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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밥상문간 슬로우점에서 교육 중인 실습생 청년이 식사 방법에 대해 안내하고 있다.
청년밥상문간 슬로우점에서 교육 중인 실습생 청년이 식사 방법에 대해 안내하고 있다. ⓒ 느린IN뉴스

"17번 손님, 김치찌개 2인분 나왔습니다."

지난 18일 대학로 근처 골목의 한 식당. 브레이크타임을 앞둔 늦은 점심시간임에도 가게 안은 손님들로 가득하다. 벽에는 '김치찌개 3000원'이라는 정겨운 가격이 큼지막이 적혀있고, 직원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손님들을 맞이한다. 이곳은 경계선지능인 청년들이 직원으로 일하는 청년밥상문간 슬로우점이다.

슬로우점 실습생들, 일의 맛을 배워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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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학습자'라고도 불리는 경계선지능 청년들은 지능지수(IQ) 71~84 사이로 장애 범주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학습과 사회생활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법적, 제도적 사각지대에 놓여있어 복지나 고용 지원 등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청년밥상문간 슬로우점은 경계선지능 청년에게 고용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작년 3월 시작됐다. 더 많은 청년에게 일할 기회를 주기 위해 올 여름에는 낙성대점도 슬로우점으로 전환돼 재개점을 앞두고 있다.

요즘 들어 슬로우점은 주방에도, 홀에도 상주해 있는 직원이 많다. 기존 직원들과 함께 일을 배우고 있는 실습생 청년들이 교육 중이기 때문이다. 병아리 직원들의 김치찌개집 출근이 이제 한 달인데도, 인덕션을 조작하거나 수저를 정리하는 모습은 제법 능숙해 보였다. 앞으로 이곳에서의 실습이 끝나면 인턴을 거쳐 최종 선발이 된 6명은 새로 오픈할 낙성대점의 정식 직원으로 일하게 된다.

다양한 재료가 어우러져 깊은 맛을 내는 김치찌개처럼, 슬로우점에서 함께 일하며 성장해 가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식기를 정리 중인 실습 청년.
식기를 정리 중인 실습 청년. ⓒ 느린IN뉴스

방긋방긋 웃는 미소가 돋보이는 현식(가명)씨는 이번 직무교육에 참여 중인 실습생이다. 현식씨는 이전에 다른 식당에서 했던 홀서빙 아르바이트 경험이 지금 일하는 데 많은 도움이 돼서 큰 어려움 없이 적응 중이라고 전했다. 이어 아침에 일어나 꾸준히 출근할 수 있는 직장이 생겨 좋다며 슬로우점에서의 생활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점심시간 내내 주방에서 바삐 일했던 또 다른 실습생 성우씨는 슬로우점을 '배려받으면서 일할 수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성인기를 지내는 경계선지능인의 가장 큰 걱정은 다름 아닌 '취업'이다. 운 좋게 일을 하게 돼도 일터에서 이해받지 못해 금방 해고되거나, 스스로 그만두는 경우가 많아 경력과 경험을 쌓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성우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전에 주방보조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오래 일하지는 못했다.

"예전에 주방보조 일을 했을 땐 일하는 사람들과 잘 맞지 않아서 힘들었어요. 그런데 여기는 훨씬 편안한 분위기예요. 예를 들면 제가 키가 커서 설거지하는 곳이 너무 낮아 불편했는데, 점장님이 앉아서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해 주셔서 지금은 편하게 앉아서 설거지를 하고 있어요."

슬로우점에서 성우씨는 성실함과 꼼꼼함 담당이었다. 성우씨는 작년 여름 전역 후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청년밥상문간 직무교육에 지원하게 됐다고 전했다.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에 큰맘먹고 신청했는데, 걱정했던 것보다 일이 적성에 맞아 여기서 오래 일하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또한 "저처럼 군대를 막 제대해 뭘 해야할 지 모르겠는 청년들에게 뭐라도 부딪혀보라고 하고 싶어요. 저도 도전했다가 좋은 기회를 얻은 것처럼 말이에요"라며 후배 경계선지능 청년에게도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경계선지능 청년들과 함께 성장하기

 슬로우점의 김치찌개 2인분이 푸짐하게 나와 있다.
슬로우점의 김치찌개 2인분이 푸짐하게 나와 있다. ⓒ 느린IN뉴스

청년밥상문간 슬로우점은 동대문종합사회복지관이 경계선지능 청년들의 직무교육을 총괄하고, 청년문간사회적협동조합이 상생일터의 유지, 관리를 담당해 운영된다. 직무교육은 경계선지능 청년들의 특성을 반영해 이론부터 현장실습, 인턴십까지 세 단계로 진행된다.

