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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사회인류학자 토마스 힐란드 에릭센(Thomas Hylland Eriksen 1962~)은 항암 치료 이후 재발된 암 덕분에 귀한 선물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그 선물은 '느린 시간'이라는 것이며, 그 선물 덕분에 자신에 대해 다시 깨닫고 다른 모든 것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암 선고 이후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어 '삶의 마지막 여정에서 찾은 가슴 벅찬 7가지 깨달음' <인생의 의미>라는 책을 썼다.

토마스 힐란드 에릭센 <인생의 의미> 2025년 1월 20일 11쇄/더 퀘스트 출판사/ 가격 18,800원
토마스 힐란드 에릭센 <인생의 의미>2025년 1월 20일 11쇄/더 퀘스트 출판사/ 가격 18,800원 ⓒ 인생의의미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에릭센은 관계, 결핍, 꿈, 느린 시간, 순간, 균형, 실 끊기로 이루어진 7가지 의미 안에서 그는 시공간과 인종을 넘어서 다양한 문화와 지식을 서술하며, 각각의 주제어가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차분하게 설명한다. 플라톤과 몽테뉴, 모차르트, 슬라보예 지젝 등 철학, 과학, 예술, 록음악과 영화에 이르기까지 대중문화를 넘나들며 각각의 주제어를 풀어낸다.

에릭슨은 AI시대에도 여전히 삶의 의미라는 주제가 중요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삶의 의미라는 주제는 언제나 존재했다. 인간은 언제나 존재의 본질과 방향성을 찾으려 했다. 삶의 의미에 대해 묻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AI에게 체스에 이기는 법이나 부탄의 경제 혹은 리스본의 관광 명소에 대해 묻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AI는 인생의 의미를 성찰할 수 없다. AI에게는 삶이 없기 때문이다. AI는 육체도 없고 어린 시절의 기억도 없으며 이웃에 대한 책임감도 없고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인식도 없다(p.11)."

인류는 과학과 기술에서 크게 진보했지만 삶의 의미는 과학과 기술을 동원해 답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삶의 의미를 묻는 일은 인간 고유의 영역이다. 삶의 의미,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근원적인 지점에서 다르지 않으므로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사람들이 동시대인처럼 느껴진다고 에릭슨은 말한다.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 몽테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아리스토텔레스, 아메리카 원주민, 서아프리카의 그리오, 고대의 철학자, 근대 초기의 극작가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서로 다르지만, 그 다름을 통해서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간다. 마치 가는 실들이 모여 거대한 태피스트리(tapestry)를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독자에 따라 각기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 '관계, 결핍'이라는 주제가 크게 와 닿았고, 죽음에 해당하는 '실 끊기'라는 주제는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는 아주 각별하게 느껴졌다.

관계 모든 것은 실처럼 연결되어 있다.
관계모든 것은 실처럼 연결되어 있다. ⓒ 김민수

먼저 첫 번째 주제인 '관계'의 주요 내용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태초에는 모든 것이 어둡고 조용했다. 아무 것도 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언가 존재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모든 것들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이다. 그 '모든 것' 속에는 인간이 만든 물건도 포함된다. 물건 뿐 아니라 콘서트, 여행 등 모든 것들이 인간과 관계를 맺는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상호 연관성을 갖는다.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하려면 권리와 의무가 가득한 친밀한 관계가 필요하다.

권리와 의무가 가득한 친밀한 관계에서부터 연결되어 있음을 미처 느끼지 못하는 것들까지도 관계를 맺음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관계에 대한 동경과 갈망, 때로는 결핍을 통해서 인생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것이다.

에릭슨은 이렇게 나와 타인을 연결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가느다란 실로 표현한다. 이어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면서 나와 타인을 연결시켜주는 실, 이것이 관계성의 상징이다.

마지막 주제로 다루는 '실 끊기'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지만, 단절이 아니라 과거의 인물들이 동시대인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우리와 이어져 있으므로 영원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 역시도 좋은 것이다.

