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미디언 이수지의 '제이미맘' 영상 속 한 장면 ⓒ 핫이슈지
"이렇게 차에 있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저는 차에서 모든 걸 다 해결해요."
최근 큰 화제를 얻은 코미디언 이수지의 유튜브 영상 '제이미맘 이소담씨의 별난 하루'의 한 대사다. 해당 영상에서 제이미맘(이수지)은 아이를 수학학원에 데려다준 후 차 안에서 김밥을 먹으며 전화를 받고, 아이의 문제집을 직접 풀기도 한다.
이 영상이 배우 한가인의 자녀 라이딩 브이로그를 패러디한 것이라는 반응이 많았는데, 최근 배우 김성은도 유튜브를 통해 삼남매의 라이딩 일상을 공개했다. 이 영상에서 김성은은 겨울방학을 맞은 삼남매의 학원 라이딩을 소화하며 하루에도 여러 차례 동호대교를 건넌다. 자녀를 데려다준 후 차에서 핸드폰을 하며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식사를 해결하기도 한다. 제이미맘의 말처럼, 이 여성들은 차에서 많은 걸 해결하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
연예인의 학원 라이딩 영상은 '극성맘'을 향한 여성혐오적 비난, 일부 연예인이 누리는 막대한 부에 대한 박탈감, 영유아부터 시작되는 사교육의 효과성과 정당성에 대한 논란, 능력만 된다면 뭐든 시키는 게 좋다는 지지까지 여러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수지의 '제이미맘' 패러디와 여성 연예인의 학원 라이딩 브이로그, 그리고 최근 방영중인 ENA 드라마 <라이딩 인생>까지. 이 일련의 흐름에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건 '학원 라이딩'이라는 문화가 과거보다 더 보편화되고 있고, 이것이 오늘날 엄마들의 노동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라이딩 인생'이라는 드라마 제목처럼, 라이딩 안에 인생이 있고 라이딩이 곧 인생인 세상. 어쩌다 학원 라이딩은 유자녀 여성의 일이 됐을까?
일상의 빈틈을 허락하지 않는 세상
라이딩 당사자들은 라이딩을 하는 가장 큰 이유로 "세상이 험해서"를 꼽는다. 교통사고나 성폭력, 유괴 등이 걱정되기 때문에 아이의 안전을 위해 나선다는 말이다. 아동친화적이지 않은 도시공간, 도로 위에 점점 많아지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빈번한 스쿨존 사고 등을 떠올릴 때 이러한 양육자의 걱정은 합리적이다.
그러나 아동의 안전에 대한 욕구가 확산될수록 아동 스스로 자율적이고 주도적으로 보내는 일상의 중요성은 점점 기회가 줄어들고 있다. 아동이 양육자 없이 놀이터에 가는 연령은 점차 늦어지고, 아동의 일상은 차나 셔틀버스를 타고 유치원이나 학교, 학원 사이를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으로 짜여져 있다.
미국의 경우 1980년대 어린이 납치살해 사건이 텔레비전 영화로 제작돼 주목을 받으면서, 아동 안전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아이들끼리 만나서 노는 문화가 점차 사라졌고, 그 자리는 부모가 아이를 대동해 함께 만나는 플레이데이트나 각종 스포츠클럽 라이딩으로 채워졌다. 미국에서 자녀의 축구연습과 경기를 위해 라이딩을 하는 '사커맘'이라는 용어가 1990년대 중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 미국 엄마의 라이딩 인생은 우리보다 역사가 깊다.
하지만 이러한 안전 중심의 양육이 아동에게 놀이와 탐색의 기회를 빼앗는다는 비판은 미국 내에서도 거세다. 안전을 위해 아동의 일상에 빈틈을 허락하지 않을 때, 아동이 자유롭게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주도적으로 놀이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실 아동의 안전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학원이고 뭐고 안 보내는 게 제일 안전하다. 안전이라는 욕구 밑에는 아이의 진로 준비나 불가피한 돌봄 공백이란 사정이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녀를 라이딩해서라도 학원에 보내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한국의 입시 경쟁과 사교육 경쟁은 이미 악명이 높은데, 특히나 학원이 몰려 있는 일부 지역에서 그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모습이다.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학원은 강남, 그것도 대치동에 있다. 여성 연예인 라이딩 브이로그의 주요 배경으로 강남으로 가는 한강대교가 등장하는 이유일 테다.
대치동은 1990년대 중반부터 대한민국의 사교육 1번지로 군림했고, 최근 들어 영향력이 타 학군지에 비해 커지고 있다. 지방 도시의 학원가가 문을 닫아 지방 학생들이 주말마다 대치동 강의를 듣기 위해 오는 사례가 늘었다고 한다. 대치동 학원가는 점차 확장되며 이곳에서 활동하는 일타 강사들은 연예인급의 인기를 누린다.
저출생, 서울중심주의, 그리고 학군지로 선호되는 일부 지역에만 교육 인프라가 모이고, 학군지로 선호되지 않는 지역은 기초적인 교육 인프라조차 갖추기 힘든 주거 양극화가 더해진 결과물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전업맘'은 자녀를 차에 태운 채 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것이 여의치 않은 '워킹맘'은 도보로 학원 이동이 가능한 학군지로의 진입을 꿈꾼다.
이동독립권의 결과가 라이딩 인생이라면

▲유튜브 '햅삐 김성은' 영상 갈무리 ⓒ 햅삐 김성은
과거 여성 운전자는 도로 위의 '민폐'였다. 오랫동안 운전은 남성의 일로 여겨졌고, 여성은 운전에 필요한 공간지각능력이나 상황대처능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여전히 '김여사'(운전을 잘 못하는 여성을 조롱하거나 비하하는 말)라는 시선이 존재하지만 '남성은 운전석, 여성은 조수석'이라는 공식은 깨지고 있고, 여성들은 핸들을 능숙하게 잡고 어디든 간다.
'언니차 프로젝트'를 진행한 이연지 기획자는 한 인터뷰에서 "여성에게 운전이란 원할 때 원하는 곳으로 떠나고 또 돌아올 수 있는 힘, 이동독립권이다"라고 말했다. 이동독립권이라는 말에 두 여성이 차를 타고 횡단하는 영화 <델마와 루이스>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그런데 그 이동독립권의 결과가 자녀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자녀를 기다리고 또 자녀를 학원에 데려다주는 일로 반복된 삶이라면? 돌봄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물쓰듯 써버리는 일이라 해도, 자녀의 학원 수업에 맞춰 분절된 시간 속에서 무엇 하나에 집중하기 힘든 채로 보내는 것이 엄마의 인생이어야 한다면? 차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라이딩 인생'이 자녀의 입시 성공을 위해 정당화되고 더 나아가 대세가 된다면?
안전 중심 양육의 확산, 점점 더 과열되는 사교육, 사교육시장에서 대치동의 영향력 등이 맞물리며 유자녀여성의 라이딩 노동은 점점 증가하고 있으며, 최근 문화 콘텐츠들은 이러한 노동에 앞다투어 주목하고 있다. 운전하는 여성을 향한 혐오의 시선에 맞서왔지만, 어느새 운전이 가지는 저항적·해방적 가치는 사라지고 자녀의 입시 성공과 계급 재생산을 위한 라이딩 노동이 남은 기이한 현실. 이 현실 앞에서 더 나은 변화를 도모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