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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다. 퇴직한 뒤의 삶은 생각보다 바쁘다.
처음엔 "이제야 한가로이 쉴 수 있겠구나" 싶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무슨 얘긴지 실감이 났다.
퇴직 뒤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집안 내 역할 분담을 했다. 재활용 분리수거, 음식물 쓰레기, 빨래 걷기 등 가사 노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설거지가 있었다.
퇴직 후, 밥상도 조금 달라졌다.

▲퇴직 뒤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집안 내 역할 분담을 했다.가사 노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 이점록
현직에 있을 때는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아침은 대충 때우고, 저녁은 야근이나 회식으로 밖에서 대충 해결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퇴직 후에는 아침, 점심, 저녁까지 삼시 세끼를 집에서 먹게 되었다(관련 기사:
33년 경찰 하다 퇴직한 저, 유튜브 시작했습니다 https://omn.kr/2cifa ).
요즘 항간에 떠도는 은퇴한 남편에 대한 호칭이 생각이 난다. 이른바 '영식님, 일식 씨, 이식 군, 삼식이' 등이 있다. 다소 비하하는 뉘앙스지만, 그런 말이 나온 맥락은 이해를 하고도 남는다.
퇴직하고 나면 남성들이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일지 모른다. 식사 후 늘어나는 그릇을 보면서 기분 좋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설거지를 시작했다. 처음엔 작은 결심이었다.
"여보, 오늘부터 설거지는 내가 할게!"
"아니 괜찮아." 하면서도 아내는 반기는 기색이 역력하다.
"많이 먹었으면 많이 닦아야지. 손에 물 덜 묻히게 해 줄게."
생각없이 했던 이 말 한마디가, 내 인생 2막의 길에서 작지만 큰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 집의 분위기를 더 좋게 바꾸는 '가화만사성'의 열쇠가 되었다.
자연스레 내 몫... 어떨 땐 억울하기도 했지만
처음에는 가끔 돕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자 나는 주방에서 물과 세제 거품을 마주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어느새 설거지는 나의 '일'이 되었다.
사실 은근히 억울했다. '왜 내가 해야 하지?'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었다. 설거지를 하면 집안 분위기가 달라진다.
"여보, 설거지해 줘서 고마워."
아내가 웃으며 던진 이 말 한마디가 그 날 피로를 싹 씻어주었다.
한편, 설거지를 하면서 느낀 것. 설거지는 단순히 그릇을 닦는 일만은 아니었다. 설거지를 깨끗하게 하면 마음도 깨끗해진다. 그릇을 헹구면서 머릿속도 정리된다.

▲설거지를 깨끗하게 하면 마음도 깨끗해진다. 그릇을 헹구면서 머릿속도 정리된다.(자료사진) ⓒ jccards on Unsplash
나는 설거지를 하는 와중에 그날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반성도 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시간도 된다. 어떨 땐 거의 명상에 가까운 느낌도 든다.
운동 효과도 있다. 허리를 숙였다 폈다 하는 동작, 물을 틀고 닦는 반복적인 움직임은 은근히 근력 운동이 된다. 특히 손가락을 꾸준히 움직이는 덕에 치매 예방에도 좋다고 한다.
가장 첫 번째로는, 가정의 평화를 지킨다는 점. 남편인 내가 설거지를 하면서 아내의 잔소리가 줄고, 가족 간의 관계가 더 원만해졌다. 단순한 가사 노동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배려와 사랑의 표현이 된 것이다.
이쯤 되면 '남편의 설거지가 가정을 지킨다'라고도 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마지못해 시작한 일이지만, 이제는 '내 몫'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 아내는 내가 설거지를 하니 집안일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었다며 여유를 되찾았고, 그 덕분에 우리 부부는 대화도 많아지고 웃음도 늘었다.
이제는 나도 설거지가 끝나면 뿌듯함을 느낀다. 깨끗한 주방을 보면서 "오늘도 우리 가족을 위해 좋은 일 했다"는 작은 자부심도 생긴다.
소소한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이벤트를 더 구상해봐야겠다. 늘 오는 오늘이지만, 더 나은 날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만약 당신이 남성이고, 퇴직 후 새로운 역할을 찾고 있다면? 오늘은 설거지를 한 번 해볼 것을 추천한다. 가정의 평화는 물론, 내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