결핍 오르막길이 있어야 내리막길도 있다.
결핍오르막길이 있어야 내리막길도 있다. ⓒ 김민수
인생의 두 번째 의미는 '결핍'이다.

온갖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는 이들과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작은 결핍이라도 주지 않으려는 부모들과 함께 온갖 결핍 속에서 힘겨워하는 이들이 꼭 읽어보았으면 하는 챕터다.

"자유로운 보통 사람에게는 여러 개의 소원이 있지만 감옥에 갇힌 죄수의 소원은 하나다. 건강한 여자에게는 여러 개의 소원이 있지만 몸이 아픈 그녀 언니의 소원은 하나다(p.65)."

에릭슨은 '항상 구할 수 있는 것에는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오늘 날 전 세계 중산층과 상류층이 직면한 큰 문제는 '부족이 아니라 풍요'(p.66)라고 본다. 물론,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온갖 결핍 속에 사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다. 갈증을 모르는 사람이 물의 가치를 모르는 것처럼, 결핍 없이 온갖 풍요를 누리는 이들은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의미다.

이 주제를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김지하의 시를 떠올렸다,
80년대 군부독재의 폭압에 항거하며 눈물을 삼키며 불렀던 노래였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1987년 이후의 세대들에게는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는 이들이 생경할 것이다.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이후 이 나라는 진영논리로 험난한 시절을 살아가고 있다. 유신독재와 군부독재가 억압하던 시대를 살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결핍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이들, 그런 체제를 경험해보지 못해 민주주의의 결핍을 모르는 이들이 '극우보수주의자'들이 되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뒤흔들고 훼손시키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대학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결핍이라고는 모르고 승승장구했던 이가 망상에 빠져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결핍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 책에도 소개하고 있는 북아메리카 원주민 체로티 부족의 '두 늑대의 신화(p.53)'처럼, 어떤 결핍에게 먹이를 주어야 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실 끊기 당신은 직소 퍼즐 한 조각이다. 당신이 있어야 퍼즐을 완성할 수 있다.
실 끊기당신은 직소 퍼즐 한 조각이다. 당신이 있어야 퍼즐을 완성할 수 있다. ⓒ 김민수

그 외에도 꿈, 느린 시간, 순간, 균형, 실 끊기에도 인생의 의미를 강화시켜줄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에릭슨은 '느림'에 대해서 "느림은 규칙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시들어버리는 삶의 근육이다"라고 한다. 우리의 육체에만 근육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 인생에도 근육이 필요하다.

노년기의 육체 건강을 유지해주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근육'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육체적인 근육이 튼튼한 이들이 정신적으로도 튼튼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 둘은 하나다. 만일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데, 육체의 근육은 차고 넘치는데, 정신적인 근육이 시들어버렸다면 껍데기만 남은 인생일 것이다. 빈껍데기만 남은 인생은 아름다울까?

느린 시간 <인생의 의미>네 번째 주제
느린 시간<인생의 의미>네 번째 주제 ⓒ 김민수

이 책 서문을 보는 순간 '좋은 책'임을 직감했으며, 7가지 주제들을 읽을 때마다 공감하며, 내 삶을 돌아보았다. 한 번 읽고 또 다시 읽고 나니 단숨에 읽혀졌던 책에 이토록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각각의 주제들을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거나, 사랑하는 가족 혹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인물들에게 적용해 보니 또한 많은 대답을 주었다. 인생의 의미를 찾는 이들이 많아지면, 세상도 더욱 밝아지지 않을까?

인생의 의미 (양장 특별판) - 삶의 마지막 여정에서 찾은 가슴 벅찬 7가지 깨달음

토마스 힐란드 에릭센 (지은이), 이영래 (옮긴이), 더퀘스트(2024)


#에릭센#인생#삶#결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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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나도 외롭다, 그래서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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