직무교육을 담당하는 동대문종합사회복지관 사회복지사는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이 실질적인 직무 능력을 쌓고 자신감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며 "직무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점장님, 실습생 청년들과 긴밀하게 소통하며 낙성대점에서 일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문을 연 청년밥상문간 슬로우점은 준비 단계부터 모든 임직원들이 경계선지능인 교육을 받도록 했다. 경계선지능인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있어야 그들이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청년들을 직접적으로 담당하는 슬로우점의 이지혜 점장도 이러한 배경을 고려해 채용됐다. 이 점장은 1년간 슬로우점을 운영하며 힘들고 지친 적도 많았지만, 함께 일하는 청년들 덕분에 힘을 얻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일하는 청년들이 정말 착해요. 그래서 애들이 뭘 할 수 있는 모습을 보면 저는 그게 너무 좋아요. 이 친구들은 감사한 것도 그냥 감사하다고 표현하지 않아요. 세세한 이유를 들어가며 '점장님, 오늘도 맛있는 밥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거나, '점장님, 오늘도 많은 걸 배워서 감사합니다'라며 직접 말로 전해요. 뿐만 아니라 그런 메시지가 제 개인톡으로도 오는데, 그럴 때면 힘들었던 게 싹 가시는 느낌이죠."

많은 사업장이 일 적응에 느리고, 실수가 잦다는 이유를 들어 경계선지능인 고용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점장이 지켜봐 온 청년들은 교육이 제대로 이뤄진다면 충분히 일할 능력이 있는 잠재력이 있었다. 단지 그들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경계선지능인을 고용하는 업장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우리 청년들은 책임감도 강하고, 본인이 맡은 일에 큰 자부심을 느껴요. 사실 누군가는 설거지하는 게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근데 저희 직원들은 이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끼고, 이게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그 일에 대한 책임감도 있고요. 자기가 아무리 늦게 끝나도 그 일을 다 마무리하고 가는 청년들이거든요."

 홀 청소 중인 슬로우점 직원.
홀 청소 중인 슬로우점 직원. ⓒ 느린IN뉴스

슬로우점에서 정식 직원으로 일하며 실습생 교육을 담당하는 성찬씨는 "누군가에게 일을 가르치게 될 줄은 몰랐다"면서도 "저와 같은 친구들이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생겨 좋다"고 말했다. 성찬씨는 1년 동안 슬로우점에서 일하며 소통의 중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또한, 자신에게 '이타심'이라는 큰 변화가 생겼다고 전했다.

"슬로우점에서 1년 동안 일하면서 가장 크게 바뀐 점은 이타심을 배우게 되었다는 거예요. 같이 일하다 보니 저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같이 일하는 친구들을 챙기게 되더라고요. 앞으로 낙성대점에서 일하게 될 실습생들도, 그곳에서 일하면서 같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슬로우점 청년들은 일터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찾고, 사람들과 부딪치며 관계와 사회성을 배운다. 경계선지능인 고용이 가진 가능성과 가치는 멀리 있지 않다. '청년밥상문간에서 오래 일하고 싶다'는 청년과 '이곳에서 전하는 가치가 전국으로 퍼졌으면 좋겠다'는 점장님의 말처럼, 더 많은 경계선지능 청년들이 일어설 수 있도록 이 작은 가게에서 시작된 변화가 더 넓은 세상으로 퍼져 나가기를 기대한다.

 청년밥상문간 슬로우점 한 켠에 손님들의 응원 공간이 마련돼 있다.
청년밥상문간 슬로우점 한 켠에 손님들의 응원 공간이 마련돼 있다. ⓒ 느린IN뉴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느린IN뉴스에도 실립니다.(https://www.slowlearnernew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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