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지영 변호사 (자료사진) ⓒ 권우성
울보 변호사.
책을 읽다가 떠오른 다섯 글자였다. 곳곳에서 눈물과 마주했다. "우리는 부둥켜안고 울었다"거나 "서로 얼싸 안고 울었다"는 경우가 기쁨의 눈물이었다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의 일기에 나타난 '펭수'를 접하고 쏟아졌다는 눈물은 슬픔 그 자체였다. 병원에 달려가 붕대를 감고 있는 아파트 경비 아저씨를 마주하고서는 부끄럽고 죄송했다고 했다. 미안해서, 그는 또 울었다고 했다.
최근 나온 책, <안녕하세요, 한국의 노동자들>(클) 이야기다. 저자는 윤지영 변호사(직장갑질119 대표)다.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중견 법인에서 변호사 생활을 '계속' 해도 됐던 사람이다. 그러다 2010년 공익인권재단 공감에서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자 등을 지원하는 노동인권 변호사를 '굳이' 선택했다. 그렇게 걸어온 길을 돌아본 책이다.
어떤 식으로 돌아봤을까. 일단, 책 표지 디자인에서 어느 정도 엿보인다. 노동자들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는 제목 위, '노동자들의 법정 투쟁 이야기'가 먼저 눈에 띈다. 그 다음 노란 색으로 인쇄된 '노동인권 변호사가 함께 한'이 보인다. 노동자들이 주체이자 중심이고, 자신은 곁에 있었다는 의미를 부각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싸운 세월이 어느덧 15년, 쉽게 쌓일 시간이 아니다. 그의 눈물은 어떤 시간을 상징하는 것일까. 윤 변호사는 어떤 사람일까.
책 첫 문장부터 '돌직구'

▲최근 윤지영 변호사(직장갑질119 대표)가 내놓은 책 '안녕하세요, 한국의 노동자들'.
ⓒ 클
책 머리말(프롤로그) 첫 문장부터 돌직구다.
나는 노동 사건만 하는 변호사다. 그것도 노동자 편에서만 일을 한다.
속에 있는 말을 꺼내 놓기는 사실 어렵다. 이런 경우는 더 그렇다. 일종의 '박제'다.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훗날 자기를 옭아매는 근거가 될 수도 있는 문장이다. 그만큼 자신의 선택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다는 뜻일 거다. 현재까지는 말이다.
그런 믿음을 저자는 자신의 과거에서도 찾는다. "나는 애초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노동자의 딸"이라고 전한다. 일상에서도 확인한다. "(나는) 일을 안 하고 살 수 없는 보통의 존재"이자 "노동은 내가 사랑하는 내 가족, 동료, 그리고 나의 일상이자 삶"이라고 강조한다. '금수저'가 아닌 다음에야 보통 사람들 삶이 또한 그러하다. 대부분 노동자의 딸 또는 아들이다. 그래서, 저자처럼 다음 장면이 눈에 밟힐 수 있다.
경비 아저씨는 머리와 어깨에 눈을 뒤집어쓴 채 인도를 쓸고 있었다. 사람도 없는데, 쓸어내도 다시 쌓일 눈인데 왜 눈을 쓸고 계실까? 그나저나 눈 치우는 것도 경비원의 일인가? 이런 일까지 하는데 돈을 너무 적게 받은 것 아닌가?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좀 더 보여주는 문장은 그 다음에 이어진다. "술에 취해서인지 의욕이 끓어올라서 '저 아저씨에게 도움을 드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비록 '술에 취해서인지'라고 했지만, 그렇게만 읽히지 않는 이유는, 저자 스스로 밝혔듯 "내 혈기는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피가 뜨겁다는 말일 테고, 피가 뜨거우면 의욕 뿐 아니라 화도 잘 끓어오르기 마련이다.
