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D 밴스 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월 28일 워싱턴 DC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는 모습. ⓒ UPI/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충돌한 지 열흘이 흘렀다. 이후 미국과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도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반면, 이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이자 여전히 전쟁 중인 푸틴의 러시아가 조용하다. 마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아닌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열흘의 시간
지난 열흘의 시간을 두 가지 관점에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미국·우크라이나 그리고 유럽이라면, 다른 하나는 미국·우크라이나 그리고 러시아의 맥락이다. 지난달 28일 이후, 가장 발 빠르게 대응한 곳은 유럽이다. 3월 2일, 영국의 키어 스타머 총리 주재로 유럽의 정상들은 런던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주요 국가 정상들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이번 전쟁의 침략자는 러시아이며, 피해자는 우크라이나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유럽의 우크라이나 지지를 국제사회에 재차 보여주었다. 이틀 후인 4일,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으로부터 중요한 서한, 즉 우크라이나가 미국과 광물 협정에 서명할 준비가 돼 있다는 의사를 받았다고 밝혔다. 사실상 젤렌스키가 항복한 것이다.
다시 이틀 후인 6일, 젤렌스키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 특별정상회의에 참석해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정상 및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 등과 연쇄 회동을 가졌다. 이 정상회의에서 유럽연합은 미국을 대신해 8000억 유로(약 1천229조 원) 규모의 유럽 재무장과 우크라이나 지원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다음 주 '우크라이나와 미국이 사우디에서 의미 있는 회의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라고 밝혔다. 실제 젤렌스키는 10일 사우디를 방문해 빈 살만 왕세자를 만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을 두고 미국과 유럽은 물론 사우디까지 거론되고 있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움직임은 어떠한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지난 6일 모스크바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전사자 유족을 만났다. 이는 지난 3일 러시아 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숨진 군인 가족들을 위한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한 이후에 나온 행보다. 우크라이나와 유럽이 분주하게 외교적으로 움직이는 것과 달리 푸틴은 러시아 내부 결속을 다지는 행보를 보여준 것이다. 다소 한가해 보인다.
그러나 유가족과 만나 내부결속을 다진 날,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시설에 대규모 미사일과 드론 공격을 감행했다.
영국 BBC 보도에 따르면, 이는 트럼프가 젤렌스키와 충돌 후, 트럼프 행정부가 우크라이나 군사 원조와 군 위성사진 제공을 유예하자마자 나온 공습이다.
또 7일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에 대해 관세와 대규모 제재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strongly considering)라고 밝혔다. 이는 마치 지난 2018년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북미정상회담 이전에 고조되었던 한반도 위기 상황과 비슷해 보인다. 실제 8일,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보다 러시아와 협상하는 것이 수월하다(Trump says Ukraine 'more difficult' to deal with than Russia)"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트럼프와 푸틴 대통령이 중요한 협상을 앞두고 긴장을 고조시켜, 협상의 결과를 극대화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문스럽다.
러시아의 생각은?

▲지난 6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전사자 유족들을 만난 푸틴 러시아 대통령 ⓒ AFP/연합뉴스
이런 상황에서 지난 3일 자
CNN 보도 내용은 흥미롭다. CNN은 트럼프 대통령이 젤렌스키와 충돌한 것을,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계획된 행동으로 보고 있다. 트럼프 입장에서 젤렌스키는 러시아와 협상하는 데 있어 장애물이기 때문에 이번 충돌로 그를 배제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 3월 2일, 크렘린궁 대변인인 드미트리 페스코프의 발언은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미국의 새로운 행정부(트럼프 2기 행정부)가 모든 외교 정책 노선을 변경하고 있다"라면서, "이러한 변화들은 대부분 우리(러시아)의 비전과 부합한다"라고 밝혔다.
이는 트럼프와 젤렌스키 대통령의 충돌 후 불과 이틀 만에 나온 반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 해결을 두고 트럼프와 푸틴의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지난달 18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미국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과 러시아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이 회담을 가진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회담에서 우크라이나는 철저하게 배제(sidelining)되었고, 지난 28일 트럼프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젤렌스키를 제외시켰다.
