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2월 4일 한덕수 국무총리와 최상목, 이주호 부총리, 외교부 장관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국무회의실에서 현안 논의를 마치고 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 연합뉴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일주일째 쥐고 있던 상법 개정안에 대한 재의요구권 행사 여부가 한덕수 국무총리에게 넘어갈 공산이 커졌다.
20일 헌법재판소는 한 총리에 대한 탄핵 사건을 24일 오전 10시에 선고한다고 밝혔다. 탄핵이 기각될 경우 한 총리는 즉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복귀한다.
지난 13일 상법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후 이른바 경제 8단체 등은 최 대행에게 거부권 행사를 공개적으로 요구해 왔다.
반면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거부권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반대 성명을 잇따라 내놓았다. 더욱이 "직을 걸고 거부권 행사를 반대해야 하는 입장"이라고 밝혔던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한국경제인협회에 공개토론까지 요구하고 나선 상황이어서, 최 대행의 선택에 그만큼 관심이 쏠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 총리에 대한 탄핵이 24일 기각된다면, 최 대행으로서는 한숨을 돌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상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는 곧, 과거 자신이 밝혔던 소신과는 배치되는 행위라는 거센 비판에 직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와 전체 주주의 이익을 위해 신인 의무 다해야"

▲2024년 12월 30일, 우원식 국회의장이 서울 여의도 국회를 찾은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접견하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4년 전이었다. 최 대행은 2021년 4월 30일 발행된 <경제정책 어젠다 2022>란 책의 공동 저자 중 한 명이었다.
'자유, 평등 그리고 공정'이란 부제가 더 인상적인 이 책에서 최 대행은 "이사는 전체 주주의 이익을 위해 신인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상법 개정안 골자인 이사의 주주 이익 보호 의무 병기와 정확히 맥이 닿아있는 주장이다.
"지배주주 또는 비지배주주(일반 주주, 기자 주)가 선임한 이사라 하더라도 선임해준 주주 그룹의 지시를 따르거나 이익을 대변해서는 안 되며 이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회사와 전체 주주의 이익을 위해 신인 의무를 다해야 한다."
또한 최 대행은 "비지배주주의 이사 선임 제도의 재설계를 사회적 타협을 통한 개혁 추진의 제도적 장치로서 제안한다"면서 "비지배주주에게 1인의 이사 선임권을 부여하는 제도와 집중투표제 중 하나를 회사가 의무적으로 선택하는 방식으로 개편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집중투표제 역시 이번 상법 개정안의 핵심 내용 중 하나다.
지배주주 강력 견제하는 '그림자 이사 제도' 도입도 주장

▲지난 2월 20일,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과 우원식 국회의장,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서울 여의도 국회 사랑재에서 열린 국회-정부 국정협의회 첫 회의에 참석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5.2.20 ⓒ 공동취재사진
이뿐만이 아니었다. 최 대행은 책을 통해 영국의 '그림자 이사 제도'와 같은 지배주주에 대한 강력한 견제 장치가 필요하다는 입장도 밝혔다.
'그림자 이사'는 지시 또는 명령을 통해 실제 이사들에게 업무를 집행하게 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로 지배주주 등이 이에 해당할 수 있다. 영국에서는 이들에게 일정 범위에서 이사와 동일한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다.
최 대행은 "선관주의 의무와 충실 의무를 위반한 이사 뿐 아니라 이를 지시한 지배주주나 비지배주주에게도 보다 효과적으로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상법상 업무집행 관여자(이사가 아니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업무 집행을 지시한 자, 기자 주) 제도의 실효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림자 이사 제도'를 검토 모델로 제시한 것은 그래서였다.
"주주의 이사 선임 방식을 다양화하면서 이사를 선임하는 주주의 책임성도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선관주의 의무나 충실 의무를 위반한 이사 뿐 아니라 이를 지시한 주주에게도 법적 책임을 보다 효과적으로 물을 수 있도록 영국의 그림자 이사와 같이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
지배주주 관행에 거침없이 쓴소리 "가족이면 무조건 채용, 고속 승진..."

▲2025년 1월 3일,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경제계 신년인사회에서 관련 영상을 보고 있다. 왼쪽부터 류진 한국경제인협회장, 최 권한대행, 최태원 대한상의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 회장, 구광모 LG 회장. ⓒ 연합뉴스
최 대행의 이같은 주장들은 "기업 지배구조 혁신은 주주(총회), 이사회, 경영자가 제 기능과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하는데서 출발한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이사회의 독립성이 지금보다 더 강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대부분 국가에서 경영자 통제를 넘어 지배주주 통제와 비지배주주 보호에도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이사회의 독립성을 강화하고 있다."
그는 "회사 의사 결정 구조의 정점에 이사 한 명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의사 결정을 하는 이사회가 위치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는 질문을 던지면서 "위원회 형태이므로 주주 또는 이해관계자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담는 연결점으로서의 역할이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곧, 이사회의 다양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전체 주주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구조이기도 하다.
"급변하는 환경에 대응하여 이사회가 회사와 전체 주주의 이익, 회사의 사회적 책임을 함께 추구하려면 독립성을 넘어 전문성과 다양성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최 대행은 지배주주의 인식 변화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번 상법 개정안이 지향하는 바 또한 그러하다.
"특히 지배주주가 주주와 경영자의 지위, 역할과 이익을 명확히 구분하고 변화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가족이면 능력과 자질에 관계없이 무조건 채용되고 고속 승진하며 경영권도 승계받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이 중요하다. 지배주주의 개인회사와 가족회사 등과 거래시 회사가 그러한 거래를 왜 해야 하는지와 지배주주 등의 사적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님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대주주 가족 중심 경영에서 벗어나야 상속세율 조정 가능"

▲최상목 부총리, 임시 국무위원 간담회 참석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7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위원 간담회에 참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최 대행은 지배주주의 인식 변화가 선행돼야 재계가 요구하는 규제 철폐가 가능하다는 점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는 "독립성·전문성·다양성을 갖춘 이사회, 기관 투자자의 적극적인 주주 행동, 이사·주주의 책임성 강화, 기업 문화와 관행의 개선 등을 통해 내외부 통제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여 비지배주주 보호와 지배주주 견제가 충분히 이루어진다면, 대규모 기업집단 제도 등 개별법의 중첩 규제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 책을 쓴 정통 경제 관료 출신의 저자들, 김낙회 전 기획재정부 세제실장, 변양호 전 재정경제원 금융정책국장, 이석준 전 기획재정부 제2차관, 임종룡 전 기획재정부 제1차관 등의 일치된 견해이기도 하다. 당시 최 대행은 농협대학교 총장이었다.
"관행 개선과 제도 개편으로 대주주 가족 중심의 경영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동안 대기업에 적용돼왔던 대규모기업집단제도 등과 같은 규제를 폐지하고 상속세율도 경쟁국 수준으로 조정될 수 있을 것이다." (2021년 4월 저자 일동, 책 서문 중)
한 총리 탄핵 선고 이후 상법 개정안에 대해 최 대행이 어떤 입장을 밝힐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