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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많이 추웠어?"
"어.. 마..이 추...워써."

대회를 마치자마자 아내와 아들에게 전화하였다. 가만히 있으려 해도 아래턱이 덜덜 떨리고 얼굴 모든 근육이 얼어붙은 듯 움직여지지 않아 제대로 말이 나오질 않는다. 이토록 추운 경기는 처음이다.

고향 대구는 더운 날씨 덕분에 '대프리카'라는 별명이 유명했지만 이날 경기를 마치고 나니 사람들은 '대베리아'(대구와 시베리아의 합성어) 마라톤이라며 난리 법석이다. 대프리카와 대베리아라니, 중간은 없다.

대구마라톤 대구마라톤
대구마라톤대구마라톤 ⓒ 본인

2월 23일 일요일. 대구국제마라톤을 무사히 마쳤다. 사실 무사하진 않았다. 대회 후 감기 몸살 기운이 있어 환자라 하기에는 모호하고 그렇다고 멀쩡하다 말할 수도 없는 상태로 며칠 동안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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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막과 강한 바람으로 악명 높은 대회인데 추위까지 더해 고생했더니 옛날 마라톤 평원을 달려 전장의 소식을 전했던, 인류 최초 마라토너인 그리스 전사가 원망스러웠다. 왜 하필 42.195km를 그렇게 멋있게 달려버려서 사람을 이토록 고생시키는 것인지.

풀코스는 작년부터 코스가 변경되었다. 2002년 월드컵과 2003년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위해 지어진 대구스타디움에서 출발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미국과의 예선전, 터키(튀르키예)와 3, 4위전을 펼친 경기장이다.

대구마라톤은 힘든 코스로 유명하다. 첫 번째 난관은 출발 후 7km 지점 담티고개 오르막. '담티(담재)'는 '담담한 고개' 혹은 '조용한 고개'라는 의미이다. 옛날 지역 주민들 사이 담티(담재, 淡齋)라는 이름이 이 고개 근처 학문을 닦던 선비(재사, 齋士)들이 많아 붙여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곳에는 유명한 화장장이 있다. 많은 분들이 소중한 사람을 마지막으로 떠나보냈을 장소이다. 나 또한 외할머니를 마지막으로 여기서 떠나보냈다. 많은 기억을 함께 한 외할머니가 작은 항아리 단지에 담겨 돌아왔을 때를 기억한다.

뇌졸중 이후 오랜 시간 후유증을 앓고 계셨기 때문에 죽음의 순간에는 생각보다 담담했었다. 외할머니의 부재가 슬픔으로 다가온 건 시간이 지나 추억들이 하나씩 불쑥 떠오를 때였다. 언덕 이름처럼 담담한 마음으로 뛰어 올라갔다.

담티고개를 넘으면 범어 교차로와 수성못, 수성교를 지나 대구 도심 번화가인 반월당으로 향한다. 여기까지 큰 오르막과 내리막이 없어 평지를 달리는 즐거운 구간이다. 아니다. 다시 생각하니 즐거울 것까진 없다.

수성못은 1925년 일제강점기 때 농업용 저수지로 조성되었다. 인근 지역 농경지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이후 농업 비중이 줄어들며 1960년대부터 지역 주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고인 물처럼 보이지만 신천이랑 이어진 수로가 있어 흐르는 물이다.

반월당은 조선 선조 시대 불교 사찰인 '반월당(半月堂)'에서 유래되었다. 승려들이 머물며 수도하던 곳으로 당시 주민들에게도 익숙한 장소였는데 사찰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가 "반월당 터"로 불리며 지명으로 정착했다 한다.

반월당과 현대백화점, 약령시를 지나 이상화 시인, 서상돈 선생 옛집, 계산성당 등이 있는 대구근대역사 골목을 거쳐 청라언덕이 있는 작은 오르막을 뛰어올라야 한다. 청라언덕은 외국 선교사들이 살던 곳으로 서양 가옥 유적이 남아 있다. 달성토성이 대구 중심일 때 이곳이 달성의 동쪽이었기 때문에 '동산'이라고도 불렸다. 계명대학교 의과대학 부설병원이 위치해 있는데, 그 이름이 '동산병원'이다.

계산성당은 오래된 성당으로 중학생이던 시절, 당시 미술 선생님이 홍대 미대를 나왔다는 자부심이 굉장한 분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미술 이론 내용이 머리에 쏙쏙 들어오도록 잘 가르쳐 주시던 분이었다. 인상파 화가 이름 외우는 법, 보색 조합 외우는 법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니까.

