 좌우명이 있으신가요?
"유지경성(有志竟成)이라는 사자성어를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뜻을 올바르게 가지고 이를 이루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면 반드시 성취할 수 있다'는 의미로, 후배 여러분들도 이 말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생활한다면 원하는 목표를 반드시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2022년 3월, 인하대학교 공과대학 동문 인터뷰를 통해 밝힌 한 부회장의 성공 철학이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엔지니어가 갖춰야 할 덕목이 "한 가지 문제에 봉착하면 그 문제를 완벽히 이해하고 해결할 때까지 철저히 물고늘어지는 집요함"이라면서도 "아집과 독선"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런 일면을 뒷받침하는 에피소드들도 눈에 띈다. 임직원들을 향해서는 자신을 부회장님이나 대표님으로 부르지 말고 'JH'로 불러달라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사내게시판에 "안녕하세요 JH입니다"로 시작하는 'JH 노트'라는 댓글을 통해 직원들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였고, 회식 관련 불만 글이 올라오자 "자유롭게 참석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음주 다양성도 존중하는 문화를 이끌어달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퇴사 직원이 남긴 쓴소리에는 "소중한 인재를 놓치는 것 같아서 아쉬운 마음"이라는 답글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JH의 서재'라는 글을 통해서는 직원들에게 도서를 추천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지난 19일 주총 현장에서 "최근 주가상황 진심으로 사과"

▲19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56기 삼성전자 정기주주총회에서 한종희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가장 최근 공개석상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지난 19일 삼성전자 정기 주주총회였다. 900여 명의 주주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주총 현장에서 한 부회장은 삼성전자 최근 주가 상황과 관련해 직접 사과하는 한편 "향후 주주 가치 제고를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한 부회장은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 변화에 지난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면서 "스마트폰, TV, 생활 가전 등 주요 제품이 압도적인 시장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 했다"고 문제점을 비교적 솔직하게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 부회장이 강조한 것은 기술 경쟁력 회복이었다.
"경영진과 임직원 모두 주가 회복의 가장 확실한 열쇠는 시장 기대에 부합하는 실적, 그리고 기술 경쟁력 회복이라는 점을 잘 안다. 올해 반드시 근원적 기술 경쟁력을 확보해서 견조(주가가 높은 상태에 머물러 있음, 기자 주)한 실적을 달성하겠다."
한 부회장의 다짐을 삼성전자가 앞으로 어떻게 이어갈지 주목된다. 이날 삼성전자는 한 부회장 유고에 따라 전영현 단독 대표이사 체제로 변경했다고 공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