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부산의 부산진 시장 부근에서 ‘전두환 정권 타도’,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외치며 행진하고 있는 시위 군중들의 모습이다. 시위대가 들고 가는 플래카드에는 “폭압의 사슬끊고 민주화로 통일로!”라고 적혀있다. ⓒ 사단법인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1980년대는 극악스러운 폭정과 이에 맞선 뜨거운 민중운동이 성장하는 상극의 시대였다. 그동안 노동자들의 시위를 외면했던 '넥타이 부대'가 기꺼이 참여하고 극소수를 제외하고 역시 외면했던 여성들이 조직화되었다.
1984년까지만 해도 한국의 여성운동은 일부 종교여성단체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5공정권의 부천서 여대생 성추행사건을 계기로 '여성평우회', '여성의 전화'에 이어 'KBS TV 시청료 거부' 운동에 다수 여성들이 참여하면서 1987년 2월 '한국여성단체연합'이 발족하였다.
출범 초기의 24개 단체에서 여성노동자·종교·여성농민 등 각계각층의 군소 여성단체 24개가 뜻을 함께 하였다. 1987년 3월8일 발표한 <87여성운동선언>은 한국여성운동을 사회민주화운동의 선상에 위치지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장문이므로 여기서는 주요 부분을 뽑았다.
87여성운동선언
87년은 민족의 자주화와 민주화 달성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결단과 실천이 요구되는 해이다.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한국여성단체연합은 민족의 현실 속에서 한국 여성운동이 나가야 할 바를 밝히고자 한다.
오늘날 민족의 현실은 외세에 의해 강요된 민족분단이 남북한간의 군비경쟁과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더욱 고착화되고 있으며,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민족의 염원과는 달리 한반도를 핵전쟁의 위험으로까지 내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 20년간 진행된 외국 자본과 외국사정에 전적으로 의존한 경제정책은 날로 늘어가는 외채부담과 경제잉여의 해외유출로 인해 국민경제를 예속화시키고, 미국의 계속되는 수입개방 압력은 이 땅을 경제적으로 식민지화하고자 하는 외세의 논리이다.
소수의 자본가와 외세의 이익을 대변하는 현 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해 내각책임제라는 형태의 음모를 노골화시키고, 터져 나오는 국민들의 반외세 반독재의 외침을 누르기 위해 고문과 구속에 의한 사건조작과 파렴치한 성고문, 살인고문마저 서슴치 않고 있으며 보도지침을 통한 언론통제로 국민들을 호도하고 있다.
하루 10시간이 넘는 장시간노동과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기아임금으로 여성들은 노동현장으로 내몰리고 있다. 농촌에서는 무분별한 외국 농·축산물수입과 저농산물 가격으로 농가경제는 파탄에 이르고 농촌의 여성은 힘겨운 농사와 가사에 허리 필 날이 없다. 민족의 대제전으로 선전되는 88올림픽 개최의 이면에는 생계 대책과 잠잘 자리조차 빼앗긴 영세행상인, 노점상, 도시빈민여성의 아픔이 있다. 또한 외화획득이라는 미명하에 정책 산업화된 기생관광은 가난한 우리의 딸들을 국제적인 매춘부로 만들고 있다.
여성운동의 양적확산이나 질적 발전을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이 있다.
첫째, 각 단체별로 여성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는 다양한 실천 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대중적인 실천 활동은 여성 일반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특히 민중의 생존권 확보와 민주화 달성을 위한 투쟁을 중점적으로 행해야 한다.
둘째, 올바른 여성운동의 방향을 정립하는 문제이다. 남녀평등과 인간해방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이론의 정립이 필요하다.
셋째, 연대의 방식이다. 사건에 따른 단속적인 대책활동 중심의 연대가 통일된 입장 속에서 지속적인 실천 활동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방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민족의 자주화와 민주화 달성을 위한 범국민적인 투쟁에 여성운동이 앞장 서야 한다.
민족의 자주화와 민주화에 앞장서는 여성운동으로, 생존권 확보를 위한 치열한 운동으로, 남녀평등쟁취를 위한 끈임 없는 투쟁으로서만이 여성운동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음을 확신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87년 여성운동의 지표를 설정하고자 한다.
우리의 주장
-. 외세에 의해 강요되는 민족분단의 고착화와 한반도의 핵 기지화를 반대한다.
-. 국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반민족적인 정치, 경제, 군사정책을 반대한다.
-.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와 민중의 생존권 투쟁을 불법화하고 있는 각종 악법을 철폐하라.
-. 전근대적인 가족법을 개정하고 민주적이고 평등한 남녀평등권을 쟁취하자.
-. 여성 노동자의 모성과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8시간 노동제와 최저생계비 보장, 노동 환경의 개선과 모성보호를 위한 제정책을 수립하라.
-. 여성농민의 모성과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저농산물 가격정책과 외국 농·축산물 수입을 즉각 중단하고 농가부채의 탕감과 모성보호를 위한 각종 시설과 탁아소 설치하라.
-. 빈민여성의 모성과 생존을 위협하는 각종 철거정책을 즉각 중단하라.
-. 여성을 상품화하는 기생관광정책을 중단하라.
-. 취업·승진·퇴직에서의 여성차별을 즉각 시정하라.
한국여성단체연합 (주석 1)
주석
1> <80년대 민족·민주운동>, 248~249쪽.
덧붙이는 글 | [광복80주년명문100선]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