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요즘 국내외 정세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안에서는 윤석열이 내란으로 나라를 어지럽히고, 밖에서는 트럼프가 마가(MAGA, Make America Great Again)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내우외환'이라는 말이 요즘처럼 잘 들어맞는 상황을 찾아보기도 힘들 겁니다.

윤석열의 내란은 구속 취소라는 돌발변수가 생겼지만, 보수논객 조갑제씨도 예측한 대로 헌법재판소가 '8 대 0' 만장일치로 탄핵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워낙 위헌·위법 행위가 수두룩하고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리되면 내란은 한고비를 넘기면서 진정의 길로 들어설 겁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불러일으키는 외풍은 예측불허·통제 불능의 평지풍파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습니다.

한국 안보·경제에 날벼락 같은 트럼프 공세

 2월 28일(현지시간)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워싱턴 DC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격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2월 28일(현지시간)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워싱턴 DC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격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트럼프 발 태풍이 안보와 경제를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한국에 줄 충격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충격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트럼프는 안보 문제에서 '동맹'을 의식하지도, 중시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최대 관심은 오직 미국의 이익뿐입니다.

지난 3년 동안 침략자 러시아에 맞서 함께 싸웠던 우크라이나와 유럽 국가를 순식간에 뒤로 밀쳐내고 러시아와 손잡는 태도를 보면서, '국제정치 세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라는 전 영국 외무장관 파머스톤 경의 말이 새삼 현실감 있게 다가옵니다.

트럼프의 러시아 접근은 국제전략 차원에서 이해할 구석이 전혀 없는 게 아닙니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소련 견제를 위해 중국을 끌어들였듯이, 이번엔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의 부상을 억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는 '역 닉슨 전략'을 취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연일 터뜨리는 관세 폭탄과 자국 중심의 산업정책 남발은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국제전략 따위가 끼어들 틈새가 없습니다. 가깝고 먼 나라, 크고 작은 나라, 동맹국과 적국을 구분하지 않는 무차별 난사입니다. 이전 정권이 했던 약속이나 협정도 깡그리 무시하고 오로지 자국 이익만 전면에 내세웁니다.

동맹도 친소 관계도 무시하는 트럼프의 안보·경제 공세에, '한국판 마가(Make Aliance Great Again, 동맹을 다시 위대하게)'로 대응해야 한다고 말장난하는 전직 외교부 고위 관리도 있으니, 헛웃음이 절로 나오게 됩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는 꼴이 바로 이런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MAGA 정책의 '시범 케이스' 된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트럼프의 무차별 안보·경제 공세 속에서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국이 그의 '시범 케이스'에 오르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지금 군대는 어떤지 모르지만, 예전 군대에는 시범 케이스라는 게 있었습니다. 누구 한 사람을 찍어 매우 엄하게 다스림으로써 전체의 기율을 다잡는 공갈포 수법입니다. 아마 윤석열이 국회에서 탄핵 소추를 당하지 않았다면 득달같이 워싱턴으로 달려갔을 것이고, 트럼프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보여주기' 시범 대상으로 삼았을지도 모릅니다. 상상만으로도 아찔한 장면입니다.

2월 28일 우크라이나 전쟁 종결 문제를 논의하러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트럼프 대통령과 J.D. 밴스 부통령이 합세해 미국의 말을 순순하게 따르지 않는 그를 공개적으로 저격했습니다. 세계 각국을 대상으로 한 전형적인 보여주기 행동입니다.

아무리 미국의 위세가 하늘이 찌른다고 해도 부통령이 한 나라의 대통령에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무례하다"라고 직격하는 것은, 외교적으로 있을 수 없는 모욕입니다. 약소국이 강대국의 무자비한 횡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에 그런 경험을 가진 나라의 시민으로서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낍니다. 한편, 이런 모욕을 당하지 않으려면 기본적으로 내 나라는 내가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어느 유력 신문사의 칼럼니스트는 젤렌스키가 당한 모욕을 보면서 조선 시대 인조가 겪은 '삼전도의 굴욕' 사건이 생각난 모양이지만, 저는 2019년 7월 일본이 한국에 가한 두 건의 외교적 무례 사건을 반사적으로 떠올렸습니다.

잊지 못할, 한국 대사를 향한 일본 외상의 '폭언'

 일본 정부가 자국이 한국에 제안한 '제3국 중재위원회'의 설치 시한(18일)까지 한국이 답변하지 않았다며 지난 2019년 7월 19일 일본 외무성에 초치된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오른쪽)가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무상과 대화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자국이 한국에 제안한 '제3국 중재위원회'의 설치 시한(18일)까지 한국이 답변하지 않았다며 지난 2019년 7월 19일 일본 외무성에 초치된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오른쪽)가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무상과 대화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19년 7월 19일, 고노 다로 일본 외상이 외무성으로 남관표 주일 대사를 불렀습니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노동 판결에 불만을 가진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가 청구권 협정에 따른 일본의 중재 제안에 응하지 않은 데 항의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그때 고노 외상이 한국 정부 입장을 설명하던 남 대사의 말을 도중에 끊고 험한 인상을 쓰며 "극히 무례하다"라는 폭언을 내뱉었습니다. 기자들이 공개적으로 사진을 찍고 취재하는 중인환시(衆人環視)리에 일어난 일입니다.

