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하루에 만 보를 걷는다. 내킬 땐 만 오천 보도 걷고 이만 보도 걷는다. 환갑에 가까워진 그녀는 걷기가 가장 편한 운동이라고 했다. 한평생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던 엄마. 누구에겐 별거 아닐 만 보 조깅이 엄마에겐 새로운 도전과도 같았다.
조깅 하는 길은 매번 똑같다. 집에서 15분만 걸으면 동네 몇 곳은 지나는 긴 하천이 있다. 한강처럼 잘 갖춰진 곳은 아니다. 자전거 도로로 몇 무리의 라이더들이 간헐적으로 지날 뿐 오가는 사람이 적어 낮에도 고요한 곳이다.
엄마에게 끝내 하지 못한 말

▲몇 시에 어디에서 운동을 하든 죽을 이유는 없다. ⓒ hjlee200 on Unsplash
엄마가 조깅을 나가는 시간은 저녁 9시. 할머니 저녁 식사를 차려드리고 설거지를 마친 뒤 잠시 숨을 돌리면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다. 그때서야 줄 이어폰을 끼고 캡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채 하천으로 향한다. 엄마는 그 시간이 가장 좋다고 했다. 오롯하게 자신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순간이라고.
처음 한두 달만 열심히 걷겠지 싶었지만 저녁 조깅은 벌써 1년째 그녀의 일상이 됐다. 비가 오고 눈이 내려도 엄마는 꼭꼭 밖을 나섰다. 서울에 올라온 후 이따금 저녁 안부 전화를 걸면 수화기 너머론 늘 바람 소리가 스치곤 했다.
전화를 마칠 무렵 나는 이내 헬스장에 가는 건 어떠냐고 제안한다. 밤이 드리운 하천은 꽤 어두침침하다. 듬성듬성 꽂힌 가로등은 존재 가치가 무색하리 만큼 희미하게 도보를 비춘다. 요즘 세상 흉흉해, 헬스장 가자. 응? 내 말에 엄마는 이내 웃음을 짓고 만다.
"가면 젊은 애들 밖에 없어서 민망해. 사람들도 너무 많고. 엄만 이렇게 풀 향기 나고 조용한 하천이 좋아."
엄마의 고된 하루를 위로하는 소중한 시간을 내가 뭐라고 말리겠는가. 결국 백기를 들고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라며 전화를 끊는다.
지난 2일, 충남 서천에서 야간 운동을 나온 40대 여성이 살해 당했다. 일면식도 없는 30대 남성에 의해. 사기를 당해 마음이 힘들었단 같잖은 변명을 하며. 그저 심기불편한 자신의 눈에 띄었단 이유로 칼을 휘둘렀다. 의도가 어땠든 범행이 쉬운 타깃으로 그녀를 정했을 거란 의심은 차마 버리기 힘들다.
피해자는 외출한 지 6시간이 넘어서야 도로변 공터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얼마나 쓸쓸했을까. 그녀에게 끝끝내 온기를 전해주지 못한 3월의 밤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다시 여성의 삶에 균열이 갔다. 내일은 달라질 거라며 버텨 온 우리의 일상이 결국 또 이렇게 무너졌다. 누구나 밤길 위에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는 끝나지 않았다.
뉴스 기사를 보자마자 핸드폰을 들고 엄마 번호를 입력했다. 첫 마디로 저녁 조깅을 그만두라고 단단히 일러둘 참이었다. 그러나 차마 전화 연결은 누르지 못하고 전화기만 귀에 댄 채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지금도 엄마는 긴 밤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신나는 트로트 노래를 들으며. 좋아하는 풀 향기를 맡으며.
기사에 달린 댓글들이 생각났다. '밤길에 나선 여자 잘못이지', '밤늦은 시간에 운동을 왜 해', '사람이 많이 다니는 쪽으로 가야지'. 그저 여성 피해자란 이유로 범죄의 책임을 떠넘기는 또 다른 가해자들. 내가 엄마에게 운동을 그만두라고 말하면 그들과 다를 게 뭐가 있는가.
피해자는 잘못이 없다. 몇 시에 어디에서 운동을 하든 그녀는 죽어선 안 됐다. 그날 그녀도 평범하게 가족과 식사를 마치고 온전한 자신의 시간을 위해 초봄 한파에도 밖에 나섰을 테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매일 걷던 길을 걸었을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어김없이 이어져야 하는 그런 평범하고도 소중한 일상을 보냈을 그녀.
여자들의 긴긴밤이 빨리 끝나기를
그런데 여성의 일상은 도대체 몇 번은 붕괴돼야 비로소 안전해지는 걸까. 지난해 9월 전남 순천에서 야밤에 길을 걷던 18살 여고생이 흉기에 찔려 살해 당한 지 이제 반년이다. 매번 안타까운 마음으로 조문하며 넘어가기엔 너무나 많은 이들이 거리에서 목숨을 잃고 있다.
여성의 외출을 막는 게 아니라 남성을 집 밖에 못 나가게 하면 범죄 발생률이 줄어들 거란 우스갯소리가 이젠 웃기지 않는다. 전화하는 척을 하거나 호신 용품을 들고 밖에 나서야 하는 이 질리도록 긴 밤은 언제 끝나는 걸까.
오늘도 야근을 마치고 늦은 밤 회사를 나선다. 그리고 집에 귀가할 때까지 한두 번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한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잠시 멈춰 먼저 지나가도록 냅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다가 모르는 남성이 오면 먼저 타고 올라가도록 멀찍이 서서 딴청도 피워본다.
안전하게 집에 도착하고 나면 한창 조깅 중일 엄마의 밤을 챙긴다. "조심히 다녀와. 밤이니까 이어폰은 한 쪽만 끼고." 수화기 너머론 어김없이 바람 소리가 들린다.
"응, 다녀올게. 꽃이 슬슬 피려고 하네. 봄이 오려 나봐." 엄마의 기대를 끝으로 전화는 끊어진다. 엄마에게 별일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잠 잘 채비를 한다. 내일도 나는 엄마에게 안부 전화를 걸 것이다. 그 다음 날도, 다 다음 날도. 엄마가 몇 시에 나가든 안전하다고 확신이 드는 그날까지.
엄마의 밤도 나의 밤도 그리고 당신의 밤도. 부디 매일 안전하길. 우리의 밤이 언젠가 낮처럼 밝아지길 믿으며, 두려움이 사라진 밤길을 함께 웃으며 걸을 수 있길 바라며. 여성으로서 여성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이 늘 이런 희미한 염원이라 그저 항상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