어느 날 선생님이 계산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 빛을 말과 글로 설명해 주면서 본인이 봤던 가장 아름다운 결혼식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나는 천주교 신자가 아님에도) 결혼식을 계산성당에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청라언덕 동산병원 오르막 내리막을 달려 우회전하면 서문시장이다. 서문시장(西門市場)은 조선 시대(1660년대 현종 재위 시절) 형성된 대표 전통시장으로 대구읍성 서쪽(서문) 근처에서 시작되었고, 당시 대구 3대 시장(동문시장, 남문시장, 서문시장) 중 가장 큰 규모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대구가 영남 지방 중심 도시로 성장하면서 상업이 발달했던 결과이다. 현재 서문시장은 대한민국 3대 전통시장(서울 남대문시장, 부산 국제시장, 대구 서문시장) 중 하나로, 야시장이 활성화되어 관광 명소로도 인기가 많다.

달성 공원(達城公園) 구간은 내가 기억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아파트 단지가 많이 들어서 있어 이번 마라톤을 달리며 상전벽해를 실감한 곳이다. 대구를 대표하는 역사 공원으로, 신라 시대 축조된 '달성(達城)'에서 유래되었다. 신라가 삼한을 통일하기 전(서기 261년경, 신라 미추왕 시대) 토성으로 오래된 성곽 중 하나이다.

"달구벌(達句伐)의 성(城)"이라는 의미가 있다. 고려 시대 이후 중요한 요새로 활용되었다. 1905년 일제가 대구 지역을 도시화하면서 달성 토성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하였고 이후 1960년 대부터 대구시가 재정비하면서 현재 달성 공원(達城公園) 이름이 정착되었다. 무엇보다 동물원이 있어 어릴 때 아빠와 함께 자주 왔던 곳이다.

신천에서 동대구역으로 가는 길 25km 지점부터 본격적인 오르막의 시작이다. 절반 이상 달려온 마라토너에게 코스 후반부 오르막은 큰 도전이다. 체력은 소진되고 목표했던 페이스보다 늦어지며 많은 선수들이 어려워하였다. 고난 길은 이어진다. 동대구역과 파티마 병원을 지나 아양교로 가는 구간에도 크고 작은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다.

파티마병원은 파티마(Fátima)라는 이름 그대로 가톨릭교회와 관련 있다. 포르투갈 파티마 성모 발현 사건에서 유래했는데 그 거룩한 단어 앞에서 고통을 견디며 기도하는 심정으로 오르막을 뛰어 올라갔다. 코스를 설계한 대구국제마라톤 사무국 직원이 원망스러웠다.

강을 의미하는 아, 볕을 뜻하는 양으로 이루어진 이름처럼 아양교 구간은 햇볕이 잘 들어 추운 날씨와 바람으로 차갑게 식어가는 몸을 잠시나마 달래주었다. 1960년대 금호강 위에 만들어진 다리를 직접 뛰어 건너는 재미가 있다.

밤나무 아랫마을이란 뜻을 가진 율하에서 연호역으로 가는 길은 마치 고속도로처럼 보이는 도시 순환도로 범안로를 달려야 한다. 교외 지역 자동차 전용 도로이기 때문에 나무와 건물이 없어 그늘 또한 전혀 없는 구간인데 오르막은 힘들었지만 햇볕이 따뜻하여 차라리 다행이었다. 코스 설계한 대구국제마라톤 사무국 직원에게 감사했다.

​39km 연호역을 지나면 42.195km 끝 지점이 코앞처럼 다가오지만 메이저리그 야구 전설 요기 베라의 유명한 말처럼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라이온즈 파크 야구 경기장으로 올라가는 이 대회 최고 난이도의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다. 심지어 대구국제마라톤 주최 측에서는 마지막 이 오르막을 '시그니처'라고 했단다. 역시 코스 설계한 대구국제마라톤 사무국 직원이 원망스러웠다.

가장 어려운 오르막을 지나 다시 유니버시아드 대로를 달려 대구스타디움으로 들어간다. 잠깐의 평지가 나와 속도를 올려보았다. 기록에 큰 변화를 주기에는 이미 늦었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마라토너이다. 트랙을 200m 정도 달린 후 피니시. 첫 대구국제마라톤 풀코스 2시간 53분 29초.

대구는 고등학교 때까지 나고 자란 고향이고 방학과 명절 때마다 고향 친구들과 놀았던 곳이다. 직장 생활하며 대리 시절 지점 순환 근무 때 신혼 생활 겸하여 2년 동안 살았던 도시이기 때문에 여러 추억이 깃든 장소이다. 여행하듯 달리며 대회를 즐겼다.

"아빠! 나 다음에는 대구 대회 따라갈래!"

마라톤 대회마다 따라다니며 응원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들이 전화하며 소리쳤다.

'그래, 내년에는 아들 응원받으며 더 잘 달려봐야겠다. 가족과 함께 또 와야지.'

오르막이 반복되는 코스, 추운 날씨와 바람까지 더해 무척 힘든 대구국제마라톤이었지만 묘하게 한 번 더 찾고 싶다. 다시 도전하고 싶은 대회이다. 올해는 4만 8천여 명이 참가하며 국내 최대 수준 대회로 성장했다고 한다. 벌써 내년 대구국제마라톤이 기다려진다.

#대구#마라톤#러닝#운동#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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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매일 달리고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아들의 아빠이자 아내의 남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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