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우리는 왜 그림을 못 그리게 되었을까>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퇴직한 김인규 선생님이 초등학교에 봉사수업을 하고, 오랜 경험과 연구를 바탕으로 출간한 책. ⓒ 김준정
책 <우리는 왜 그림을 못 그리게 되었을까>에는 아이들을 '잘 그린다'는 것에서 해방시키려고 한 미술교사의 노력이 담겨 있다. 책을 읽는 동안 선생님의 예상 밖의 제안과 격려에 눈을 반짝이는 아이들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저자인 김인규 선생님이 했던 신선한 시도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선생님은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에게 친구의 얼굴을 그리게 하고 5조각으로 자르게 했다. 자른 조각을 친구들과 물물 교환하여 원하는 그림 조각을 모으고, 조각을 새로운 형식으로 조합하게 했다.
"잘 그렸다고 여기는 아이들은 아쉬워하기도 했는데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오히려 홀가분해했다. 그림을 자르고 물물 교환을 시작하자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자신의 조각을 가지고 친구들과 1:1 교환을 해야 하는데 서로 원하는 그림과 바꿔야 하기 때문에 물건을 사고파는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11세 아동들의 활동자신이 그린 그림을 잘라 조각을 낸 친구들과 물물 교환을 하여 조합해서 새로운 그림을 만드는 과정이다.(김인규) ⓒ 김인규

▲11세 아동들의 활동조각낸 그림을 물물교환을 하여 조합해서 새로운 그림을 만든 결과물이다.(김인규) ⓒ 김인규
김인규 선생님은 "이런 활동은 개인적인 작업에 알게 모르게 깔리게 되는 경쟁심이라는 무거움으로부터 벗어나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아이들은 우리의 문화 속에서 형성된 "관습적인 기준"을 벗어나서 "나 자신에게서 기준을 발견"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과잉행동을 하는 학생에게도 김인규 선생님은 친구들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자유롭게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수수깡으로 조형물을 만드는 수업에서 한 학생이 친구들처럼 건물 형식을 만들지 않고 수수깡을 길게 잇기 시작했는데, 김인규 선생님은 계속할 수 있도록 창문을 열어주었다.
그 학생은 선생님이 장난을 친다며 혼낼 줄 알았는데 오히려 격려를 해주자 신이 나서 교실밖까지 수수깡을 이어갔고, 흥미가 생긴 친구들까지 합세하여 복도와 계단까지 수수깡줄을 만들게 되었다.

▲10세 아동의 활동수수깡을 이어 교실에서 복도를 거쳐 계단으로 내려가고 있다.(김인규) ⓒ 김인규
김인규 선생님은 누구나 자기 충동을 가지고 있고, 그 충동은 대부분 일시적인 데서 그친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자기표현의 원형을 가지고 있으니 교사는 학생들이 충분히 표현할 수 있도록 최대한 보장하고 지지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책을 읽다 보니 교실 안 낮은 나무 의자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던 시절이 떠올랐다. 어릴 때 나는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집에서 방학 숙제로 내준 그림을 그릴 때가 지금도 정겨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한 번은 가족끼리 피서를 간 일을 그린 적이 있는데, 나와 오빠, 아빠의 얼굴과 그날 입었던 옷, 텐트를 떠올리다 보니 실제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색을 칠하기 위해 그날 미처 보지 못한 하늘과 강물의 색을 상상하다 보니 실제와 상상이 합해져서 새로운 세계가 내 손끝에서 펼쳐지는 것 같았다.
강 저편에서 아버지는 그물망을 펼치고 있고 그 앞으로 오빠와 내가 텀벙거리며 고기를 몰아갔다. 그러다 장어가 걸렸는데, 나는 뱀인 줄 알고 혼비백산했지만 아버지는 껄껄껄 웃었다. 그물에서 꿈틀거리는 거멓고 굵은 장어와 호탕하게 웃는 아버지의 표정을 그리는 내 얼굴에도 아마 연한 미소가 어렸을 것이다.
책을 읽고 나서 알 것 같았다. 내가 방학 숙제로 내준 그리기를 좋아했던 이유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 자유롭게 감정에 빠지고 그걸 표현할 수 있어서였다는 걸. 아이들로 빼곡히 들어찬 교실에서 각자 자신에게 몰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평화로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우리는 왜 그림을 못 그리게 되었을까>는 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퇴직한 김인규 선생님이 초등학교에 자원봉사로 수업을 하고, 경험과 연구를 담아서 2025년 2월에 출판한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