이 책에 담겨 있는 '노동자들의 법정 투쟁 이야기' 11편을 읽다보면 그렇다. 입주민의 갑질에 희생당한 아파트 경비노동자를 시작으로, 족쇄 계약에 시달리다 잠시 기억까지 잃었던 휴대폰 판매 노동자, 노동 착취 구조의 약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현장실습생 등, 이들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화를 끓어오르게 한다. 잘 몰랐던 이야기를 접했을 때는 더 그랬다.
"펭수의 팬인 나로서는... 눈물이 쏟아졌다"

▲2023년 3월 17일, 관리자의 '갑질'을 폭로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한 경비원이 일했던 강남구 대치동 아파트 앞에서 아파트노동자 서울공동사업단, 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 서울본부 관계자 등이 추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골프를 치지 않는다. 골프장 캐디들이 무전기와 GPS 수신기를 차고 필드에 나가는 줄 몰랐다. GPS 수신기가 캐디 위치를 추적하고, 그로 인해 뒤처지거나 하면 다들 듣는 무전을 통해 "너 때문에 뒷 사람들 전부 망쳤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 몰랐다. 심지어 "뛰어, 뚱뚱하다고 못 뛰는 거 아니잖아!"라는 인격 모독까지 당할 가능성이 상존하는 현실을 몰랐다.
저자도 골프를 치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의 노동실태를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골프장 홈페이지에 회원 가입하고 "골프를 배워야 하나?"란 질문까지 던졌던 저자는 캐디들이 "출퇴근 시간 만원 손님을 실어 나르는 지하철" 같았다고 전한다. "앞 팀과 뒤 팀 간에는 7분의 간격만 존재할 뿐이니 이걸 일정하게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는 것이다. 그런 구조에서 인격 모독에 시달리다가 극단적 선택을 한 노동자의 일기를 마주한 변호사는, 또 운다.
외롭고 힘든 그를 온전히 바라보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러다 엉뚱한 곳에서 울음이 터졌다. 김세연씨가 캐릭터 '펭수'에게 보낸 쪽지였다. 그 쪽지에서만큼은 김세연씨의 기쁨과 행복감이 느껴졌다. 사람에게 받지 못한 위로를 펭수에게 받는구나 싶어, 펭수의 팬인 나로서는 그 마음을 알 것도 같아서 눈물이 쏟아졌다.
깨달음으로 더 진해지는 것이 공감이다. 결국 저자에게 15년은, 의뢰인을 통해 몰랐던 상황을 깨닫고, 그로 인해 분노와 투쟁 의욕이 더 끓어오르고, 또 그렇게 함께 싸우면서 공감의 밀도가 높아지는 시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중에는 기쁨의 눈물도 있었다. 저자보다 열두 살 많은 띠동갑 '언니들'과 함께 싸웠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국가정보원에서 발행하는 출판물 편집과 디자인 업무를 하던 그들이 마주했던 43세 정년이, 사실은 직렬(직무의 종류)을 성별로 아예 구분한 구조에서 비롯된 간접 차별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2011년 11월에 시작한 싸움... 그리고 최종 승소 후 2023년 가을 '언니들'과 다시 만났다고 한다. 그들의 얼굴을 마주한 변호사는, 또 운다.
그새 나도 늙었고 김선희씨도 흰머리가 늘었다. 조금은 변한 얼굴을 보자 눈물이 났다.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 기쁨의 눈물이기도 하고 속상함의 눈물이기도 했다.
'모노 드라마' 아냐... 실명 밝힌 동지만 서른 다섯 명

▲2020년 7월 23일, 국회 소통관에서 발표된 이재학 PD 사망 사건 진상조사보고서. 보고서 결과 CJB 청주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열악한 처우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윤지영 변호사는 당시 진상조사위에서 활동했다. ⓒ 이재학 PD 사망 사건 대책위 제공 ⓒ 충북인뉴스
그렇다고 이 책이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표현이 좀 그렇지만) 재미있다. 한 마디로, 싸우는 이야기들 아닌가. 박래군 인권운동가의 추천사처럼 "열 한 편의 사건들은 무겁고 진지하지만, 이야기가 재밌다". 그 이유는 저자 스스로 고백했듯 "노동자 편에 서서 싸워 이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독자 입장에서는 재미있는 이야기일 수 있다. 피가 뜨거워지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재미다.
