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평화 세계가 도래했다고 믿었던 선진국들의 눈앞에 전쟁이라는 난제가 던져졌다. 1, 2차 세계대전 후 세계 각지에서는 우리가 모르던 크고 작은 분쟁들이 끊임없이 일어났으니 사실 전 세계적으로 갈등이 종식된 적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전쟁은 일반적인 시민이라면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는 재앙이며,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난 곳들을 목숨 걸고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도 아주 평화적이고 숭고한 목적에서.
<빛과 멜로디>는 분쟁지역 전문 사진작가인 권은의 이야기다. 권은은 허구의 인물이지만 그가 대표하는 인간상, 그리고 소설의 배경은 아플 정도로 현재다. 페이지 사이사이에는 시리아, 가자 지구, 우크라이나의 폭력이 존재하며 고향을 잃은 난민들이 있다.
전쟁의 참혹함이란 평화를 주장하는 외국인을 비껴가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에 권은 또한 칠 년 전에 시리아에서 다리 한쪽을 잃는 큰 부상을 당했다. 분쟁 지역에서 사진을 찍다가 영구히 다치기까지 했다고 하면 위대해 보이기 마련이지만 권은은 끊임없이 고찰하게 된다.
자신에게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가장 처절한 빛을 프레임에 담아 내보이기 위해 희생자들의 고통을 이용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죽음만을 생각하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사진에 담아 뭐든 쉽게 잊는 무정하도록 나태한 세상에 타전하고 싶다는 마음, 그들을 살릴 수 있도록, 바로 나를 살게 한 카메라로······.

▲<빛과 멜로디> ⓒ 문학동네
각자의 길에서 맞닿는 시간들
소설은 권은과 주위 인물들에 대한 서사를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소설의 또 다른 축이 되는 인물은 '승준'이다. 승준과 권은의 시간은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맞닿았다. 같은 반 안에서 승준은 반장이었고, 권은은 창문도 없는 집에서 혼자 가난하게 지내는 아이였다.
원은이 가정사로 인해 나흘째 결석을 하자 담임 선생님이 반장더러 그 집에 찾아가 보라고 한 것. 승준은 그 깜깜한 집 안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스노볼의 태엽을 멍하니 감고 있는 권은을 본 순간 그를 도무지 그냥 놔둘 수 없게 되었고, 그 집에 방문할 때마다 자신에게 있는 여러 물건을 가져다준다.
그러다 아버지의 낡은 필름 카메라까지 선물하고, 그 일이 권은의 삶을 완전히 바꾼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빛이 모여드는 광경에 매료된 권은은 온갖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사람들을 찍는 일에 몰두하다가 유명한 분쟁지역 전문 사진가가 되고, 이후 기자가 된 승준과 다시 만난다.
그 사이 승준은 출판사에서 일하던 애인 '민영'과 결혼해 딸 '지유'를 얻었다. 책 속에서 지유는 갓 태어나 돌을 넘기지 않은 참이고, 승준은 마흔두 살이다. 그는 자기가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지, 세상으로부터 자유를 잘 지킬 수 있을지 불확실해하지만, 민영과 함께 희망의 씨앗을 잘 키워 가고 있다.
권은을 다시 만난 것은 우연하지만 우연만이 다는 아닌 기회였다. 당시 승준은 문화계 신진들을 인터뷰하는 기획을 진행 중이었는데, 떠오르는 사진가 권은이 자기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사실을 잊고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한다.
평소 인터뷰에 잘 응하지 않기로 소문난 권은이지만 초등학교 시절 자신을 구한 반장을 기억하고, 인터뷰를 하기로 한다. 승준은 권은에 대한 일화를 뒤늦게 떠올리며 둘의 시간은 다시 조금씩 맞물린다.
편지에서 그녀는 그를 반장이라 불렀다.
반장,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네가 이미 나를 살린 적 있다는 걸······.
너는 기억할 필요가 있어.
승준과 권은의 관계는 미묘하다. 그들 사이에는 로맨스가 없지만, 어떤 연인보다 애틋해 보이기도 한다. 승준은 자신이 카메라를 쥐여 주어 인생을 바꾼 소녀에게, 그리고 결국 그 카메라로 인해 신체의 손실이라는 큰 부상을 입은 사진가의 삶을 죄책감과 함께 속수무책으로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권은은 자신에게 의미 있는 모든 것의 시초가 된 소년, 그리고 분쟁이 끊이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야 할 그의 핏줄을 담담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승준의 아내 민영은 그들의 특별한 연결고리를 질투하기도 하고, 권은의 영향으로 일상이 붕괴된 우크라이나 여성들의 인터뷰를 맡겠다는 승준의 일에 딸이 나쁜 영향을 받을까 우려하기도 하지만 결국 예정된 수순처럼 그들이 하는 일을 지지하게 된다. 민영도 결국 같은 결의, 타인에 대한 따뜻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뭐랄까, 사랑을 생략한 채 이별을 겪은 연인 같았다. 민영이 아는 한, 그런 관계는 그들뿐이었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사랑
책의 중반에도 결말에도 권은, 승준, 민영에게 드라마틱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지탱하고 있는 일상의 반대편에서 애정이라는 고리로 연결된 난민들의 삶의 궤적이 조금씩 진행된다.
권은이 영국으로 갈 수 있게 도운 시리아 난민 '살마'는 정착해서 결혼식을 올리고, 승준의 인터뷰이인 임신 중인 우크라이나 여성 나스차는 태어날 아이를 위해 고국을 떠나는 열차를 타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살마와 나스차의 삶 또한 겹쳐진다.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영향을 주고받는다. 권은과 승준이 서로를 보듬었듯이.
<빛과 멜로디>를 통해 조해진은 결국 사람을 살리는 것은 쏟아지는 빛 같은 사랑이며, 그 사랑은 한 사람에게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았던 모든 이를 거쳐 프리즘처럼 더 넓디넓게 퍼져 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2025년 현재, 간신히 체결된 가자지구의 휴전 상태가 유리잔처럼 깨지려 하고 있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을 강대국이 경제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려고 하는 상황에서 인간 대 인간의 애정이 얼마나 귀하고 어려운 것인지 깨닫는다. 그런 살갑고 소중한 것들이 무엇보다 절실한 때다. <빛과 멜로디는> 서정적이지만 치열하게 인간애를 환기하는 소설이다.
태엽이 멈추면 빛과 멜로디가 사라지고 눈도 그치던 오래전 그 작은 방을 떠올리며……
그녀와 그는 발맞춰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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