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장이 19일 오후 서울 중구 동아투위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이정민
"50년 동안 <동아일보> 앞에서 매년 3월 17일 열었던 규탄 집회를 더 이상 열지 않습니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의 지난 17일 50주년 행사 성명엔 이러한 내용이 담겼다. 1975년 3월 17일 박정희 유신정권 치하에서 '언론 자유'를 요구한 <동아일보> 언론인들이 강제로 해고되고 거리로 내몰린 지 50년이 흘렀다. 동아투위는 그 뒤로 매년 3월 17일이면 서울 중구 동아일보사 앞에 모여 <동아일보>의 사과를 요구해왔다.
지난 17일에도 동아투위 위원들은 어김없이 동아일보사 앞에 모였으나 이날이 마지막이었다. 동아투위 위원 113명 가운데 41명이 작고했고, 현재는 72명이 생존해있다.
19일 오후 서울 중구 동아투위 사무실에서 만난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장(전 국회의원)은 "(작고한 동아투위 위원 추모제에서) 향불을 피는데 울컥하고 눈물이 잠시 났지만 그래도 끝까지 웃으려 했다"라고 소회를 털어놓았다.
'동아투위 활동을 끝내겠다는 소식에도 <동아일보>가 연락하지 않았는지'를 묻자 이 위원장은 "그런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답했다.
"물리적으로도 한계... 역사의 법정으로 넘길 것"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장이 19일 오후 서울 중구 동아투위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이정민
박정희의 언론 탄압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언론사마다 담당기관원(중앙정보부 직원)을 출입하게 해 기사 내용을 수시로 감독하고, 문화공보부가 직접 신원조회를 해 기자 자격을 심사하는 등 신문과 방송 제작에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에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대회에서 <동아일보> 기자들은 언론사 내 담당기관원의 출입을 거부하고 외부 간섭을 배제하는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하고 1975년 3월 17일 (해직되기 전까지) 5개월간의 푸른 추억이 아직 남아있다. 자유언론을 실천하는 (양심) 그대로 신문을 만들던 기억이 있어 50년간 버틸 수 있었다.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에) 많은 신문 독자들이 격려 광고로 지면을 채워주었다. 당시의 광고를 보면 우리 국민들이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를 얼마나 바라는지가 드러나 있다.
그 독자들에게 등 돌릴 수 없지 않나. 그 광고들이 오늘날까지 우리를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신문을 다시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덧 마흔한 분이 돌아가시고, 많은 분들이 (아파서) 누워 계신다. 막내가 80살이 넘었다. 회의를 열어도 이제 10명 정도밖에 나오지 못 한다."
이 위원장은 동아투위 결성 50주년을 계기로 <동아일보>와 동아투위를 "역사의 법정으로 넘기겠다"라고 말했다.
"50주년이면 반세기 아닌가? 그동안 민주화된 세상이 왔다. 그런데도 <동아일보>가 자유언론을 배신했다는 것을 아직도 인정하지 못 한다. 오히려 '경영이 악화돼 (기자들을) 내쫓았다'고 말하면서 독자를, 역사를 속여왔다. 돈과 영향력으로 50년 정도의 세월은 속여도 앞으로의 장구한 역사를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동아일보> 앞에서 한 (마지막) 추도식에서 우리들 마음에 눈물이 가득 찼다. 우리라고 사과를 못 듣고 이렇게 떠나는 마음이 편하겠나? 그런데 살다 보니 (우리가) 어느새 어른이 됐더라. 나는 '저들 정도면 대한민국의 어른으로 볼 수 있겠다'는 모습을 남기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이렇게 격양된 시대에도 노인들이 여백 있게 자기들 갈 길을 간다'고. 노인이 돼서 울분과 억울함, 분함이 가득 찬 모습으로 떠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역사를 믿고 역사가 바로 갈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여유나 온유함을 갖고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마지막 승리일 수도 있다. 역사에 복무했으니 이제 제대를 하겠다는 말이다. 나이를 먹으면 자기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어진다. 기억력도 쇠퇴하고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정확한 판단도 흐려진다. 그런 예를 많이 봐왔다."
다만 모든 동아투위 위원들이 활동 종료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이 위원장은 "당연히 더는 <동아일보>에 사과 요구를 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분도 있다. 50년이나 된 단체이니 향후 어떻게 할지를 두고 왜 토론이 없었겠나"라며 "소수가 그렇게 쉽게 끝낼 수는 없지 않겠냐고 의견을 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한 달간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쳤고, 두 갈래의 글을 상당히 융합해서 50주년 성명을 냈다"며 "공식적인 행사는 끝내고 남은 과제는 자유언론실천재단, 전국언론노동조합 등의 언론인 단체가 이어가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국회 유리창 깨는 모습, 50년 전 기억 떠올라"

▲"지금의 민주화운동은 독립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은 운동이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이번 (탄핵 광장에서) 응원봉을 들고, 은박지를 뒤집어쓰고 나온 걸 보고 참 감동했다. 이렇게 국난일 때 의인들이 나타난다. 우리 시민운동은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결국 역사에서 우리가 승리할 것이다." ⓒ 이정민
이 위원장은 지난 12.3 윤석열 내란 사태 당시 계엄군이 유리창을 깨고 국회로 진입하는 모습에서 50년 전 <동아일보> 편집국 유리창을 깨고 들어온 폭력배들을 겹쳐보았다.
"국민 일반을 바라보는 눈은 <동아일보> 김상만(전 회장)이나 윤석열이나 차이가 없다는 걸 새삼 느꼈다. 그래도 우리가 전진해오지 않았나? 우리 동아투위 위원들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자유언론에 대해 낙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비록 <동아일보>의 사과를 받아내지는 못했지만 지난 12.3 비상 계엄 당시 젊은이들이 쏟아져 나와 폭력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극복하는 것을 봤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민주주의를 앞서서 이행해온 나라들도 무너지고 있다. 우리는 그들에 비해 뒤늦게 민주주의를 시작했지만 세계 민주주의 역사를 쓰고 있다. 윤석열 같은 괴물을 평화로운 방법으로 퇴치하고 있다. 진퇴가 왔다갔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결국 이겨온 역사가 있다."
해직 이후 동아투위 위원들은 박정희 유신정권의 취업 방해로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하고 경찰과 중앙정보부의 감시와 체포·구속·징역을 겪기도 했다. 이 위원장 또한 <동아일보>에서 해직되고 긴급조치 위반, 반공법 위반 혐의로 7년간 복역했다.
2008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는 "1975년도 언론인 대량 해고는 중앙정보부의 압력에 의한 것이므로 정부와 <동아일보>는 이에 대해 사과하고 응분의 화해 조치를 취하라"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사과도 화해 조치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까지 <동아일보>에 대한 비판을 잊지 않았다.
"아직 보수 언론의 규모가 크다. (1920년에 창간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는 대한민국 역사보다 자기들이 (더 일찍 생겼다면서) 대한민국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오해다. 1919년 3.1운동이 있고 그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지 않았나. <동아일보>는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 창간됐다.
지금의 민주화운동은 독립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은 운동이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이번 (탄핵 광장에서) 응원봉을 들고, 은박지를 뒤집어쓰고 나온 걸 보고 참 감동했다. 이렇게 국난일 때 의인들이 나타난다. 우리 시민운동은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결국 역사에서 우리가 승리할 것이다."
[관련 기사] 동아투위 결성 50주년, 자유언론역사관 추진 https://omn.kr/2cmqq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장이 19일 오후 서울 중구 동아투위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이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