이 사안 관련해 푸틴이 공개적인 발언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라브로프 외무장관의 발언과 행보는 푸틴의 의중을 읽기에 충분하다. 라브로프 외무장관은 지난 2004년부터 무려 21년간 외무장관을 지낸 러시아 역대 최장수 외무장관이다. 심지어 2004년 푸틴에 의해 외무장관에 임명된 라브로프는 메드베데프 대통령 시절에도 외무장관직을 지속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지난 2일 라브로프 장관은 젤렌스키를 향한 트럼프 대통령의 무례한 행동이 전쟁 종식을 위해 '상식적'(common sense)이었다며 칭찬한 반면, 이후 유럽이 보인 행보에 대해서는 유럽이 여전히 전쟁을 지속시키려 한다며 비난을 가했다. 그는 미국은 칭찬하고, 유럽은 비난하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두고 바이든 행정부 당시 끈끈했던 대서양 동맹에 균열을 가한 것이다.
그러면서 라브로프가 이어간 발언이 중요하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길 바라고 있으며, 워싱턴과 모스크바는 모든 사안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상호 이익이 될 경우 실용적으로 서로 동의할 수 있다." ("the United States still wanted to be the world's most powerful country and that Washington and Moscow would never see eye to eye on everything, but that they had agreed to be pragmatic when interests coincided.")
이 발언을 통해 푸틴의 러시아가 어떤 생각인지 읽을 수 있다. 먼저, 여전히 미국이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길 바란다는 것은 소련이 붕괴한 이후인 1990~2000년대 초반과 달리 미국이 세계 유일의 패권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미국이 지속적으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미중 경쟁에서 미국이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는 모든 분야에서 미국과 국익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상호 이익이 될 경우에는 언제든 합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러시아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미중 경쟁에서 러시아는 미국에 유리한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라브로프는 현재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향후 미국과 러시아 관계의 모델이라고 밝혔다. 그에게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경쟁도 치열하지만 동시에 '상호 협력'(mutually beneficial things)으로 전쟁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발언들을 종합해 보면, 현재 푸틴의 러시아는 트럼프 행정부의 재등장을 바이든 행정부 당시 냉랭했던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기회로 보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2022년 9월 21일 당시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미국 뉴욕 한 빌딩에서 열린 글로벌펀드 제7차 재정공약회의를 마친 뒤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적으로 침공하며 시작된 전쟁이 3년이 지났다. 분명 전쟁을 일으킨 국가는 러시아인데, 지난달 28일 이후 마치 러시아는 전쟁과 상관이 없는 국가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오히려 미국이 나서서 러시아를 옹호하는 듯한 인상이다. 바이든 행정부 당시, 미국과 유럽의 공조 하에 러시아를 고립시켰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두 가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첫째, 러시아의 현실 인식과 전략이다. 러시아는 불과 30년 전 미국과 함께 G2 국가였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 이후 세계정치는 2000년대 초중반까지 미국 일극의 시대였고, 이후 명실공히 미국과 중국의 G2 시대가 되었다.
이 상황에서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유럽과 손을 잡았다. 제국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러시아는 최근 트럼프 등장 이후 미국과 유럽의 대서양 관계의 균열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가 미국과 중국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히 하고, 최소한 유라시아 지역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협조하에 유럽의 영향력을 대체하려는 것이다.
둘째, 노골화되는 힘의 정치다. 일반적으로 국내정치와 국제정치의 가장 큰 차이는 '무정부성'이다. 국내 정치는 민주정부든 독재정부든 정부가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질서는 유지되는 반면, 국제 정치는 개별 국가 상위의 권력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강대국, 힘이 센 국가들에 의해 작동하는 측면이 강하다.
탈냉전 이후 개별 국가들이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와 유럽연합과 같은 지역통합에 참여하며 그 안에서 새로운 규범들이 강화되는 양상을 보였고, 힘의 정치는 다소 약화되는 듯했다. 이에 국가들이 대놓고 공개적으로 자국의 이익만을 고수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한계가 있긴 하지만 1992년 리우환경협약, 1997년 교토의정서, 2015년 파리협약 등이 그 예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경향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국제사회의 무정부성은 극대화되고 있다. 개별국가들의 각자도생이 더욱 요구되는 상황이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도 친구라는 생각을 해서는 곤란하다. 트럼프가 보여주듯이 동맹도 하루아침에 흔들리는 상황에서 가치 동맹을 부르짖으며 플랜B, C를 세우지 않을 경우 국익은 담보할 수 없다.
이에 가치동맹을 내세우며 미국과의 일방외교, 중국과 러시아를 배척하는 외교는 곧 죽는 길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과 함께 러시아는 국제사회에서 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한국 정부도 빨리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