두 번째 장면은 그보다 일주일 전에 벌어졌습니다. 일본 정부가 7월 초 기습적으로 반도체 핵심 소재 금수조치를 포함한 전략물자 수출규제 조치를 했습니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 동원 판결에 대한 보복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7월 12일 통상산업부 과장 2명이 급히 일본 경제산업성을 찾았습니다. 이때 일본 쪽은 한국 대표를 일부러 창고처럼 보이는 허름한 사무실로 안내했습니다. 회의 이름도 화이트보드에 A4용지로 인쇄해 대충 붙여 놓고, 악수도 거부한 채 한국 대표를 맞았습니다. 노골적인 냉대를 연출하는 게 목적인 듯했습니다.

 일본 정부의 한국 수출 규제 강화 조치와 관련한 양국 과장급 첫 실무회의에 참석한 산업통상자원부의 전찬수 무역안보과장(오른쪽부터)·한철희 동북아 통상과장이 지난 2019년 7월 12일 도쿄 지요다구 경제산업성 별관 1031호실에서 일본 측 대표인 이와마쓰 준(岩松潤) 무역관리과장·이가리 가쓰로(猪狩克郞) 안전보장무역관리과장과 마주 앉아 있다.
일본 정부의 한국 수출 규제 강화 조치와 관련한 양국 과장급 첫 실무회의에 참석한 산업통상자원부의 전찬수 무역안보과장(오른쪽부터)·한철희 동북아 통상과장이 지난 2019년 7월 12일 도쿄 지요다구 경제산업성 별관 1031호실에서 일본 측 대표인 이와마쓰 준(岩松潤) 무역관리과장·이가리 가쓰로(猪狩克郞) 안전보장무역관리과장과 마주 앉아 있다. ⓒ 연합뉴스

당시 오사카 총영사였던 저는 이 두 장면을 텔레비전 뉴스로 접하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모욕감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장면을 두고두고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사건으로 마음속 깊이 저장해 놨습니다. 그때 가장 아쉽게 느꼈던 것은, 고노 외상이 한국의 특명전권대사에서 공개적으로 모욕적인 언사를 할 때 그 자리에 있던 남 대사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등의 어떤 항의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제가 확인한 바로는 그 이후에도 한국 정부가 이 사건에 대해 일본 정부에 어떤 항의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문재인 정권은 일본이 전략물자 수출 금지라는 보복 조치를 하자, 역으로 한국의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산업을 키우는 기회로 삼아 상당한 성과를 거뒀습니다. 일본 안에서조차 제 발등을 찍었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윤석열 정권이 '역사 거꾸로 돌리기'로 정책을 선회하면서 모두 도루묵이 됐지만 말입니다.

실용 외교와 실력 양성으로 위기 돌파해야

젤렌스키와 한국의 주일 대사가 미국과 일본에 당한 외교적 모욕을 돌아보면, 강대국은 상황에 따라 자국의 이익을 위해 언제든지 약한 나라의 체면과 이익을 태연하게 짓밟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인권 같은 겉치레마저 벗어던지고 이익만을 내세우는 트럼프 시대에는 이런 일이 더욱 노골적으로 벌어질 게 뻔합니다.

미국과 일본, 중국, 러시아보다 작은 한국이 할 일은 자명합니다. 우선 변화하는 세상을 잘 읽고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동맹과 진영, 가치를 무시하는 세상이 왔는데도 거기에 매달리는 건 그냥 앉아서 당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빨리 실용적인 자세로 전환해 국익을 지키는 데 모든 힘을 쏟아야 합니다. 또 나라가 모욕당하지 않으려면 그를 물리칠 힘과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젤렌스키가 백악관에서 모욕적 발언에 맞서 끝까지 자기 말을 한 것은 그래도 자국의 군사 지휘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군사 지휘권을 미국에 맡기고 있는 한국 대통령이었다면 과연 그런 대거리라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은 건 저의 과민한 상상일까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젤렌스키#윤석열#미국외교#일본외교#실리외교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태규 (ohtak) 내방

한겨레 논설위원실장과 오사카총영사를 지낸 '기자 출신 외교관' '외교관 경험의 저널리스트'로 외교 및 국제 문제 평론가, 미디어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일관계를 비롯한 국제 이슈와 미디어 분야 외에도 정치, 사회, 문화, 스포츠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다. 1인 독립 저널리스트를 자임하며 온라인 공간에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


독자의견0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