한 명의 배우가 등장하는 '모노 드라마'가 아니란 점도 재미를 높이는 데 한몫한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책의 주인공들을 위해 함께 발 벗고 나선 모든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들이 있기에 세상은 그래도 살 만한 것"이라며 고마움을 전한다. 실제로 열한 편의 사건들에 등장하는 '당신들'은 변호사, 노무사, 활동가, 교수, 기자, 전 대법관 그리고 사법연수생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하다.
이중 저자가 실명을 밝힌 경우만 헤아려 봤더니 서른다섯 명이다. 이름만 슬쩍 언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보다 저자는 각각의 사건에서 어떻게 함께 싸우게 됐고,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등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또한 명확히 밝히고 있다. "수임료 없는데도 기꺼이 함께 싸운 민변 소속 변호사 다섯 명"이라거나 "흔쾌히 진술서를 써 준 기자"라는 식으로 말이다. 앞서 머리말에서 밝힌 고마움이 그저 '립서비스'는 아니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이야기는 더 사실적이고, '모노 드라마'가 아니다 보니 또 이야기는 더 역동적으로 읽힌다. 법정 신문 과정이나 법정에서 저자가 느꼈던 감정도, 예를 들면 "판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법정 곳곳에서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오, 하느님! 나는 불교 신자인데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는 식으로 생생하게 전해진다. "마치 속도감 있는 드라마를 본 기분이 든다(임현주 MBC 아나운서)"는 추천사가 괜한 과장은 아니다.
'드라마'에 더해 저자가 머리말에서 "어려운 노동·법 문제를 쉽게 풀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밝힌 대로, 법 조문, 판결문, 판사 주문, 소장 등은 굵은 글씨로 표기돼 있다. 재미와 함께 의미 또한 풀어내고 있는 셈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만나는 반짝이는 사람"의 의미

▲2016년 5월 28일 19세 청년이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수리 작업 도중 사망했다. 당시 윤지영 변호사는 '구의역 사망재해 시민대책위 진상조사단'으로 활동했다. 책에서 윤 변호사는 "실습이라는 명목으로 학생이라는 취약한 신분을 이용해 노동력을 착취하는 회사, 그걸 알고도 눈감은 정부와 학교, 그건 어른이 할 일이 아니다"고 강조한다. 사진은 2016년 6월 1일 당시 사고 현장에서 고인을 추모한 한 시민의 주장이다. ⓒ 권우성
책을 덮고 다시 마주한 '돌직구', "나는 노동사건만 하는 변호사다. 그것도 노동자 편에서만 일을 한다"는 문장이 처음과는 달리 읽혔다.
아무래도 앞으로 오랜 시간 더, 저자의 싸움이 계속 될 것 같아서다. 이런 사람을 대할 때 특히 용기를 얻는다는 고백을 접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이다. 당사자가 아닌데도 잘못을 바로잡고 싶은 마음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 걸 뻔히 알면서도 싸움에 뛰어드는 사람. 그로 인해 몇 달 뒤 회사를 사직하게 돼도 미련이나 원망도 없다는 그런 사람.
자주는 아니지만 조하은씨(가명)처럼 반짝이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럴 때의 기쁨은 뭐라 설명할 수 없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 살아나고 그래도 세상은 살아갈 만한 것 같아 나까지 용기를 얻는다.
그렇게 용기를 얻어가며 저자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것이다. 사납금제 폐지를 위해 함께 싸우던 택시 기사 네 분을 보고 싶다면서, 그는 "어찌 지내고 계실까? 힘든 처지는 좀 나아진 걸까? 세상은 나아지는 걸까?"라고 묻고 싶다고 전한다. '울보 변호사'로서 계속 싸워야 하는 이유, 저자 자신에게도 던지는 질문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안녕하세요. 한국의 노동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