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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넷플릭스에서 방영되고 있는 <폭싹 속았수다>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처음에 제목만 들었을 때는 '완전히 속았습니다'라는 뜻인 줄 알았다. 요망진 반항아 애순이가 자신만 바라보는 팔불출 무쇠인 관식이와 결혼하면서 인생에 꽃길만 걸을 줄 알았는데 고생만 하며 살았다고, 완전히 속았구나 한탄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보니 '폭싹 속았수다'는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이라고 한다. 아이유의 그야말로 요망진 연기와 박보검의 묵직한 연기 변신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제목처럼 극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의 수고를 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진다.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 의 한장면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 의 한장면 ⓒ 넷플릭스

1화에서는 쉬지 않고 억척스럽게 물질을 하며 딸을 뒷바라지하는 애순 엄마의 수고가 가슴을 찡하게 했다. 죽음을 앞두고도 딸 걱정으로 애를 태우는 애순 엄마의 모습에 이미 팔순을 넘긴 내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았다.

그런데 누구보다 가슴을 찡하게 만든 인물은 애순의 남편이자 금명의 아버지인 양관식이었다. 세상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어린 나이에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어 가장의 무게를 견디며 소처럼 일만 하는 관식을 보면서 우리네 아버지들의 수고가 새삼 크게 와 닿았다.

평생 쉬지 않고 일만 하면서 열심히 살았으면 20년, 30년 뒤에는 당연히 편안하고 윤택한 생활이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데, 드라마 속에서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가난은 쉽게 그 고리를 끊어낼 수 없고, 가난을 대물림 받은 자식들에게 부모의 수고는 그저 궁상과 무능으로 퇴색해버린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 ⓒ 넷플릭스

내 나이는 극 중 인물로 보면 애순과 관식의 딸인 금명에 가깝지만, 결혼 생활을 30년 가까이 해온 나는 애순과 관식 부부에게 더 감정이입이 되었다. 드라마가 세월의 흐름을 따라 전개되는 걸 보면서 우리 부부가 함께 지나온 시간들도 드라마의 장면들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눈을 돌리니 내 옆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편이 보였다.

첫 아이를 낳고 나서 내가 직장을 그만두는 바람에 남편은 이제까지 외벌이로 우리 가정을 책임져 왔다. 물론 고된 육체노동을 하며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가장들과 비교하면 비교적 수월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느끼는 책임감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남편이 며칠 전 환갑을 맞았다. 환갑은 까마득하게 먼 미래의 일인 줄만 알았는데, 세월이 무심하게도 어느새 그 나이가 되어 버렸다.

"환갑을 맞은 기분이 어때?"
"나는 이 나이가 되면 뭔가 다 정리가 되고 여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갈수록 고민이 더 많아지네."

얼마 전 입원을 하셨던 구순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우리의 부모 세대는 환갑의 나이에 부모님이 거의 대부분 돌아가신 뒤라서 자식들만 걱정하며 살면 되었지만, 지금 우리 세대의 가장들은 자식들 뒷바라지에 연로하신 부모님까지 그 책임의 무게가 훨씬 더 무거워진 것 같다.

그런 남편이 안쓰러워서 힘을 낼 수 있도록 남편의 환갑에 작은 파티를 열어주기로 했다. 요즘 같은 백세시대에 환갑이면 아직 젊은 나이인데 환갑파티는 좀 과한가 싶기도 했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수고하는 관식을 위로해주고 싶었던 마음이 고스란히 우리 집 가장에게로 향했다.

딸들과 함께 거실 창문에 남편이 보면 힘이 날 만한 문구를 넣은 축하 현수막을 걸고, 알록달록한 빛깔의 풍선으로 장식을 했다. 테이블 위에는 생화로 장식된 케이크와 꽃다발을 놓고, 줄을 잡아당기면 꽃가루와 돈다발이 떨어지는 이벤트 박스도 매달아 놓았다. 또 생일 선물과 맛있는 음식도 준비했다.

 남편의 환갑파티
남편의 환갑파티 ⓒ 심정화

평소에 요란스러운 걸 좋아하지 않는 남편이 행여나 우리가 준비한 이벤트를 불편해 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남편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기뻐했다. 쑥스러워하면서도 현수막에 쓰여있는 문구를 큰소리로 읽기도 하고, 풍선 장식 앞에서 활짝 웃으며 사진도 찍었다.

아이들이 준비한 선물을 한 개씩 풀어보고 맛난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비록 하루 저녁의 작은 이벤트였지만, 남편이 그동안의 수고를 위로 받고 가족들의 사랑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랐다.

다음날, 출근을 한 남편이 가족 단톡방에 감사의 말을 전해왔다.

"어제 생일은 60년 인생에서 가장 호화롭고 즐거운 잔치였어. 음식 준비, 파티 장식 등 여러 가지로 준비해 준 엄마에게 고맙고, 아울러 생일 선물, 예쁜 케이크 준비해준 딸들도 너무 고마워~"

원래 표현을 잘 못하는 사람인데 이런 감사 인사까지 올린 걸 보니 내심 감동을 많이 받았던 모양이었다. 별것도 아닌 작은 이벤트였을 뿐이었는데, '60년 인생에서 가장 호화로운 잔치'였다는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여보, 60년 동안 아들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살아오느라 폭싹 속았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블로그와 브런치스토리리에도 실립니다.이 기사는 제 블로그와 브런치스토리리에도 실립니다.


#폭싹속았수다#환갑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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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화 (jhsim69) 내방

세상사는 재미와 따뜻함이 담긴 글을 쓰며 살아가는 것이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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