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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하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중 기병들이 말 달리는 장면 ⓒ KBS
옥상이나 말에서 떨어지고, 계단에서 구르고, 격투를 벌이고, 불이 붙고, 교통사고를 당하고…. 영화·드라마 속, 실제라면 목숨을 잃는 아찔한 장면에서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것이다. '저 사람 누굴까, 괜찮을까?' 하고.
이들은 '무술연기자'로, 배우가 직접 하지 못하는 위험한 행위를 대신 연기해 스크린의 공백을 메운다. 스턴트맨이란 오랜 명칭이 있지만, 스턴트는 무술연기의 한 종류만 의미할뿐더러 여성 무술연기자를 포괄하지도 못해 적절한 명칭이 아니다. 단편적으로만 봐도 위험천만한 무술연기자의 삶은 어떤 노동으로 채워져 있을까? 3월 <일터>에서는 27년 차 무술연기자인 김태득 무술연기자지부장(한국방송연기자노조)을 만나 이들의 노동 이야기를 들었다.
"이리 대단한 노동인데… 4대 보험이 안 된다고?"
"27년 차지만, 저는 노조 일을 하느라 현장 일을 안 한 진 꽤 됐어요. 일을 시작한 99년과 지금은 노동환경이 많이 변했죠. 처음 일을 시작하고 놀랐던 기억이 나요. '이런 대단한 일을 하는데 4대 보험이 안 된다고?'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죠. '이렇게 대단한 노동을 하는데, 노동법 보호를 못 받는다고?'"
2000년대의 무술연기자는 '무법 사각지대'에 있었다. 무술연기자를 포함한 예술인에게 산재보험 가입 자격이 주어진 때는 2012년이 지나서다. 이전엔 국가의 보호망이 전무했다. 2005년 무술연기자지부가 만들어지고 비로소 무술연기자의 권리 찾기도 시작됐다. 2018년 한국방송연기자노조가 대법원에서 노동조합법상 노동자 지위를 인정받고 단체협약을 성사시키면서 처우가 눈에 띄게 개선됐다.
"영화, 드라마에 말 타는 장면이 많죠? 말이 위험해요. 가령, 풀이 무성한 개활지를 단체로 말을 타고 달려요. 근데 땅이 평평하지 않거든요. 같이 전속력으로 달려요. 그러다 움푹 팬 곳에 말 발이 빠져요. 위에 탔던 사람은 넘어져요. 말은 보통 때면 사람 안 밟는데, 전속력으로 달리니까 사람이 밟히는 거죠. 또, 사극에서 여럿이 말을 타고 도망치는 장면을 찍을 땐데, 구불구불한 소나무 길을 달리는데 거기 나뭇가지가 위험하게 나 있는 걸 모른 채 찍다가 뒤에 따라오는 애들이 다 나무가시에 찔리고 긁혀서 팔, 볼이 다 심하게 찢어진 거예요. 말이 다 잘 훈련된 게 아니라 여러 승마장에서 급조돼 오기도 하고요. 스트레스가 쌓인 말은 재갈도 물고, 발로 차고, 뛰면 안 멈추기도 해요. 손이 얼얼할 정도로 고삐를 잡고 있어요. 이때 미숙하면 낙마하는 거죠."

▲사극에서 흔히 보이는 승마 장면도 위험한 연기 중 하나다. ⓒ 한라스포츠 유튜브 갈무리
당시는 촬영 현장의 장시간 노동과 산업재해가 지금보다 심각했다. 낮밤이 바뀐 채 하루 두세 시간만 자고 내리 며칠을 일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밤 장면을 위해 밤을 새우고, 낮 장면을 또 찍으니 아침에만 눈을 붙이고 점심 전에 일어났다. 그런데 액션 장면만 또 몰아서 찍으니 촬영 기간 내내 이렇게 지내야 했다. 게다가 이동 차량도 지원되지 않아, 문경, 제천, 안동, 용인 등 제작사가 부르면 알아서 찾아가야 했다.
"사극은 유독 겨울에 물에 빠지는 장면이 많아요. 대개 회상 장면이죠. 시청자들이 보는 건 한 번이지만, 무술연기자는 한 장면을 위해 숱하게 빠져요. 10번 넘게, 밤새워 찍고요. 물이 진짜 얼음장 같죠. 모닥불 피우고 따뜻한 물도 주는데, 바쁘니까 이게 원활하지 않을 때가 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횃불도 참 위험해요. 화상도 그렇지만, 그때 횃불 장면 찍고 난 무술연기자들, 끝나고 나면 얼굴이 시커멓게 됐거든요? 속도 아프고. 아마 예산 때문에 등유 같은 제일 싼 기름을 썼을 텐데, 그런 게 다 몸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요? 50~60대가 된 무술연기자들 보면 후유증으로 몸이 아픈 사람이 많아요."
