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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연극으로 데뷔해 영화와 연극, 드라마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배우 차유진의 사는이야기입니다.
서촌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는, <오마이뉴스>에 글을 연재하면서 가끔씩 성사되는 편집기자와의 점심 회동 덕분이다. 북촌을 관광삼아 가본 적 있어도 서촌은 생소하고도 늘 궁금했던 곳이었다.

한적한 평일 오전, 버스에 몸을 실고 사직단 정류장에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기만 하면 고즈넉한 서촌의 골목길이 펼쳐졌다. 사직공원 담벼락을 길잡이 삼아 기와를 얹은 고가옥들을 둘러보며 동네 분위기를 찬찬히 음미했다.

느긋한 동네, 서촌

 서촌의 가장 큰 매력은 골목을 마주하고 옹기종기 들어서 있는 작은 상점들이다.
서촌의 가장 큰 매력은 골목을 마주하고 옹기종기 들어서 있는 작은 상점들이다. ⓒ 차유진

서촌은 조선시대부터 근현대사까지 역사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세종대왕, 효령대군, 안평대군 등 왕족들이 주로 거주했었고, 이방원은 서촌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또한 친일파였던 이완용과 윤덕영이 서촌에 거대한 토지를 차지해 대저택을 짓고 살기도 했다.

정치,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 외에도 서촌은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을 배출했다. 정선의 <몽유도원도>, <인왕제색도>와 같은 조선의 걸작들과, 일제 강점기 때는 이상, 윤동주, 이육사, 염상섭, 이광수, 서정주, 구본웅, 이중섭 외에도 현재에 이르러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의 서점까지 터로 자리잡고 있다.

정치적, 문화적 토양이 역사의 굴레 안에서 한 데 뒤섞여 다져온 탓일까, 서촌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한 시대를 풍미한 권세가와 예술가, 문인들이 남긴 옛스럽고 고아한 흔적 외에도, 모진 세파를 거친 세월의 내공이 묵직하고도 견고하게 마을을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닐런지...!

그러한 역사의 정취를 벗삼아 서촌 골목을 누벼본다. 자칫 지나칠 뻔한 '이상의 집'은 현세의 이웃들과도 잘 어우러져 지내려는 듯, 드높은 명성을 뒤로 하고 작가의 유품들과 더불어 고요하게 숨쉬고 있었다. 오래전 공연했던 작품에서 이상의 아내 '변동림' 역으로 무대에 선 적이 있어서인지 가옥에 들어선 순간, 마치 시간 여행을 떠나온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서촌 거리
서촌 거리 ⓒ 오마이뉴스 최은경

무엇보다 서촌의 가장 큰 매력은 골목을 마주하고 옹기종기 들어서 있는 작은 상점들이다. 카페, 식당, 빵집, 소품가게 등 서너평 정도의 공간 안에서 서로의 존재감을 그윽하게 드러내며, 따사로운 햇살을 각자 배정받은 크기로 품고 있었다.

공간 안에 소박하게 마련된 테이블 수가 수선스런 북적임 대신, 오시는 손님 한 분 한 분을 정성스럽게 맞이하겠다는 마음으로 전해져 온다. 자본주의적 사고로 돈을 쫓기 보다 소소한 행복의 가치에 더 집중하려는 듯, 삶에 대한 느긋한 자세가 물씬 풍겨져 온다.

방문객이 아닌 주민으로 카페에 앉아 한가로이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니, 바삐 내달리는 시간에게 잠시 여유롭게 머물다 가라고 점잖게 속삭이는 듯 하다. 그래서인가, 서촌에 오면 천천히 흐르는 그들만의 시간에 걸음 속도를 맞추고 싶어진다.

재개발로 사라질 낭만

 서촌 골목을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모습.
서촌 골목을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모습. ⓒ 오마이뉴스 최은경

기자님과 밥을 먹는 날이면 차를 마시러 다음 장소로 이동하곤 했다. 기자님은 자주 오가는 길이라 그런지 뒷짐을 진 채로 마실 다니듯 서촌 구석구석을 누볐다. 그 뒷태를 부러운 시선으로 쫓으며 관광객 마냥 뒤따른다. 언젠가 나도 기자님처럼 앞장서서 서촌 가이드가 되어보길 희망하며 말이다.

예쁜 카페에 앉아 최근 근황 소식부터 요즘 드는 생각들까지 쉴새없이 정보를 나눌 때가 많다. 오래전부터 내려온 동네의 문예적 기운 덕에, 담소 안에서 신선한 소재들도 제법 얻어진다. 그녀와의 만남은 언제나 서촌 탐방에 대한 설렘을 동반한다. 다음에 만날 때는 또 어디를 가게 되려나 하고.

 식사 후 커피와 디저트.
식사 후 커피와 디저트. ⓒ 차유진

최근 우리 아파트 단지 뒷편에 주택 재개발이 시작되었다. 높고 긴 펜스가 드넓은 평야를 가리고, 아파트 촌이긴 해도 논밭도 있고 개천이 흘러 한적한 시골의 분위기를 맛볼 수 있었건만, 그랬던 낭만의 면적은 현저히 줄어 들었다. 머지 않아 새 단지가 완공되면, 맑은 날 선명히 보이던 북한산도 시야에 가려질 전망이다.

달라이 라마는 욕심의 반대가 무욕이 아닌 잠시 머무름에 대한 만족이라고 했다. 서촌의 시간은 급박하게 다가오는 미래를 쫓기보단, 삶을 유연하게 품으며 오늘도 고풍스럽게 흐르고 있다.

하루하루 거친 풍랑 속에서도 자기만의 속도로 째깍이는 시계 바늘을 간직한 곳,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켜주는 토대가 되어준 마을, 어떻게 서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서촌#이상#세종대왕#맛집#CH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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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유진 (mayaok) 내방

직업은 배우이며, 끄적끄적 글쓰는 취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나를 구해줘, SNS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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