무술연기자도 노동자다
작품에 들어가지 않아도 마냥 한가하지 않다. 오전은 보통 훈련 시간. 무술연기자의 소속팀은 알려진 곳만 20여 개로 팀마다 체육관이 있다. 연기자들은 이곳에서 기초체력, 발차기, 무기술, 승마 등 훈련을 한다. '데모 영상'도 만든다. '무술연기 초안' 촬영물이다. 제작사가 부탁하기도 하고, 무술연기 연구팀이 자체 진행하기도 한다. 요새는 편집을 맡는 무술팀도 늘었다. 예전엔 무술감독이 편집기사 옆에서 액션 장면을 보며 편집 조언을 했다면, 이젠 아예 무술감독이 이를 가져와 직접 편집한다. 김 지부장은 "데모도, 편집도 페이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아서 권리 침해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처우는 어떨까. 김 지부장은 연기자마다 받는 출연료(회차 당)가 천차만별이고 촬영 횟수도 다 달라 단순히 평균을 낼 수 없지만, "일감이 많던 코로나 전엔 한 달 15일 정도 일한다고 봤을 때 평균 300만 원 정도 되지 않을까"라고 추측했다. 출연료 책정 체계도 일률적이지 않다. 드라마냐, 영화냐, OTT냐에 따라 다르고, 등급제
[1]를 적용받는지에 따라서도 다르다. 등급제를 기준으로 보면, 무술연기자는 10등급부터 시작한다. 출연료 산정은 최저 6등급에서 시작되지만, 제작사의 저가 경쟁(덤핑) 전략으로 연기자의 출연료가 동반 하락하는 걸 막고자 노조가 최저선을 10등급으로 강력히 못 박았다. 여기에 야외수당, 유류비 등의 수당이 추가되는데, 드라마 제작사들은 '편도 유류비'만 준다. 김 지부장은 "이런 불합리한 문제가 산적해 있어서, 노조가 할 일이 여전히 많네요"라고 말했다.
김 지부장은 일 하면서 계약서는 써본 적이 없고 이 문제는 지금도 여전하다고 했다. 제작사는 무술감독하고만 용역계약을 한다. 무술감독이 사람을 모아 팀을 꾸리지만 제작사는 연기자들과 개별 계약을 하지 않는다. 이른바 '무늬만 프리랜서', 계약서도 쓰지 못하는 프리랜서다.
김 지부장은 "연기자들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성은 아직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며 "그래서 단체협상을 체결하고 사용자와 교섭은 할 수 있지만, 근로기준법의 보호는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실질을 보면 방송사(혹은 제작사)가 지정하는 역할과 대본에 따라, 지정된 시간과 장소에서 개별적이고 직접적인 연출 지시를 받으며 일한다"며 "방송사(제작사)에 종속된 노동자"라고 했다. 그는 "우선은 제작사의 개별 계약과 표준출연계약서 작성이 보편화돼야 한다"며 "지금은 전혀 지켜지지 않는다"라고 했다.
불황에 생계난도…. 산재 책임도 무술감독에게 전가

▲"저희는 정규직도 안 되고 4대 보험도 안 되고 오직 출연료에 의지해 살아가는데 그 출연료가 3년간 안 나온다면 저희에게는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수단이 되거든요." (김태득 한국방송연기자노조 무술연기자지부장 2008.09.28.) ⓒ KBS 방송 <취재파일4321> 화면캡처
김 지부장은 "지금 당장은 업계 불황으로 무술연기자들의 생계가 가장 큰 걱정"이라고 했다. 무술연기자 중엔 한 해 1억 원도 넘게 버는 사람도 있지만, 여느 직장인들과 다름없는 생계형 연기자가 더 많다. 해마다 수입도 달라 어느 해는 5000만 원 이상을 벌고 어느 해는 1000만 원도 벌지 못한다. 김 지부장은 "지금 드라마·영화 현장에 일이 없어 이전엔 한 달 15일 일했다면, 지금은 한 번 나갈까 말까"라며 "조합원들 거의 전부가 비자발적 실업 상태로 배달, 일용직 등의 일을 병행해요"라며 걱정했다.
요새는 계약서 문구 수정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중대재해처벌법상 산업재해 책임을 무술감독에게 전가하는 게 큰 문제다. 과실로 인한 중대재해 책임까지 무술감독에게 지우는 조항인데 김 지부장은 "무술연기는 필연적으로 현장 소품을 깨곤 하는데 이에 대한 책임은 물론, 배우·보조출연자·스태프 등이 입는 재해에 대한 책임까지 포함된다"며 불합리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화약 옆에서 담배를 피워 사고가 발생할 정도의 고의·중과실로만 한정하는 문구 수정을 자주 한다"고 말했다. 김 지부장은 "이외에도 불합리한 조항이 각양각색인데 생활고에 시달리는 감독들은 그냥 감수하고 계약한다."며 "정부가 정한 표준계약서를 기준으로 두면 발생하지 않을 문제"라고 꼬집었다.
현재 무술연기자지부의 조합원은 600명가량, 노조 가입률은 97% 정도다. 무술연기자 대부분이 지부에 모여 있다. 김 지부장은 "바꿔야 할 문제가 많지만 희망을 더 많이 가지는 이유"라며 "모든 영상 제작물엔 얼굴을 감춰야 하는 우리 무술연기자들의 땀, 고통, 열정이 담겨 있다. 우리의 권리 보호에 사회도 관심을 가져 달라"고 말했다.
각주
[1] 한국 방송사를 중심으로 1970년대부터 형성된 연기자 출연료 책정·지급 관행으로, 성인 연기자의 경우 6~18등급까지 구분돼 기본출연료(10분), 일일연속극(30분), 미니시리즈(60분) 등의 출연료와 야외·철야 수당, 식비, 숙박비 등이 책정돼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의 필자인 손가영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선전위원입니다.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의 노동안전보건 월간지 <일터>에도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